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룡의 <정무문>에 나타난 무술철학
1. 이소룡에 대한 이해
리샤오룽, 이소룡 대형의 서거 38주년이 되는 해, 한국에서는 32세에 비명에 간 그를 두고 조용한 추모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오늘이 바로 그런 자리이다. 30년대에는 엽문 이라는 이소룡의 스승이 있었다. 무맥(武脈)은 단절된 것 같지만 아직도 도도히 이어져 오고 있다.
무인 곽원갑(郭元甲) 1868년 1월 18일 출생하여 1910년 9월 14일일 사망했다. 그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활동한 중국의 무술인 이다. 상해에 근대적 무술 학교인 정무체육회(精武體育會)를 세운 공동 창립자이자 가전 무술 미종예를 발전시킨 인물이다.
곽원갑은 중국에서 황비홍(黃飛鴻) 등과 함께 중국의 영웅으로 여겨지고 있다. 열강의 침탈이 극심하여 조국이 반식민지로 전락했을 때 공식적인 무대에서 열강의 격투가 들을 격파,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살리고 외세의 콧대를 꺾었기 때문이다.
곽원갑의 분위기를 느끼며 광동을 어제 다녀왔다. 체육학교와 무도학교가 있었고, 숱한 학생들이 춤을 연마하고 있었다. 그들의 작품들을 일주일 내내 지켜보았다. 작열하는 태양아래 줄을 서서 작품들을 보기위해 모여드는 숱한 무인들을 보면서 과거를 상상해보았다.
실제 그의 영웅적인 활약은 각종 전설과 신화를 탄생시켰다. 그의 매우 극적인 영웅담은 영화와 TV 시리즈 등으로 꾸준히 각색되어 나오고 있다. 금년에는 시대를 1차 세계대전까지 확장시킨 견자단 주연의 <정무문-100:1의 전설>이라는 블록버스터가 제작되었다.
곽원갑은 사망한지 한 세기가 지났으나 그의 활약상은 아직도 중국인들에게 애국자로 깊이 각인되어 있다. 대개 그를 주제로 한 영화나 드라마는 외국 무술 고수들을 꺾어 자존심을 짓밟자 특히 이에 격분한 일본인들이 그를 독살하는 스토리가 주를 이루고 있다.
대개 이소룡(李小龍)은 그의 제자 진진 역을 맡아 스승의 사인을 밝히고 스승을 독살한 일본인들에게 복수를 한다는 스토리의 영화 <정무문(精武門)>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으며 견자단(甄子丹)과 이연걸(李連杰) 등이 역시 진진 역을 맡아 <정무문>의 시리즈를 이어갔다.
이연걸은 2006년 영화 <무인 곽원갑>으로 곽원갑의 일대기를 그리기도 하였다. 이소룡, 견자단, 이연걸 등이 정무문 시리즈에서 맡았던 곽원갑의 제자 '진진'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이다. 한국 총본관 관장은 김종학이다.
무술로 동서 대등의 가교 역할을 해낸 개척자가 바로 이소룡이다. 그의 움직임의 미학과 무술해석의 남다른 심미안, 그리고 화려한 액션은 ‘동양 액션의 장인’으로 칭송 받으며 ‘시대의 아픔을 액션으로 마무리한 종결자’로 상징으로 영원히 우리들 가슴에 남아 있다.
짧은 생애동안 이소룡은 미지의 아시아 액션의 정체성을 미국의 중심부에 알린 독보적인 존재로, 구름나무처럼 자신의 존재를 바람결에 실어 비상했던 무술인 이다. 그의 단순한 액션에 그치지 않는 영화 속 무술철학에는 인간의 꿈과 희망과 비상의 의지를 담고 있다.
그는 영화 속에서 과장에 가까운 ‘떨림과 공분의 미학’을 보여준다. 완벽성과 치열한 예술정신이 잠재되어 있다. 이소룡의 무술에 대한 열정과 공감을 사는 무술의 본질에 접근하는 자세를 살펴볼 수 있는 텍스트로서 이소룡의 <정무문>은 그래서 더욱 존재가치가 빛난다.
