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서원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교적 건축물로서, 류성룡(柳成龍)과 그의 셋째아들 류진(柳袗)을 배향한 서원입니다. 류성룡(柳成龍)선생이 살아계실 때 제자들을 가르치던곳. 류성룡 선생의 문집을 비롯해 각종 문헌 1000여종 3000여책이 소장 되어 있습니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선생의 제자들과 유림이 뜻을 같이 하여, 서원 안에 사당(존덕사)을 세우고 위패를 모셔서 선생의 학덕을 이어받고 추모하며 향사(제사)를 올리던 서원입니다. 이 제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춘추향사 춘추향사제는 병산서원의 두 제향(류성룡선생, 류진선생)을 받드는 제사로 봄, 가을 두 번 치루어 지는 병산서원의 가장 큰 행사입니다.-향사일 : 3월초정일(음력), 9월초정일(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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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안동의 풍산현에 풍악서당이 있어 지방 유림의 자제들이 모여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고려말, 공민왕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왕의 행차가 풍산을 지날무렵, 그곳 풍악서당에서 유생들이 난리 중에서도 학문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많은 서책과 사패지(賜牌地-호패와 땅)을 주어 유생들을 더욱 학문에 열중하도록 격려 하 였습니다.
이후, 약 200년이 지나면서 서당 가까이 집들이 많이 들어서고 길이 생기며, 차츰 시끄러워 지면 서 유림들이 모여 서당을 옮길 것을 물색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마침 서애 류성룡선생께서 부친상을 당하시고 하회에 와 계실 때였기에 유림들은 그 일을 선생에게 문의하였다고 합니다.
서애선생께선 그 문의를 듣고 병산이 가장 적당할 것이라고 권하게 되었고 유림들은 선생의 뜻에 따라 서당을 병산으로 옮기고 "병산서당"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습니다. (1572)
임진왜란으로 불에탄 서당을 다시 중건하였고(1607), 사당 '존덕사'를 건립하면서 서원이 되었습 니다.(1610) 그후 병산서원은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고,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고종5년) 흥 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사라지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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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 전체 구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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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은 앞의 병산(안산)이 너무 높고 급하여 강물은 빨리 흐르고, 땅의 기운이 쌓일 틈이 없이 계속 밀려내려가므로 이런 터에서는 재물이 쌓일 틈이 없어 살림집의 입지로는 부적합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빨리 공부를 마치고 사회에 진출해야하는 교육시설로는 안성 맞춤인 터가 되는것이지요. 인적이 드물어 학문수양에 방해가 없으며 뛰어난 경관을 앞에 하여 꽉짜인 서원의 규율과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를 풀수 있는 숨구멍이 트여있는 그런 곳이기에 서원의 터로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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