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이

전후 세대

장코폴로 2009. 1. 26. 18:14

               ○전쟁이 끝난 뒤/60년대의 뒤안길

 

 내가 영화를 처음 접한 것은 60년대가 시작되고 부터 인 것 같다. 전쟁직후 꿈의 공장의 산물인 영화를 보기 위해 미취학 아동이 이모의 손을 잡고 신작로를 걸어 영화관에 들어갔던 것이다. 당시 별 볼거리가 없었고 약장수들의 국극 공연과 야외 가설 영화들이 상영되던 시기였다. 3일․8일, 장날엔 영화가 3,4회 상영되었고, 평일엔 저녁 1회만 필름이 돌아갔다.   내가 태어난 55년에 15편이던 극영화 생산은 60년 90편,61년 69편으로 제작편수가 증가했다. 1960년 박정희 정권은 산업화를 추진, 공장들을 만들고 구습을 털어 낼 새로운 정책들을 만들어 냈다. 그 중 영화산업도 개혁 대상으로 등재되고 새 영화법이 발표되었다.

 200평 이상의 스튜디오 설치 의무화, 60kw 이상의 조명, 촬영용 카메라 3대이상 구비,2인 이상의 전속 연기자, 감독 확보를 명시하자 영세한 영화사들은 대폭 축소되었다. 영화사는 일년에 15편 이상을 제작해야했다.

 할아버지로부터 신권 화폐에 대해 설명을 듣던 나는 지금은 면사무소가 되어버린 풍양극장을 신권으로 구경해보고 싶다는 일념에서 마음은 극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60년대 초, 경북 예천 면 단위 규모의 극장은 TV 혜택을 받지 못한 서민들이 최고로 치는 휴식 공간이었다. 당시 영화관람 초․중학생들에겐 무조건 정학이라는 처분이 내렸다.

 만 6세에 초등학생이 된 나는 가정교사 겸 집사인 이모의 손에 이끌려 영화도 보고 자장면도 얻어 먹었다.이 당시 내가 보았던 영화들은 영화전성기를 구가, 60년대 흥행 랭킹에 들던 영화들이었다. 당시 사극영화는 거의 본 듯하고, 문예물과 멜로드라마도 꽤 많이 보았다.

 겨울에는 장작불이나 석탄을 지핀 난로를 곁에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하였다.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이지만 비내리는 필름들엔 야유와 휘파람이 쏟아졌다. 시골 변두리 극장에는 대도시에서 소화해 낼대로 소화해낸 비내리는 영화들이 즐비하게 선보였다.   

 무수한 영화들 틈에서 현모양처형 연기자 최은희, 동양의 엘리자베쓰 김지미, 육체파 배우 김혜정, 영원한 시샘꾼 도금봉,듬직한 아버지형 김승호,지성과 온화형 연인 김진규,의리파 배우 신영균, 액션의 대부 장동휘,종횡무진 해결사 박노식,해결사 황해,믿음의 이대엽,고뇌 하는 지식인 윤일봉,젊은 연인 신성일등 수 많은 배우들이 스크린을 누비고 있었다.

 60년대의 극장에서는 음악회나 발레에서처럼 주인공의 영웅적인 행위에는 박수를 치던 시절이었다. 때론 감격해 울고, 때론 주인공과 자신을 한동안 동일시 하던 시절이었다. 인기 방송국 드라마는 곧 영화화 되었고, 일주일에 영화 한 편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모내기 때, 논에 물이 마르면 중학생들도 모두 동원되어 개천에 물길을 내곤했다. 방앗간집 아들 현국이와 나는 쌀이 담겨져야할 통을 엮여 물푸는 흉내를 내곤했다. 하천이 범람하면 논은 강으로 변하고 이미 포기해야할 벼는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버려져 있었다.

 반도, 통발, 투망등 각종 어구들이 동원되고, 가물치,붕어,메기,피라미,미꾸라지들은 줄줄이 잡혀 왔다.홍수가 지면 낙동강 중류의 강에선 집,가재도구는 물론 소 돼지들,수박등 모든 것이 떠내려 왔다.

 만화 그리기의 천재 강성구, 헐리우드 키드 이재용, 만화라면 30리라도 걸어가서 봐야 직성이 풀렸던 장석용은 어둠의 저편 벽지 풍양에서 영화 실컷 볼 꿈을 꾸며 고구마를 깍아 먹었다. 예천 극장 주 아들 권순갑도 영화음악에 푹 빠져 있었다.

 나보다 더 큰 가방을 가지고 다닌다고 놀림을 당하면서도 가방엔 만화들이 들어 있었고, 영화적 시상을 적은 시들은 아이들에게 분배 되었다. 69년 겨울, 촌 동네를 벗어나 한양오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떠나 오기 전 동산에 올라 고향의 산 내음과 들판을 실컥 봐두고 기차에 올랐다. 김도산의 『의리적 구토,1919』가 개봉된지 50년, 한국영화 50주년 기념이 되는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