이소룡(李小龍, 리샤오룽, Bruce Lee)은 본명은 이진번(李振藩, 리전판)이다. 아버지 이해천(李海泉)과 천주교도 독일계 어머니 그레이스(何愛瑜 하애유) 사이에서 1940년 11월 27일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중국 병원에서 출생하였다.
이소룡은 1973년 7월 20일 사망한 무술 배우이자,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무술가, 절권도의 창시자이다. 생후 3개월이 되던 해, 미국국적으로 부모와 홍콩으로 귀환하여 홍콩에서 성장했다.
그가 제작한 영화의 특성과 분위기는 이후 홍콩 뿐 아니라 세계의 무술계와 무술 영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소룡은 특히 그가 제작한 영화에서 나타나는 중국의 자존심과 민족주의로 인해 중국내에서 우상적 존재가 되었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중국이 여전히 일제 치하의 암울한 환경에 처해 있던 시대였다. 그 느낌은 고스란히 그에 전달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대한 기본적 인상은 아시아인의 자존과
민족적 자부심, 예에 대한 숭상과 같은 인의예지신을 실행한 무인이라는 것이다.
<당산대형>,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 그리고 유작 <사망유희>까지 단 다섯 편의 영화로 아직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있는 故 리샤오룽. 그가 홍콩과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영화는 기존 홍콩의 무술 영화를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당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온 중국인들은 온갖 괄시를 받았다. 이소룡 영화는 중국인들의 억눌린 상처를 치유했다. 그는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의 그림 같은 액션은 한국 영화에서도 투사되어 아직도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전영록, 권상우, 장 혁은 한국의 이소룡 분신이다. 영화 <돌아이>(1985,1986년 개봉) 시리즈에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석이는 한국의 ‘이소룡 키드’ 전영록이다. 당시 전영록은 체격, 현란한 액션, 이유 있는 유머로 이소룡의 해학을 보여주었다.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2004)도 이소룡을 전면에 내세웠다. 시대적 배경이 1970년대 후반으로 설정된 이 작품에서 권상우는 이소룡 영화를 보며 쌍절곤과 절권도를 익힌다. 소년이 이소룡을 흠모하며 무술 연마에 몰입했던 것은 이소룡을 경외하는 모습이다.
이소룡은 사망하기 전까지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친구이자 스승인 예원(엽문)으로부터 배운 영춘권을 토대로 태권도의 대부 이준구(필자가 2009년 겨울에 만남) 에게 전수받은 발차기에 칼리, 복싱, 유술 등을 섞어 절권도를 만들었다.
절권(截拳, stop-hitting)이란 상대방의 공격을 간단한 동작으로 사전에 차단한다는 뜻이며, 절권도는 다양한 무술들이 접목되어 있다. 공력권, 홍가권, 쿵푸를 바탕으로 태극권, 유도, 레슬링, 가라테, 무에 타이, 사바트 등 격투기와 복싱과 펜싱 등의 요소까지 절충된 실용 무술이다.
영화 속에서 자주 보여진 데로 절권도의 모습은 오른손을 살짝 올린 채 빠른 풋워크를 하며 스트레이트를 날리는 현대적 격투기가 정형이다. 빠른 스피드와 다양한 액션동작의 조화가 절권도의 매력이다.
2. 이소룡의 극영화 5편
◆ <당산대형(唐山大兄),The Big Boss>
<당산대형>은 이소룡이 1971년 주연으로 출연한 첫 번째 극장용 장편 영화다. 리는 극중 고향 당산에 홍수가 나자 일거리를 찾아 차이나타운으로 이동, 얼음공장에 취직해 새로운 삶에 충실하게 사는 정조안 역으로 활약했다.
