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재 소(성균관대 명예교수)
고려 광종이 중국인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도를 실시한 이래 과거시험은 이씨조선이 망할 때까지 인재 선발 방법으로 부동의 지위를 누려왔다. 그러나 이씨조선 중기 이후 과거제도는 많은 폐단을 야기시켰다. 이 중에서 근본적인 문제는 과거시험의 답안 작성 방법에 있었다. 과거시험 답안은 매우 까다롭고 엄격한 형식적 틀에 맞추어 작성하도록 제도화되어 있었다. 이 과거시험용 글을 공령문(功令文)이라고 하는데 응시자들은 이것을 익히기 위해 수십 년을 허비해야만 했다. 공령문은 실용적인 글도 아니고 학문에 도움이 되는 글도 아니다. 오로지 과거시험을 위한 글일 뿐이다. 막상 합격하고 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글이지만, 과거를 통하지 않고는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에 오로지 공령문에만 매달리게 된 것이다.
시험합격 외에는 쓸모없는 글과 공부
이 폐단을 가장 신랄하게 지적한 분이 다산 정약용이다. 그는 『오학론(五學論)』에서 말하기를 “지금 천하의 총명하고 슬기 있는 자를 모아놓고 한결같이 모두 과거라는 절구에다 던져 넣어 찧고 두드려 대서, 오직 깨어지고 문드러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라 했다. 그는 또 과거의 해독이 홍수나 맹수보다 더하다고 하면서, 만일 과거시험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을 학문에 쏟는다면 그 사람은 능히 주자(朱子)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더 나아가 일본에는 과거제도가 없기 때문에 문학이 동쪽 오랑캐 중에서 뛰어나고 무력도 중국과 대항할만하며 나라의 규모와 기강이 잘 정돈되어 조리가 있다고 말했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수학능력시험을 과거시험에 비유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해마다 50만 명이 넘는 학생들을 “수능이라는 절구에다 던져 넣어 찧고 두드려 대는데”, 과연 수능을 위한 공부가 공부의 정도인지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오래 전에 현행 수능시험의 전신인 학력고사의 국어과 출제위원으로 몇 번 차출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지문의 분량이 너무 많은 것에 놀랐다. 주어진 시간에 지문을 읽기도 벅찬데 언제 문제를 풀겠느냐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교과서에 있는 지문은 굳이 읽지 않아도 되겠지만 교과서 이외의 지문도 상당히 포함된 터라 이런 우려를 이야기 했더니 동료 출제위원들의 말은 ‘학생들이 지문을 읽지 않고 바로 문제를 푼다’는 것이었다. 4지선다형 객관식 문항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에 충분히 문제를 풀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쯤 되면 학생들은 ‘문제 풀고 점수 따는 기계’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수능에 출제된 시(詩)에 관한 문제를 그 시를 쓴 시인 자신이 한 문제도 맞추지 못했다는 일화가 현행 수능시험의 현주소를 말해주고 있다.
인재들을 한결같이 절구통에 넣어 찧어 대니
이런 시험을 치루기 위해서 그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고 막대한 사교육비까지 지출해야만 하는가? 물론 불합리한 과거시험을 통해서도 훌륭한 인재는 선발되기 마련이며, 수능시험을 통해서도 우수한 학생은 좋은 성적을 받게 마련이다. 그러나 다산의 말처럼 그런 시험에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깝다는 것이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의 교육수준을 높이 평가했다지만, 한국의 학생들이 ‘수능형 인간’으로 전락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아마 생각을 달리 했을 것이다.
다산을 비롯한 양심적인 학자들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과거제도는 없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다산도 제자들에게 과거에 응시하라고 권유했다. 그 길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능도 마찬가지이다. 국가적인 차원의 개선책이 마련되지 않는 한, 이 땅의 젊은 학생들은 비생산적인 수능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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