음악 좋아하는 장공

음악평론가 김진묵 에세이 『흔들리거나 반짝이는』

장코폴로 2009. 2. 8. 11:35

<서평>음악평론가 김진묵 에세이 『흔들리거나 반짝이는』

 

김진묵 지음 / 국판변형 / 320쪽 / 값 10,000원 /정신세계사


  이 책을 손에 들고 내내 웃었다. 말도 되지 않는 웃기는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데 이상하게 슬픔을 동반하고 있었다. 술 마시고 늦잠 잔 후 회사 가는 것을 깜빡했다는 이야기에는 웃고 말았지만 ‘누적된 피로, 쌓이는 스트레스에 인간 내부의 어떤 안전장치가 작동된 모양이다’라는 설명에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어 ‘그때!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온다. 두려움을 동반한 채, 떨리는 손으로 동아줄을 잡았다’라고 쓰고 있다. 직장을 그만두고 어딘지도 모를 자신의 미래를 향해 나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이러한 삶의 모습을 자신이 선택한 음악이라는 안경을 쓰고 바라본다.


 이 책은 유년기에서 청소년기에 이르는 시기, 지구상에 존재했던 다양한 음악을 접하게 된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른아홉에 만난 삶의 노래, 음악을 통해 표현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베토벤, 비틀즈, 이미자, 루이 암스트롱, 윤이상, 산조, 정악 그리고 알제리의 민속음악에 이르기까지 그의 음악 만찬은 여지없이 상식을 깨며 음악에 대한 열정하나로 획을 긋고 있다. 아울러 저자가 세상을 보는 애정 어린 시선의 의미도 알 수 있다.


 고등학교 일학년 때 어두운 음악감상실 안을 유영하는 피아노 소리에 문득 ‘음악이란 소리가 까부는 것에 다름 아니다’라는 자각, 멈춰 있는 소리를 들으려고 산속에서 색소폰 한 음만 계속 불었다는 이야기, 신동의 접근을 불허하고 연륜이 쌓여야 제소리를 낼 수 있는 우리 소리 이야기, 세계 각국을 떠돌아다니며 동양의 민속음악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된 사연, 독일그룹 살타첼로에게 우리 민요를 편곡해 세계에 알리는 작업을 종용한 이야기 외에 기존 애국가가 재미없다며 통일되면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으로 바꾸자는 엉뚱한 주장도 있다. 이 책에는 60여 편의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 11월 19일. 낮에 마늘을 심었다. 마늘심기를 마치고 집으로 오르다가 처연한 황혼과 마주쳤다. 넋을 잃고 황혼의 춤을 바라본다. 황혼을 바라보는 일은 내게는 일과나 다름없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 중에서 황혼을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한다. 그것을 바라보는 것은 우주의 음악을 듣는 것이고 신에게 귀의하는 종교적인 행위이다. 매일매일 나타나는 황혼은 하나같이 다른 모습이다.


 해가 지니 기온이 내려간다. 집으로 들어와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앉아 불꽃의 춤을 본다. 변형된 노을의 새로운 유희가 내 앞에 펼쳐진다. 그렇다. 황혼은 불의 유희이다. 작은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전원교향곡>이 흐른다. 옛 기억들이 환영처럼 펼쳐진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눈에 이슬이 맺힌다. 늦은 가을이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행위지만 나이가 들수록 가을의 아픔이 심해진다. 숭호 녀석에게 전화를 했다. 녀석 왈, ‘형! 그게 시심(詩心)이라는 거야.’ 뜻밖의 대답이다.  어머니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 말씀은 더욱 뜻밖이다. ‘그랴……. 너도 이제 늙는구나.’ 」


         - 본문 중 

 소설가 이외수는 추천사에서 ‘김진묵에게는 지식인들이 갑옷처럼 걸치고 다니는 오만과 편견이 없다. 따라서 그는 동서고금의 모든 음악을 사랑한다. 그가 보는 관점에 의하면 하나의 존재는 하나의 음악이다. 하늘에 존재하는 것들도, 바다에 존재하는 것들도, 과거에 존재하는 것들도, 미래에 존재하는 것들도, 모두 아름다운 음표들로 흔들리거나 반짝거린다’라고 썼다.


 권말 부록으로 강원도 산골에 자신이 홀로 집짓는 이야기를 수록해 놓았다. 책을 보는 동안 시종 미소를 머금고 보았지만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니 깊은 여운이 남는다. 고요한 물줄기가 마지막에는 소용돌이를 틀고 있었다. (파이낸셜뉴스, 200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