특히 그는 공장 사장이 마약을 몰래 얼음에 넣어 공급하는 것을 목격한 동료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홀로 응징을 가하는 입신 경지의 무술솜씨를 뽐냈고, 이 작품은 홍콩에서 유례없는 흥행기록을 세우며 그를 스타반열에 올려놓았다.
◆ <정무문(精武門), Fist of Fury>
<정무문>은 1972년 발표된 이소룡의 대표작으로 1908년 상하이 중국 쿵푸 무술파의 창시자인 훠위안자(곽원갑)의 죽음에 얽힌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리는 극중 타이치(태극권)의 사부인 허영가의 억울한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첸 역할을 맡았다.
특히 리는 극에서 현란한 발차기 솜씨를 연출한 것은 물론, 무기로서 쌍절곤을 처음 들고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극중 일본인 가라데 명인을 차례대로 물리치는 모습으로 중국 무술의 월등함을 과시했다. 이 작품은 훗날 홍콩 무술영화에서 제목 등이 숱하게 리메이크됐다.
◆ <맹룡과강(猛龍過江),The Way of the Dragon>
<맹룡과강>은 1972년 이소룡이 <당산대형> <정무문>의 나유(로 웨이) 감독과 결별한 뒤 첫 연출한 작품이다. 그는 극중 폭력조직에게 식당영업을 방해 당하고 있는 진청화를 돕기 위해 홍콩에서 온 쿵푸 청년 당룡 역을 맡았다.
이소룡의 작품 중 유일하게 코미디가 강조된 작품으로, 이탈리아 로마 로케이션으로 진행했다. 1964년 LA, 롱비치 시범 때, 가라데 챔피언 척 노리스(당시 무명)를 만난 인연으로 이 작품에서 명장면인 로마, 콜로세움의 최후 결투 씬으로 그를 출연시키게 된다.
이후 척 노리스는 할리우드의 대표 무술액션 배우로 이름을 떨친다. 그의 작품 중 '델타 포스'는 국내에서도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 <용쟁호투(龍爭虎鬪), Enter the Dragon>
<용쟁호투>는 1973년 홍콩과 미국에서 합작으로 만든 첩보 액션 스릴러 영화다. 이는 본격적으로 세계시장을 겨냥해 만든 작품으로, 리샤오룽은 극중 헤로인을 밀조하고 인신매매를 벌이는 악당을 체포하기 위해 나선 소림사 출신의 무술인 리 역을 맡았다.
이소룡은 영화 제작이 다 끝나고 개봉을 앞둔 시점에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했고, 영화배우 청룽(성룡) 역시 이 작품에서 엑스트라로 출연했다. 당시 이소룡은 자신의 잘못으로 성룡이 크게 다치자 그를 여러 영화에 출연시켜주며 배우로서 길을 터줬다.
촬영 종료되고 몇 달 후, 개봉 3주 전에 이소룡은 갑작스레 사망한다. 제작비 85만 불로<용쟁호투>는 그해 최고 흥행 영화가 되었고, 지금까지 2억불의 수익을 창출했다. 전설로 남은 이소룡과 그의 작품들은 많은 모티브를 제공해서 게임과 영화에 차용되고 있다.
◆ <사망유희(死亡遊戱),Game of Death)>
이소룡 각본, 감독의 <사망유희>는 이소룡이 40분 분량만 촬영하다 도중하차하였다. 1978년에 만들어진 <사망유희>는 완성되기 전, 주인공을 맡은 이소룡이 요절하면서 비운의 영화로 기억되고 있는 작품이다. 이소룡은 극중 연예인들에게 거액의 돈을 상습적으로 갈취하는 범죄조직에 맞서는 인기 액션배우이자 무술 고수인 빌리 역을 맡았다.
