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명상

진정한 복음주의

장코폴로 2011. 8. 18. 10:03

진정한 복음주의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의 소천에 즈음하여 조선일보는 8월 4일자 신문에 옥한흠 목사, 하용조 목사, 이동원 목사, 홍정길 목사를 한국의 복음주의 4인방으로 간략히 소개하면서 홍정길 목사와의 인터뷰를 게재하였다. 인터뷰 내용 중에는 기자의 이 같은 질문도 있었다. ‘한국 교회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홍정길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한도 끝도 없는 이야기이다.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복음 안에 온전한 사람을 만들면 온전한 행동도 할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좋은 생각을 했으면 좋은 행동까지 나와야 좋은 사람인데 좋은 생각을 하면서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지금까지 한국 복음주의 운동의 한계가 아닌가 싶다. 은퇴 1년을 앞두고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는 게 가슴 아프다.”

 

    홍정길 목사의 말의 의미는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은 바르게 배워 잘 알고 있는데 배운 것과는 달리 삶 속에서 그 배운 대로, 성경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몇 개월 전 한 기독교 인터넷 신문에 목사님들이 써 넣은 글에 어느 독자가 댓글을 달아놓은 것을 보고서 탄복을 하였다. 그리고 회개도 했다. 탄복한 이유는 그의 진단과 지적이 어쩌면 그렇게 핵심을 찌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댓글을 단 독자는 먼저 자신이 기독교인임이 아님을 밝혔다. 그런 후 이렇게 댓글을 달았다. “나는 목사님들이 써놓은 글들을 보고서 세 번 놀랐습니다. 첫째는 목사님들이 생각 이상으로 글을 잘 쓴다는 점에 놀랐습니다. 둘째는 그런데 그 글대로 살지 않는다는 점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셋째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꼭 목회자에 한정된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목사 중에도 설교 따로(글 따로), 삶 따로 살아가는 목사가 있을 것이고 성도 중에도 배운 것 따로, 삶의 현장에서의 삶 따로 살아가는 성도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영성신학에 관심을 가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참 많은 것 같다. 그만큼 복음으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이 깊다는 것을 말함이 아니겠는가. 물론 지식으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삶으로까지 연결이 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소망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개혁주의 영성아카데미 원장인 송삼용 목사는 영성을 이렇게 정의한다. “진정한 영성은 하나님과의 생동감 넘치는 교통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과의 교통은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게 하고 거룩한 삶의 열매를 맺게 해준다. 그런 면에서 영성은 성령의 열매요, 삶 속에서 드러나는 거룩한 영향력이다.”진정한 영성은 진정한 복음주의요, 진정한 믿음으로 성경지식과 삶이 다르지 않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인 말씀이 묻어나는 거룩한 삶 자체라는 것이다.

 

    모든 종교의 목적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이른바 기복주의이다. 기독교 역시 기복주의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생존 등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주로 신령한 복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신약성경에서도 현실적인 복에 대한 약속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후9:6, 딤전4:8, 마6:33). 하지만 기독교 신앙의 근본목적은 기복주의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당시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삶 즉 인간 본연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른바 창조목적, 창조질서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특별은총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을 구원하신 근본목적은 세상에서의 성공적인 삶을 살도록 도와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창조목적, 창조질서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다(엡1:3-10). 인간 본연의 삶, 창조목적, 창조질서에 합당한 삶이란 삶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기준이 되는 삶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속에서 신앙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첫째, 성공의 기준 때문이다. 세상의 성공기준은 돈, 명예, 권세 등이다. 그러나 그 기준이 과연 옳은 것일까. 진리일까. 하지만 하나님과 바울 등의 믿음의 용사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그분들은 성공의 기준을 믿음 즉 삶속에서 얼마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좆아 살아가느냐, 창조질서 대로 살아가느냐에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딤후4:7-8, 시1편, 계2-3장).

 

   창세기 4장에 기록된 가인의 후손인 라멕은 하나님을 떠나 큰 권세를 과시하며 살아간, 세상적 기준으로 보자면 매우 성공한 사람이다. 여로보암 왕이나 아합 왕 등도 세상기준으로 보면 큰 부와 권세를 지닌 크게 성공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성공한 자들이라고 평가하는가? 거의 한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복음을 전하며 삶속에서 꿋꿋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간 에녹, 노아, 바울 등을 성공한 자들이라고 평가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돈, 명예, 권세 등을 터부시한다거나 무가치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는 욥의 고백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감사히 받아 주의 나라와 이 사회를 위해 바르게 사용하는 하나님의 뜻과 질서를 좆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둘째, 세상의 평가 때문이다. 돈과 권세는 세상의 성공기준이기도 하지만 세상에서의 힘이기도 하다. 돈과 권세가 있으면 대접을 받으나 그것이 없으면 괄시나 무관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어떻게든 돈을 벌려하고 권세를 얻으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돈 있는 자나 권세자들만을 가까이 하기도 하고, 앞세우기도 하고, 자신도 그런 부류인양 가장을 하기도 한다.

 

    세상의 평가에 초월하지 않는 한 그 누구보다도 성경을 많이 알고, 기도를 많이 한다할지라도 삶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세상의 평가에 초월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독불장군처럼 살아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가치나 평가를 중시하지만 그 보다는 하늘의 가치와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그리스도의 평가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에녹, 노아, 그리고 바울 등과 같이 세상과 다른 성공기준을 가진 사람만이, 세상의 평가에 초월한 사람만이 삶속에서 세상 사람과 구별되게 말씀을 좆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진정한 복음주의, 진정한 영성, 진정한 믿음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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