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원로 한글학자 정재도 선생

장코폴로 2009. 9. 13. 08:47

‘잠깐’을 ‘잠시간’의 준말로 둔갑시켜
‘조선에 무슨 말이 있었느냐’며 억지부려
한겨레 최인호 기자 권오성 기자 김진수 기자
» 한국땅이름학회장을 지내고, 지금은 한말글연구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글학자 정재도 선생이 한글사전을 펼쳐 보고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 원로 한글학자 정재도 선생

우리 국어사전에 실린 낱말의 70%쯤이 한자말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그 한자말들 가운데 쓰이지 않는 말이 많다. 국어사전이 그렇게 된 데는 일제의 농간을 빠뜨릴 수 없다. 일제가 그랬다더라도, 하마 쓰이지도 않는 말들을 정리할 때가 넘었는데도 여전히 혹 한자말 가운데 빠뜨린 게 없나 찾아 헤매고, 있는 한자말을 바꿔 우리말이라 하고, 없는 한자말을 만들기도 한다.

최근 정부(문화부)에서는 <새한글지식사전>(가칭) 편찬 계획을 밝혔다. 지난 2005년부터는 남북 전문가들이 모여 7년 계획으로 <겨레말 큰사전> 편찬 작업을 하고 있다. 이에 최초의 국어대사전인 <큰사전>(1957년 6권 완간·한글학회) 편찬에 참여하고, 언론계를 거쳐 다시 <우리말 큰사전>(1992년) 편찬에 참여한 원로 한글학자 정재도(85) 선생을 만나 근황과 함께 국어사전 편찬 지침이 될 만한 말씀을 들어봤다. 선생은 1925년에 나서 광주사범을 졸업하고 교원으로 일하다 49년 <호남신문> 교정부를 거쳐, 56년 <큰사전> 편찬에 참여했다. 그 뒤 소년조선 주간, 국어심의회 심의위원, 한국땅이름학회장을 거쳐 현재 한말글연구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말글’이란 말을 자주 쓰시는 줄 압니다.

“예, 한말은 우리 겨레가 쓰는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한나라(큰나라), 우리 겨레는 한겨레(같은 겨레), 우리글은 한글(바른글)입니다. 한말에는 우리말(토박이말) 외래말(한자말·왜말·서양말·몽골말…)과 그것들의 섞음말까지 통틀어 일컫는 말이지요. ‘한말글’은 한나라 말과 글을 일컫습니다.”


-숱한 토박이말을 한자말로 둔갑시켜 사전에 올렸다는 말씀을 하신 지 오래됐지요? 연구 결과의 한 부분을 몇 해 전 <한겨레>에 1년여 연재하신 바 있고, 최근에는 1920년 조선총독부에서 낸 <조선어사전>(조-일 사전)에 실린 낱말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하신 걸로 압니다.

“총독부 <조선어사전>은 한마디로 우리말을 없애고 내리깎은 사전입니다. 예컨대 ‘편지’라는 우리말을 “片紙(편지): 手紙”라고 조작했는데(手紙는 ‘편지’란 뜻의 일본말), 우리말 ‘편지’가 片紙에서 왔다고 꾸며 ‘종잇조각’ 같은 것이라고 얼버무린 것입니다.(便紙는 취음) 우리말 ‘부실하다’를 ‘不實(부실): …’이라고 했는데, ‘不實(불실): 열매 맺지 못함’임을 알면서도 ‘부실하다’를 없애고 ‘不實’로 꾸미려고 억지를 부린 것입니다. 우리 고유악기 ‘날라리’를 大平蕭의 속칭이라고 했는데, 중국에 太平蕭(포 charamela)가 있지만 ‘대평소’는 없는 허깨비입니다. 있는 것이 없는 것의 ‘속된말’이라니요?