<용쟁호투>의 감독 로버트 클라우스는 1978년 새로운 줄거리와 캐스팅을 가지고 대역과 이소룡의 영화 장면을 15분만 사용하여 완성시킨다. 리샤오룽을 찍었던 분량이 워낙 적었던 탓에, 한국배우 김태정이 '당룡'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며 대역 연기를 펼쳤다. '사망유희'에서 이소룡 입었던 노란색 운동복과 쌍절곤은 그의 독특한 상징으로 남아있다.
22년 후 나머지 촬영 분이 발견되어 다큐멘터리 <Bruce Lee: A Warrior's Journey>에서 공개되었다.
3. 이소룡의 성장과 사망
이소룡의 아버지는 유명한 광둥 경극 배우였다. 이소룡은 아버지를 통해 아주 어린 나이부터 영화를 접하게 되었고, 몇 편의 흑백 영화에 아역으로 출연 하였다.
독일계 김나지움 성격의 라 살레 칼리지(중학과정)에 12살 때 입학하여 성 하비에르 칼리지(고교과정)로 옮겼다. 1959년(18세,고3), 이소룡은 싸움에 휘말려 상대방을 중상을 입혀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가 18세가 되었을 때 스무 편의 영화에 출연한 상태였다.
부모들은 그를 미국으로 보내고, 1959년 그는 시애틀에서 에디슨 기술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이 후 워싱턴 대학교에 진학하여 철학, 연극, 심리학 등을 공부한다. 결혼할 때 까지 무술만을 연마하며 지낸다.
대학에서 린다 에머리를 만나 1964년 24세에 결혼한다. 브랜든 리(1965년-1993년)와 섀넌 리(1969년-) 두 자녀를 두었다. 배우 브랜든은 1993년 영화 <크로우> 촬영 중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 섀넌 리도 연기자가 되었으며 1990년대에 몇몇 저예산 영화에 출연했다.
1964년 롱비치 가라데 토너먼트에서 이소룡의 무술 시범은 미국 무술가 윌리엄 도지어 의 눈에 띄어 TV 시리즈 <그린 호넷>에서 카토 (Kato)의 역을 맡는다. 이 시리즈는 1966년부터 1967년까지 한 시즌 만에 종료되었다.
1969년 이소룡은 처음으로 미국 영화 <말로우>에 출연하였다. 그는 폭력배로 출연하여 사설탐정인 필립 말로우를 위협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우연히 말로우를 걷어차려다가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1971년 이소룡은 TV물 <롱스트리트> 4부작 무술 선생으로 출연한다. 이소룡은 <The Warrior>라는 시리즈를 제안했고, 워너 브라더스는 <쿵푸>로 이름을 바꾸었다. 흥행목적으로 서부 배경 소림사 무술가 역은 비 무술가인 데이비드 캐러딘에게 맡겨진다.
미국에서 조연 대접을 받자 이소룡은 홍콩으로 귀환한다. 추문회 골든 하베스트 대표로부터 영화 출연을 의뢰받고, 이소룡은 <당산대형>(唐山大兄)에서 첫 주역을 맡는다. 이 영화는 전 아시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순식간에 그는 스타가 된다.
이후 그는 다시 두 개의 성공작 <정무문>과 <맹룡과강>을 찍는다. <맹룡과강>에서 그는 각본, 감독, 주연, 그리고 무술 안무까지 총괄한다. 1973년 이소룡은 골든 하베스트사와 워너 브러더스사의 최초의 공동 제작 작품인 <용쟁호투>의 주연을 맡게 된다. 이 영화로 인해 이소룡은 미국과 유럽에서도 큰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제임스 본드 스타 조지 라젠비와의 저녁 약속을 앞둔, 1973년 7월 20일 홍콩, 이소룡은 <사망유희>제작에 대해 골든 하베스트사 제작자인 레이먼드 초우와 2시에 만나 4시까지 같이 있다가 대만 여배우였던 베티 팅 페이의 아파트 가서, 셋이서 대본을 검토했다.
