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다산의 뽕나무
강명관(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죽자, 다산의 험난한 삶이 시작되었다. 1801년 2월 9일 사헌부는 이가환과 이승훈, 그리고 다산이 천주교 신자라고 단정하고 탄핵한다. 대신들이 다산이 죄가 없다 하여 풀어주자는 의견을 올렸으나 서용보(徐龍輔)가 극력 반대하여, 그는 장기현(長?縣)의 귀양객이 되고 만다. 그 해 10월 ‘황사영 백서사건(帛書事件)’이 터졌고, 다산은 다시 서울로 소환된다. 하지만 아무리 쥐어짜도 죄로 삼을 것이 없었다.
“북풍이 나를 불어 흩날리는 눈송이처럼”
『순조실록』에 의하면 유배 명령이 떨어진 것은 11월 5일이다. 다산은 형 정약전과 즉시 유배지로 떠났다. 정약전의 유배지는 신지도(薪智島)에서 나주목 흑산도로, 다산의 유배지는 장기현에서 강진현으로 바뀌어 있었다. 다산은 나주 북쪽 율정(栗亭)에서 드디어 형과 애끓는 이별을 하고 홀몸이 되었다.『나그네 회포』(客中書懷)란 시에서 “북풍이 흩날리는 눈송이처럼 나를 불어, 남으로 강진땅 주막까지 이르렀네.”(北風吹我如飛雪, 南抵康津賣飯家)라고 했으니, 눈보라 휘날리는 한겨울 형과 이별하고 유배지에 떨어진 그 심정은 정말 처참했으리라.
서울에서 강진까지의 거리를 생각하건대 다산은 아마 동짓달의 끄트머리에야 임시거처인 주막집에 도착하고, 거기서 새해를 맞았을 것이다. 다산은 집에서 보낸 편지를 받고 시를 한 수 쓴다.『새해에 집에서 보낸 편지를 받고』(新年得家書)가 그것이다(제목 아래 ‘임술년(1802) 봄 강진에 있었다’(壬戌春在康津)는 주(註)가 있다). 어디 읽어보자.
해가 가는지 새 봄 오는지 까마득히 잊고 있다
새 지저귀는 소리 날로 달라지기에 무슨 일인가 하였다오.
비 오는 날이면 고향생각 등나무 덩굴처럼 자라는데,
겨울 지난 수척한 내 몸은 대나무 가지 같구려.
세상 꼴 보기 싫은 탓에 느지막이 방문을 열고
올 사람 없을 줄 알고 이부자리도 더디 개네.
무료한 세월 보내는 법 아이들이 알고서는
가려 뽑은 의서(醫書) 한 권, 술 한 단지 보냈구려.
천리 먼 길 걸어온 어린 종 건네는 편지 들고
초가집 등잔 아래서 짓나니 긴 한숨이라.
어린 자식 농사 배워 아비를 나무라나
옷 꿰매 보낸 병든 아내 아직도 나를 사랑하네.
좋아하는 것이라고, 이 먼 곳까지 찰밥을 보내주건만
굶주림 면하려고 금방 쇠 투호를 팔았다지.
편지 읽자 답장에는 달리 할 말도 없어
모쪼록 뽕나무 수백 그루 심으라고 당부했네.
낯선 귀양지에 막 도착하니 새해가 되었다. 유배객의 심사는 억울하고 원통하고, 복수심에 가득 차야 마땅하겠지만, 그런 감정은 보이지 않는다. 의외로 덤덤하다. 다만 해가 가는지 봄이 오는지도 관심이 없고, 세상사 보기 싫어 늦게 일어나 방문도 느지막이 열고 이부자리도 천천히 갠다. 그렇지 않겠는가? 방금 당도한 귀양지에서 무엇을 하란 말인가. 이때 편지가 온다. 의서 한 권, 술 한 단지도 있다. 의서는 아마도 유배지에서 병이라도 날 경우 도움이 되라고, 술은 한 때나마 취해 괴로움을 잊으라고 보낸 것일 터이다. 다산은 자식들이 농사를 배우는 것이 글을 배워 마침내 귀양살이를 하는 자신을 나무라는 것 같다고 자조하다가, 옷을 꿰매어 보낸 아내를 떠올리면서 아내는 자신을 여전히 사랑하는 것 같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렇게 유배객 다산은 자식과 아내의 편지를 받고 위로를 받는다. 하지만 답장을 쓰자니, 쓸 말이 없다. 오직 수백 그루 뽕나무를 심으라고 말한다.
어려운 처지지만 희망을 갖고 뽕나무를 심으라
바로 이 시 말미의 뽕나무에 눈길이 간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돌아갈 날을 위해, 남은 가족의 생활을 위해, 처참한 지경에 떨어져 있으면서도 뽕나무를 심으라 권하는 것이야말로 다산의 낙관주의, 현실주의적 자세다. 그는 이후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누차 의식(衣食)의 근원으로 뽕나무와 삼, 채소와 과일을 심고 가꾸라고 말한 바 있다.
귀양지에 떨어졌지만 다산은 희망을 갖고 뽕나무를 심으라 권했다. 새해에는 뽕나무를 심으라는 다산의 말을 기억하여,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자세를 갖자. 어둠이 짙으면 새벽이 오는 법이다.
글쓴이 / 강명관
·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조선의 뒷골목 풍경』, 푸른역사, 2003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푸른역사, 2001
『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공간』, 소명출판, 1999
『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 길, 2006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 소명출판, 2007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푸른역사, 2007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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