만주말에도 남아 있는 ‘사둔’을 査頓(사돈)이라고 했습니다. 둔할 둔(頓)의 경우를 이용해 취음했는데, ‘사돈’이라고 하여 ‘사둔’을 없애려고 한 것입니다. ‘사돈’은 <훈몽자회>에도 “婚: 사돈 혼, 姻: 사돈 인”이라고 했듯 ‘혼인’이라는 뜻입니다. ‘잠깐’이라는 우리말을 한자말로 바꾸려고 ‘暫時間’이라는 헛것을 만들어, 있는 暫時도 없는 暫間도 그 준말이라고 하여 ‘잠깐’의 원말로 삼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조선에 무슨 말이 있었느냐고 한자말을 70%로 만들었습니다.”

-선생께서는 평소 한자 ‘窟’이 없을 때 우리는 ‘굴’에서 살았고, ‘주발·접시·대접·통’ 따위 ‘물건’도 만들고, ‘온돌’ 깐 ‘방’에 ‘장작불’ 때고, ‘문’도 달고 ‘외’도 엮어 ‘바람벽’도 치고 ‘도배’도 하고, ‘수염’ 난 ‘영감’이 ‘사랑방’에서 ‘모양’ 내고 ‘사설’ 늘어놓으며, ‘안주’에 ‘강정·경단·인절미·저냐’ 곁들여 ‘잔’ 들고 ‘술타령’도 하고, ‘농’도 만들고 ‘옷장’도 마련했다. 이들은 한자와는 상관없는 우리말들이다. 그런데 어째서 ‘窟·周鉢·桶·物件·溫突·房·長斫·門 …따위에서 왔다고 하느냐며 한탄하시는 걸로 듣습니다. ‘아, 그렇구나!’ 깨닫는 바가 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한자가 있기 전에 우리말이 있었다’는 논리만으로 남들을 깨우치기가 쉽지 않을 듯합니다만?

“한자가 없을 때에도 우리말은 있었다’는 논리가 모든 말에 적용되기는 어렵겠지요. 그러나 숱한 나날살이 말들이 있었고, 이 말들을 향찰이나 이두로 적었다는 걸 누가 부정하겠습니까? 요즘 영어 따위 외래말을 들여와 우리말을 쓰이지 못하게 하는 현실과 견줘 보면 알 수 있지요. 우리 상고 때 활동무대는 주로 중국 땅이었습니다. ‘나라’라는 개념이 없었으니 자연히 말이 섞일 수밖에요. 우리말은 적는 ‘글짜’가 없어서 기록으로 남지 못하고, 행정 땅이름이 전라북도 ‘임실’만 남고 모조리 한자말로 둔갑했잖습니까.”

6년째 우리말로 바꿀 한자말 7만 낱말 빼내
우리말이 70%라고 자랑할 사전 만들어야

» 2009년 9월8일 한글학자 정재두.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문·벽·방, 門·壁·房이 이쪽저쪽에서 따로 자란 말들이란 말씀은 이해가 갑니다만, 어쨌든 그렇게 해서 찾아내신 우리말 낱말 수는 얼마나 됩니까?

“단군 때만 해도 농경기입니다. 우리 건축 양식은 고유의 ‘온돌방’이 뿌리입니다. 이는 방구들을 놓고 벽을 치고 문을 달아야 합니다. 다른 나라에는 이런 양식이 없습니다. 한자도 없었고요. 그런데 총독부 사전은 우리말 ‘온돌’에다가 ‘溫

·溫突’이란 헛것을 달아 놓았습니다. ‘방’에도 뜻이 다른 ‘房’을 달았습니다. 중국말 ‘房’은 ‘집’이란 뜻으로 많이 쓰입니다. ‘문·벽’도 마찬가집니다.

조선시대 문헌에서 우리말로 바꿀 한자말을 6년째 7만 낱말쯤 빼냈는데, 요즘은 ‘고사성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고, 현대문헌에서 추려낼 낱말들을 더해 15만 낱말 정도를 목표로 잡고 있습니다.”