잠시 후, 이소룡은 두통을 호소했고, 팅 페이는 아스피린과 근이완제가 포함되어 있는 이쿠아제식 이라는 진통제를 주었다. 7시 30분 경, 그는 깊은 잠에 빠졌다. 1970년 5월 10일
<용쟁호투>의 더빙 중, 전신 발작과 뇌부종으로 쓰러져 마니톨 투여로 살아난 적이 있다.
32세의 이소룡은 깨어나지 않았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숨져 있었다. 외상은 전혀 없었지만, 그의 뇌는 1400에서 1575그램으로 게 부어올라 있었다. 이소룡의 공식 사인은 '과실 사(death by misadventure)'로 발표되었다. 그의 사인은 아직도 논란 중이다.
스티브 맥퀸, 척 노리스 등이 운구를 맡은 이소룡은 시애틀로 레이크 뷰 공동묘지 276번에 안장되었다.
4. 이소룡 주연의 <정무문>
이소룡의 활약으로 무술을 접목한 현대판 중국 액션이 발전하다가 그의 사망으로 주춤해 졌다. 성룡은 무술의 계보를 이어 여전히 다양한 액션을 선보이고 있다. 중국 액션의 부활을 보인 <황비홍>,<방세옥>, <동방불패> 등의 무협영화들은 무술의 실제와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관객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받고 있다.
중국(홍콩을 포함)영화들은 최근 들어 본격적으로 역사상 유명한 전쟁의 다양한 전투 장면들을 영화에 재현함으로써 복식과 무기, 시대적 사상의 고증은 물론이고 진법과 무술도 실제와 유사하게 보여주고 있다. 중국 무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총체적 무술 신들은 다양한 테크놀로지의 도움으로 그 무한의 한계의 진행 어디까지 진행될지 예측이 불가하다.
중국영화의 기본 종사는 곽원갑, 소걸아, 엽문 이다. 무술동작들은 실제적 기예를 가미한 것들이다. 이소룡은 실제 다양한 무술을 연마한 무술인 이다. 이소룡 액션의 출발은 맨 손과 맨 몸이다. 다양한 벽화에서 무술의 기본동작들을 볼 수 있듯 그의 작품을 통해 무술의 변천사를 일어낼 수 있다. 지금은 마상무예와 다양한 무기를 접목한 액션들이 선보이고 있다.
골든 하베스트 제작의 <정무문>의 프롤로그는 분노와 슬픔에 가득 찬 진진역의 이소룡이 사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조문을 오는데서 부터 시작된다.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흰 국화가 늘어선 조화를 뚫고 진진이 출신과 우직함을 나타내는 상징의 하나로 촌티가 흐르는 흰 양복을 입고 들어선다. 조문을 지키고 있는 요리의 불안한 표정이 사부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1972년, 세기의 액션 아이콘 이소룡의 <정무문>은 ‘정무문’의 창시자인 허영가의 죽음에 복수를 결심하는 ‘진진’의 활약상을 그려낸다. “아뵤~” 특유의 기합소리, 쌍절곤 액션, 현란한 발차기와 일본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홍구도장에서의 100대 1의 결투는 아시아를 넘어 할리우드 액션 키드들을 열광시키며 전 세계적으로 ‘브루스 리(이소룡)’ 열풍을 몰고 왔다.
장지에는 ‘정무문’파 제자들의 슬픔을 중첩시키는 비가 내리고 있다. 입관의식이 진행되고 있고, 슬픔에 겨워 이소룡은 관 속의 사부를 보려고, 관을 열려는 행동을 보이다가 수제자1제(1弟)의 삽을 맡고 쓰러진다. 타이틀 떠오르며 영화는 도입부가 끝난다.
영안실에서 장발의 풀어헤친 옷으로 식음을 전폐하는 진진(이소룡)모습에서 스승에 대한 ‘충(忠)’을 읽을 수 있다. 무술철학의 기본은 충심, 즉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바탕이 된다. 이소룡은 이 영화에서 5사제의 역할을 맡고 있다. 분노의 안면연기는 압권이다.
