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익준 감독의 <똥파리>
◇영화백정(映丁) 양익준
내공을 위해 찾은 공주 후미진 그 곳, 기숙을 하듯 자연에서 영혼을 살찌우는 방법을 모색하면서도 양익준의 마음 한켠에는 어쩔 수 없는 분노가 노을처럼 스며들고 있었다. 달궁의 무사가 되어 차가운 정신만이 칼날처럼 솟아올라 영화백정(映丁) 양익준을 탄생시켰다.
변방에서 띄운 비장한 도전장은 단검이 되어, 관객들의 가슴에 꽂히고, 흐린 눈을 맑게 해주었다. 천안문 광장 앞의 대륙풍 같은 그의 필살기들은 건방진 오만을 동반하지만, 차라리 기회주의적 속성의 엉터리 보수보다 장점이 훨씬 많다.
작년부터 소금물에 절임질을 당한 그의 작품은 국내외의 지역과 영화제 색깔을 떠나 제목에서부터 토종의 멋과 맛을 역겨울 정도의 과장법과 수사학으로 우리를 깨어있게 만든다. 그가 분노를 혁명으로 만들 때 식자연하는 사람들의 혈관에는 동맥경화의 조짐이 일었다.
비상업영화의 태생적 한계를 깨트린 쾌거는 자기극복 논리와 자기 공동화 현상, 혹은 마음비우기에서 파생되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나무잠 같은 고통의 통로를 지나 맞는 아침이 찬란하리라는 기대는 금물이다. 늘어진 전선가닥 만큼이나 복잡한 가족이 자리 잡는다.
가족과 폭력에 걸친 아웃사이더들의 삶들은 달동네들에서 곧잘 관찰된다. 거친 욕들과 일상적인 구타들이 운명처럼 펼쳐져 있다. 그래서 ‘세상은 엿 같고, 핏줄은 더럽게 아프다.’ 각본, 감독, 주연을 과감하게 해치운 양익준은 원시적 야성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비딱선을 탄 슬로우프는 그 중량감만큼 세월을 비켜서고, 칼라를 덜 입힌 파스텔 톤이 훑어간 달동네가 냄새나는 막걸리처럼 이질감을 생산한다. 가난과 폭력이 집요하게 달라붙는 거머리 같은 운명의 굴레 앞에 자신도 모르게 마취되어 있는 현상들이 도처에 산재한다.
◇인간 본성 탐구와 순환고리에 대한 감독의 연구
톨스토이 작품의 강한 생명력과 일맥상통하는 인간 본성 탐구와 순환고리에 대한 감독의 연구는 용역 깡패 상훈을 통해 떼어낼 수 없는 가족으로 확장된다. 가정폭력이라는 의미심장한 주제의 숲에서 공명(空鳴)처럼 되살아나는 실존적 구원은 이 영화의 미덕이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점의 하나는 주인공의 미소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니컬한 미소가 전부이다. 섹스 장면의 부재도 이 영화가 갖는 도덕률 이라면 도덕률이다. 절대 프로의 일면이다. 생존경쟁에서 소통솔루션이 절대 필요하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냉혈한 상훈은 결국 소통의 부재로 절대 권력을 유지하지 못한 채, 처남이 될법한 동네 졸개에게 무참히 개죽음 당한다. 당당한 결투나 몹 씬도 없다. 정말 허접스런 일면이다. 씁쓸하면서도 진한 메시지를 던지는 양익준의 ‘역한 세상에 물먹이기’는 목적을 달성했다.
양익준의 시네마투루기는 두드러진 연기력으로 관객들이 이 영화 속의 일부분처럼 느끼게하거나, 이해하도록 만든다. 발가벗은 가족이야기 위에 덧칠되는 상훈의 유년, 연희의 우울, 그들에게 가족은 울타리가 아니라 버거운 짐이다. 시인 이 상의 삶이 포개진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슬픔과 폭력, 온기를 느껴보지 못한 잉여인간들, <똥파리>의 인간들은 인간과 폭력의 용어구분조차 없는 욕을 비상식량으로 사용한다. 숨 막히는 현실 속에서 연기자 양익준의 삶이 처절하였듯 영화 <똥파리>의 연출 역시 치열하다.
저예산으로 조탁한 보석같은 영화, <똥파리>는 역겨운 아웃사이더를 그린 작품이다. 도발적인 대사 ‘씨발놈’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끝까지 ‘씨발놈’을 무기로 삼고 있다. 탄탄한 구성과 상상력으로 뒤틀린 세상을 마음껏 가지고 놀았다.
이 영화의 근저에는 가난에 기인한 엄청난 폭력이 저리잡고 있다. 이 사회를 발가벗겨 해부한 이 영화에 존중의 마음이 생긴다. 폭력의 비빔밥, 언어 폭력, 육체적 폭력, 심리적 폭력이 진달래 빛으로 만개하여 일상의 처참한 소부대 전투를 양산한다.
◇감독의 현실에 대한 고독과 좌절, 불만
독특한 개성으로 관객을 사로잡은 양익준 감독의 현실에 대한 고독과 좌절, 불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각본과 연기, 연출력은 경이롭지만, 때때로 사회를 따스하게 응시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할 것이다. 양익준의 감독으로서의 연출력 가능성을 계속 주시할 것이다.
번역되어질 수 없는 독특한 코리안의 삶의 이면을 움직일 수 없는 산의 무게로 비상업 영화의 지레대 역을 해낸 <똥파리>의 탄화과정을 가오리연의 날개 짓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리지 않고, 친 그림으로 여기고 싶다.
무르익은 비상업영화의 들녘에 센 놈으로 자리잡은 <똥파리>가 양익준의 소와와 좌절을 솔직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소금’과 ‘빛’의 의미와 중첩된다. 양익준의 살아있는 카메라 아이가 성장통을 앓고 있다고 생각하고 벌써 다음 작품과의 조우를 기다린다.
포장마차를 부수며 카타르시스를 얻고 싶었던 양익준은 <똥파리>로 약간의 안식을 얻은 듯 하다. 그의 삶은 치열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겐 작은 제스쳐일 뿐이다. 성실함과 열공으로 자신에게 이르는 완성으로 ‘똥파리’가 ‘나비’로 변태되길 기원한다.
장석용(전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현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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