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물·인물화의 대가 구자승 화백 드로잉 하나에 딱 3분…활화산 같은 '젊은 힘'으로 단숨에 끝내야 성공 여성의 뒷모습은 美의 극치…아름다운 누드는 한 편의 詩
아무리 봐도 일흔 살로 보이지는 않는다. 젊은 여인의 누드화를 많이 그려서일까. 남다른 건강 관리법이 있는 걸까.
"하하.특별한 거 없어요. 그냥 즐겁게 살자는 생각….흰머리나 잔주름 좀 덜한 정도죠.먹는 것도 안 가려요. 젊은 여인 누드라… 글쎄요. 그것보다는 시골 생활 덕을 좀 봤다고 해야겠죠.우리 동네엔 반딧불이도 있어요. 아주 외진 곳입니다. '촌놈'이 되니까 정말 편하고 즐거워요. " 정물화의 대가,인물 드로잉의 천재,누드화의 1인자로 불리는 구자승 화백은 얼마 전 충주에 터를 잡은 뒤 몇 년은 더 젊어진 것 같다고 했다.
마음만 그런 게 아니다. 작품도 더 젊어졌다. 그가 드로잉 한 점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3분.필선을 긋다가 잠시라도 멈칫거리면 안 된다. 호흡이 어그러져도 선이 죽는다. 단숨에 끝내야 한다. 그래서 '젊은 힘'이 필요한 것일까.
"꼭 육체적인 힘이 필요한 것만은 아니고,중요한 건 여백의 힘입니다. 제 그림에 여백이 많은데 동양적 사유의 공간이죠.뭔가를 생각하게 하는 힘.조선백자가 그렇잖아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왜 거기에 빠지는가. 사유의 공간 개념을 그림에 갖다놓고 여백을 많이 남길수록 여운이 길고,그 속에서 진짜 힘이 나오지요. 정물화에도 장식을 하지 않고 잔이면 잔,병이면 병,이렇게 하나에 초점을 맞춥니다. 제 정신세계도 그런 것 같아요. 화폭을 보면 수평과 수직이 많은데 이게 곧 정적인 개념이죠." 어떤 평론가가 '구자승의 그림을 보면 처절한 적막감이 느껴진다'고 말한 이유를 알 것 같다. 프랑스 평론가 로제 부이에는 '침묵의 후광'과 '내적인 음악''시적 존재의 현현'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인체 그림도 마찬가지다. 유난히 여백이 많다. 게다가 앞모습보다는 뒷모습이나 옆모습이 더 많다.
"여인의 몸처럼 아름다운 게 있을까요? 아름다움의 극치입니다. 특히 뒷모습이 그렇죠.제가 자두를 자주 그리는데 여인의 뒷모습과 닮았어요. 어떻게 이런 곡선을 만들어냈을까,드로잉하면서 곡선의 묘미에 빠져들죠.너무 심취해서 몸을 버릴 정도예요. 외국 작가들의 화집을 보면 처음에 드로잉이 나오죠? 그게 작가의 얼굴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작가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저는 지금도 드로잉을 많이 하는데 아주 좋아합니다. 누드는 드로잉의 최고 경지죠.정물이든 누드든 여백의 힘이 생명력을 좌우합니다. 시와 같죠." 그는 계란을 자주 그린다고 했다. 계란 표피가 여자 피부,처녀의 살결 같다는 것.아름다움의 근원이 곧 존재의 원천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그래서 '그림을 조금씩 알수록 단순해진다'는 것일까. 그의 화법도 점점 더 리얼리즘의 근본으로 돌아가고 있다.
"무슨 단판이라도 지으려는 듯이 달려들게 됩니다. 어디까지 가나 해보자 하고,남들이 뭐라든 말든 사실성에 몰입하죠.요즘 젊은 작가들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거나 실험적인 것으로 아이디어 싸움에 치중하는 것 같은데 저는 제가 하던 것 그대로 결판을 보자고 하지요. " 그의 '그림병'은 타고난 것일지도 모른다. 정3품 벼슬을 지낸 증조부(구연소)가 난을 잘 쳤다. 동아일보 기자였던 아버지(구인회)도 그림을 그렸다. 핏줄은 못 속이는가보다.
"7남매 중 장남인 제가 미술을 하겠다고 했을 때 집안에서는 공대로 진학하라고 난리였어요. 아버지가 그림 그리겠다고 했을 때 할아버지가 말려서 그 길을 못 갔는데 저에게도 똑같이 그러는 거예요. 고등학교 실기대회 때 아버지 화구박스를 몰래 가져가 상을 받아왔더니 아버지가 화를 내며 그 박스를 아궁이에 처넣어버렸어요. 그 박스에는 '소화 몇 년에 아버지가 주신 시계를 팔아 박스를 사다'라는 글귀까지 있었는데.결국 부모님 몰래 홍익대에 원서 넣고 입학해버렸죠.대학은 독학으로 마쳤습니다. 선물용 카드를 50장씩 밤새 그려 이대입구 가게들에 갖다 팔곤 했죠." 그는 '돈이 없어서' 대학 1학년 때 군에 갔다가 복학한 뒤에는 학교 화실에 파묻혀 살았다. 그러다 날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여학생과 눈이 맞아 7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그 여학생이 지금의 부인인 장지원 화백이다. 졸업 후 상명대 강사로 일하는 동안 미술대전에 연거푸 미끄러진 그는 '미리 심사위원들에게 찾아오지도 않느냐'는 말에 충격을 받고 캐나다로 유학을 떠났다. 그때가 마흔 한 살이었다.
"아내와 같이 파리로 가려고 했는데 백건우 부부 납치 사건이 터져서 당국이 혼자 가거나 아예 못 가게 하더군요. 마침 그때 토론토대 총장이 한국에 왔는데 그 인연으로 온타리오미대로 가게 됐죠.유학 가서 처음에는 고생했지만 운이 좋았습니다. 4년 내내 공부하는 시간 외에는 그림만 그릴 정도로 작품이 잘 팔렸어요. 200점 정도 팔았나봐요. 전시회도 했는데 그때가 가장 행복했지요. " 수많은 누드화를 그렸으니 기억에 남는 모델도 있을 법하다. "대학 4학년 때 졸업전시회를 해야 하는데 모델 구할 돈이 없었어요. 학교 모델이 공짜로 서줬는데 사흘 밤을 샜습니다. 그림을 그릴 땐 아무런 감정이 없었는데 워낙 피곤했는지 모델의 몸이 스르륵 풀리는 거예요. 졸음이 온 거죠.그땐 느낌이 좀 다르더군요. 그래도 별 일은 없었지만 그 모델이 훗날 학교 앞에 카페를 차렸을 때 친구들 몽땅 데리고 가서 많이 마셔주는 걸로 보답했지요. 모델료 없이 도와준 게 너무 고마워서." 또 다른 모델은 무용하는 여자였다. 이미지가 정말 좋아서 그림 그리는 순간에도 유난히 공을 들였다고 한다. "제 작품 '아이포의 갈망'에 나오는 여자예요. 영국 유학 시절 클래스메이트였는데 비너스 같았죠.너무 아름다워서 그림 하나 그리겠다고 했더니 흔쾌히 모델을 서줬습니다. 처음엔 얼굴만 그릴 생각이었는데 괜찮다며 윗옷을 훌렁 벗는 바람에 누드까지 그렸죠." 만난 사람=고두현 문화부장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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