영화의 수사학상 과장이 있기는 하지만 영화에서 정무문파의 기본정신은 싸움이 아닌 무술을 통해 사회에 나에 봉사하는 조국사랑이 기본이 된다. 즉 천하위공(天下爲公)과 극기정신이다. 다음 세대를 위한 보다 나은 삶을 제공하는 바탕이 되고자 함이다.
영화의 묘미는 잔잔한 갈등에서 나온다. 이소룡 영화에서 갈등은 이분법적으로 명확히 구분된다. 확실한 상대(적)를 설정하고, 제압함으로써 많은 이소룡 팬을 만들어 내고 있다.정무문에서의 적은 제국주의 상징인 일본이다. 아시아인 모두가 공감하는 대목이다.
연습에 열중인 홍구 무도장으로 통역을 앞세우고 일본인들은 동아병부(東亞病夫)란 액자를 들고 찾아온다. 진진(이소룡)의 주먹을 떨고 있지만 모두들 싸움을 만류한다.
며칠 후 진진은 액자를 들고 일본 유도 도장으로 찾아가 그의 특유의 제스처로 분노의 주먹으로 스즈키 관장을 비롯한 일본인들을 차례로 쓰러트린다. 이후 모든 영화들에서 1대 다수의 대련씬이 유행이 된다.
특유의 목소리(야보)와 쌍절곤이 선보이고, 눈이 클로즈업 된다. 쌍절곤은 머리, 다리, 등을 가격한다. 땀도 흘리지 않고 대련에 성공하는 진진의 착지는 일품이다. 캄보디아의 무술 보카도의 동물 흉내와 유사한 소리와 자세의 일면이 보인다.
품위를 지키면서 우리는 바보가 아니다. 액자를 깸으로써 아시아의 맹주인 중국의 자존과 각오를 다진다. 액자 속의 병부를 일본인들에게 먹임으로써 대일본제국의 자존심을 산산 조각낸다. 이래서 일본인들은 정무문을 산산조각 낼 전의를 불태운다.
일본 조차지를 보면서 다수의 중국인들은 서러움을 느끼고, 개와 중국인들은 치외법권인 이곳을 들어갈 수 없다는 서러움을 느낀다. 이소룡의 표정과 심리연기는 70년대를 고려하면 상당히 탁월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모두가 운동에 매진중인 ‘정무문’에 일본인들이 난입하고, 행패를 부린다. 엉성한 음향이 사실감을 배가시킵니다. ‘정무문’ 폐쇄와 같은 권력 개입처럼 무술에 대한 무술의 타협은 가장 위험한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사제라고 부르는 패밀리 정신은 배반과 변절이 판치는 현실에서 되새겨볼 좋은 교훈적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무술인 모두를 궁지로 몰수 있는 행동들에 대해서 우리는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머무는 게 용감한 일인가? 사부님이 평소에 뭐라고 가르치셨지? 대사형으로서 내일 떠날 것을 명한다’라는 말은 스승의 정신이 곧 나를 지키는 길임을 알리고 있다.
늘 무인의 길은 험한 길임을 나타내는 상징들은 많다. 유혹에 이은 실수는 늘 곁에 있고, 자신을 지키는 길은 더욱 힘들다. 사랑을 하기는 더욱 힘들다. 사부의 초상화를 두고 ‘이번에는 결혼하려고 했는데...’ 말은 모든 것을 함축하는 말이다.
늦은 밤,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비밀, 주방장으로 위장한 일본인, 사부가 독이 든 과자를 먹고 독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진진은 주방장을 격투 끝에 살해한다. 그의 시신은 거리에 매달린 채 발견된다. 비밀은 있을 수 없고. 무인은 의를 숭상한다는 정신이 숨어있다.