-‘외곡·의곡’(歪曲)을 ‘왜곡’으로, ‘군’을 ‘꾼’으로 고치고, 교과서 띄어쓰기와 외래말 긴소리 없애기에도 관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띄어쓰기는 1958년 한갑수·이강로 님들과 교과서 교정 보면서, 보기를 들면 ‘찾아 가다’ (물건을 찾아서 가지고 가다)와 ‘찾아가다’(만나러 가다)로 구별한 것 따위를 1964년 문교부 <교정편람>에서 정리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통일해 버린 것 같습니다. 외래말 긴소리는 교과서의 ‘베에토오벤’을 1963년 4월 문교부 ‘사회과 인명 지명 심의회’에 언론계 대표로 나가 ‘베토벤’으로 했다가 그해 9월 합동회의에서 ‘베에토벤’으로 절충한 것을 1970년 국어조사연구 위원회에서 맡아 1979년 ‘시안’에서 다시 ‘베토벤’으로 했습니다.

<큰사전> 원고에는 ‘외곡’으로 국어국문학회 사전에는 ‘의곡’으로 돼 있어서 ‘왜곡’을 내세워 27년 만에 통일했습니다. ‘장군’과 ‘장꾼’을 구별할 일이 생겨서, 논의 끝에 ‘군→꾼, 대기→때기, 갈→깔’로 고쳤는데, ‘빛깔·색깔·성깔·태깔…’들로는 고쳤으나, ‘젓깔’은 빠뜨렸습니다. ‘젓갈’은 ‘젓가락’의 준말이므로, 부탁합니다, ‘젓으로 담근 음식’은 ‘젓깔’로 써 주십시오.”

-평소 막걸리도 두어 잔은 하시는 줄 압니다. 아흔을 바라보시는데도 강녕하신 비결이 뭔가요?

“겉으로만 건강한 것 같습니다. 그나마도 수학에 ‘거꿀(逆)도 또한 참(眞)이라’는 말 그대로 남이 하는 짓은 잘 안 합니다. 일제 때 사범학교 학생이 학교보다는 헌책방에서 한글책 봤습니다. 들키면 큰일 났지요. 하루 여덟 잔 물도 안 마십니다. 지금도 할일이 많아서 몸이 약해지면 안 됩니다. ‘거꿀 건강’이지요.”

-소리빌기(취음)로 된 말이 적잖습니다. 한글로 된 전거(기록)보다 한자로 된 전거가 많은 게 사실이고, 이를 보고 우리말도 한자말에서 온 것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땅이름은 삼국시대 초에는 거의 소리빌기였습니다. 삼한 때 ‘미추홀’은 ‘미’는 물의 옛말, ‘추’는 ‘ㅊ’으로 사이시옷 적기, ‘홀’은 ‘골’의 옛말로, 그래서 ‘미ㅅ골’은 ‘물ㅅ골’입니다. ‘마리산’은 麻利山·摩璃山·摩尼山…들로 소리빌기란 게 환히 드러납니다. 그러다가 뜻소리빌기로 이두 적기가 나타납니다. 고구려는 ‘크크리’고 벼슬이름 대로(對盧)는 ‘마주’(對의 뜻)의 ‘마’와 ‘盧’의 소리(‘로’)를 따서 ‘마로’(우두머리), ‘대대로’는 ‘한마로’입니다. ‘인절미’도 ‘仁切味·引切味·仁切餠 …’ 따위로 적습니다.”

-한국 한자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말을 한자로 적어야겠는데, 중국 한자에 알맞은 것이 없을 때 우리가 만들어 쓰는 한자입니다. 예컨대 乫(갈)·乭(돌)·垈(대)·畓(답) … 따위가 있습니다.”

-국제화니 세계화니 하다가 요즘은 글로벌화란 말을 자주 씁니다. 중국·일본·미국화에 이어 이런 말들이 나오는데, 말글 국제화 얘기를 한번 들려주시지요.