상해를 떠나라는 대사형의 말을 거역하고 곽사부의 묘소 곁에 숨은 진진은 개고기(야생의 동물)를 뜯는 모습을 보인다. 사제와의 달콤한 로맨스는 이렇게 험한 과정을 겪는다. 낭만적 대사를 섞은 이글거리는 불빛 앞에서의 키쓰 신, 떠나라는 사제의 말에, 계획을 다 끝내고 떠난다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진진은 그만큼 복수심(조국애)도 깊다.
이 영화에서의 꿈 이야기처럼 인생에서 꿈 이야기는 꿈일 수 있다. 당시의 다다미방 술집에서의 스트립쇼는 파격적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러시아 마피아 두목의 과력도 볼거리였다. 또한 변장미도 볼거리였다. 복수(조국애)는 설정된 시대상항으로서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전봇대에서의 이소룡 신도 볼거리였다. 대일본제국의 홍구 무도장에서의 전화공 변장씬은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요소였고, 강판에 못 박기, 강철휘기, 쇠파이프 꺾기 등도 볼거리 이었다. 홍구 도장으로 온 진진과 정무문으로 찾아간 일본 무도관 집단의 무차별적인 복수전은 영화의 절정에 이르는 하이라이트이다. 맨손 대 칼의 격투, 스즈키 관장의 죽음, 러시아 마피아의 죽음은 ‘손의 판타지 기술’ 이다. 늘 동반되는 동물 소리 또한 신비감을 불러일으킨다. 요시다의 칼에 맛서는 진진, 극도의 분노에 이은 쌍절곤 묘기, 모두가 정리된 듯하지만, 정무문의 참상이 따른다. 진진을 찾다가 도장에 도착한 대사형은 “어떻게 사부님을 뵙지, 참은 게 잘못이야! 오사제의 말이 생각났어!”
정무문에 도착한 진진은 경찰에 의해 정무문 폐쇄 얼음장에 얼굴을 드러내고 정무문 존치 보장을 받지만 총 앞에 당해낼 사람은 없다. 진진이 튀어 오르는 스톱 모션에서 영화는 엔딩 크레디트가 떠오른다. 한 영웅이 정무문을 구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결국 <정무문>의 무술 철학의 핵심은 의(義)가 기본이 되는 올곧은 정신이다. 이 작품은 홍콩 액션의 주춧돌을 놓은 기념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미 공감하는 의분의 모든 것들이 부족한 영화 장비들로 요즘의 작품들과 비교가 되지만 1970년대를 생각하면 엄청난 작품이다. 사제들로부터 도둑이라는 누명을 쓰고, 공동묘지에서의 격투기를 하면서도 비밀을 지키며 곤경에 처한 사제를 돕고자하는 마음을 살펴보면 무술철학의 깊이는 감히 가늠하기 힘들다.
5. 견자단의 <정무문,精武風雲:陳進, Legend of the Fist: The Return of Chen Zhen>
1972년 <정무문>의 이소룡, 1994년 <정무문>의 이연걸, 2010년 <정무문>의 견자단은 모두 전설을 재현한 영웅들이다. 블록버스터로 만들어진 견자단의 이번 작품은 전 세계를 상대로 이소룡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67회 베니스국제영화제(2010) 초청비경쟁부문 초청작, 유위강 감독의 103분짜리 <정무문 : 100대 1의 전설 (2010)>은 신화적 무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정무문>의 진화를 보여주는 이 작품의 감동은 다매체 시대인 지금과 이소룡의 <정무문>과는 분명 위상의 차이가 있다.
1910년경 상해. 학사권의 창시자인 ‘곽원갑’의 '정무문'과 일본 공수도의 본거지인 '홍구도장'은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투신청을 받은 ‘곽원갑’이 독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스승의 복수를 결심한 정무문의 유일한 후계자인 ‘진진’은 단신으로 홍구도장을 찾아가 대결을 벌이게 된다. 하지만 결국 ‘진진’은 일본군의 총에 맞아 살해된다.
1917년, ‘정무문’의 후계자 ‘진진’이 15만의 중국 노동참전군과 함께 제1차 세계대전의 프랑스 전선에 파병되어 맨몸으로 독일군에 맞서 활약하지만, 그들은 모두 전사자로 기록된다. 열강들의 이권 싸움으로 혼돈 상태였던 상해를 배경으로 ‘진진’의 활약이 시작된다.
전선의 액션 신에서 위험에 처한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스릴 넘치는 액션이 펼쳐진다. 사방에서 포탄이 터지고 일촉즉발의 총격이 벌어지는 가운데 전장을 빠르고 유연한 몸놀림으로 가로지르며, 신기에 가까운 줄타기 등의 몸놀림과 현란한 발차기로 동료들을 구해낸다.
7년 후, 1925년 상해. ‘기천원’이라 불리는 한 남자가 외교관과 군인, 스파이와 미녀들이 모여드는 상해 최고의 사교클럽 ‘카사블랑카’에 투자자로 신분을 위장한 '진진'이 다시 등장해 모두의 이목을 끈다. 중국의 거부와 사업가들, 영국군인들, 일본의 사기꾼들, 스파이들. 일본군의 세력에 날로 위협받는 나날이었지만 그 곳만은 예외였다.
서양 문물의 영향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화려하고 이국적인 도시, 상해 유력인사들에 대한 연이은 암살테러가 벌어지고 살생부까지 공개되자, 일본군에 대한 증오와 공포심이 날로 커진다. ‘천산흑협’은 중국 독립 인사들을 살해하는 일본 암살자들을 처단한다. 일본군에 맞서 상해 밤거리를 누비며 활약하는 절대 고수 천산흑협은 바로 부활한 진진이다.
견자단의 홍구 도장에서의 100대 1 맞장 액션 신은 “아뵤~”하는 기합소리와 함께 옷을 벗어 던진 채 일본군의 본거지 홍구 도장에서 100명의 고수와 차례로 결투를 벌이는 전설의 액션 신은 560도 공중 돌려차기와 분당 일백 번 가격되는 정권 공격, CG의 도움 없이 실제로 재현되는 절대고수 '진진'의 리얼 맨몸 액션은 일품이다.
일본인들이 유도나 가라데 같은 무술을 연마하던 도장, 홍구도장은 일본인 제국주의의 우상이 되었다.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일본군 대좌와의 악연과 숙명적으로 벌이는 마지막 대결은 기존의 액션 영화에서 볼 수 없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을 선사한다.
모든 신의 펀치와 킥이 독창적이다. 독창적인 비주얼로 비오는 밤, 상해 거리에서의 액션 장면에서는 와이어 없이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리기도 한다.
TV物 <정무문>의 ‘진진’ 역을 맡은 견자단은 흰 도복에 쌍절곤을 휘두르는 모습, 영춘권 특유의 빠른 주먹, 권투 하듯 가볍게 움직이는 동작들을 선보이며 일본군의 본거지 홍구도장에서 그 유명한 100대 1의 결투 재현하는 장면은 이소룡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6. 클로징
배우이자 무술인인 이소룡은 요절했지만 무술인 으로서 그는 영화와 우리의 사랑 속에서 늘 살아있다. 피상적 얘기로 그의 존재감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영웅 부재 시대의 영웅의 존재는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심층적 철학적 접근으로 그에게 좀 더 가까이 접근 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느낌으로만 그에게 빠져 있다가 보니까 그러하질 못했다. 추후에 좀 더 이 문제에 접근하는 팬들이 있었으면 한다. 오늘은 단지 그를 다 같이 추모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또한 이글의 바탕이 된 자료들은 이미 우리가 접한 내용들이다. 같이 모인 모두가 그와 같이 하나가 되고자 함이다.
장석용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역임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회장 역임
충주 국제 무술대회 홍보대사 역임
백제 검술협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