“우리가 400차례도 더 되는 침략을 당하느라 내 것 다 뺏겨 버리고 살아남기 힘들어 이 눈치 저 눈치 보다 보니까 외부 세력에나마 빌붙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습니다. 과거제도는 한자·한문을 배워 중국을 알지 못하면 벼슬을 하지 못하는 괴물이었습니다. 비슷한 형세가 요즘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말 국제화는 외국말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알고들 있습니다. 중국에선 간체자에서 병음자모(로마자) 쓰기로 가고 있는데 한자능력시험이니 엉뚱한 일로 야단들입니다. 교육당국은 정신 차려야 합니다. 우리는 뛰어난 한글뿐만 아니라 이를 낳게 한 뛰어난 우리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분야의 고갱이 말들이, 천부인 셋이 ‘칼·돌·거울’이고, 따라서 일본 왕권의 상징이 ‘칼·구슬·거울’인 것처럼 ‘ㄹ’받침 말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또 ‘상글·방글·깔깔깔·하하하… 하는 웃음시늉말이 380개가 넘습니다. 다른 나라 말에는 10개도 넘지 않는답니다. 제 것을 알차게 갈고닦는 일이 국제사회에서 살아남는 길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보건복지가족부는 지난 8월21일 사회복지사업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예고하면서 ‘부랑인·노숙인’이라는 말을 ‘홈리스’로 바꾸겠답니다. 그럴듯한 새말을 하나 지어 주신다면?

“‘한데살이’가 알맞은 말인데, ‘집 없는 천사’보다는 ‘집 밖의 천사’ 정도가 ‘홈리스’보다는 낫지요.”

-국어사전 만드는 데 가르침이나 지침이 될 만한 말씀이 있다면?

“<큰사전>만 18년 걸렸고(1927년 준비작업부터 치면 30년), 나머지 사전들은 10년도 안 걸려 뚝딱 해치웁니다. 다른 나라에서 100년을 헤아리는 일에 비추면 웃음이 나오지요. 남의 것 베끼기만 하지 말고 우리다운 사전이 필요합니다. 우리말이 70%라고 자랑할 수 있는 사전을 만들어야 합니다. 79살 때부터 우리말 자료를 모아오는데, 절반가량 진행된 시점에 갈 길이 바빠 큰일났습니다. 늙어서 10년은 더 걸릴 테니까요. 보조원 양성이 급합니다.

그리고 정신들 차립시다. 논밭 넓이 단위인 ‘단보’(段步)는 일본에서 만든 말인데 우리도 씁니다. 그들은 말을 줄여 쓰는 재주가 있어서 무엇이든 줄입니다. ‘段’을 왼쪽 변에서 ‘

’을 따고 오른쪽 몸에서 ‘又’를 따서 ‘反’으로 줄여 ‘단보’(反步)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북쪽 사전에서 ‘반보’(反步)라고 하니까 그것을 올린 사전이 나왔습니다. 총독부 사전을 찢어 버리고, 필요 없는 한자말 빼고 우리말을 싣는데, 새로 이름꼴 낱말·익은말(명사형·숙어)들을 개발해야 합니다.”

-현행 한글맞춤법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잘못된 것만 바로잡으면 되는 것을, 그 잘못들을 살려서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보기를 들면 ‘쌕쌕쌕’ 소리를 내는 벌레나 물건 이름을 ‘쌕쌔기’로 하기로 돼 있는데, 그것을 ‘쌕쌕이’로 잘못 적는 이가 있다고 이를 원칙으로 삼았으니 적을 수가 있어야지요. 사이시옷 적기에서 한자말 6개도 우습지만, 그나마 ‘셋방’의 ‘방’은 우리말이고, ‘툇간’의 ‘퇴’도 우리말입니다. 우리말과 한자말을 구별짓지 않는 맞춤법이 맞춤법입니까? ‘둘째’ 때문에 ‘두째·세째·네째’도 없애다니 말이 됩니까?” 정리 권오성 기자 sage5t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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