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금관의 예수

장코폴로 2009. 12. 27. 06:22

금관의 예수

                                                          정 지 창(영남대 독문과 교수)

막이 오르면, 한국 1971년 겨울. 청회색의 음울한 하늘을 배경으로 삐에따의 예수상이 실루엣으로 보인다. 무대 중앙에 작은 탁자. 탁자 위엔 검은 표지의 거대한 성서. (…) 기타 소리와 함께 노래가 들린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가난의 거리/ 어디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고향도 없다네/ 지쳐 몸 눕힐 무덤도 없이/ 겨울 한복판/ 버림받았네/ 버림받았네/ 아아 거리여/ 외로운 거리/ 거절당한 손길들/ 얼어붙은 저 캄캄한 곤욕의 거리/ 어디 있을까/ 천국은 어디/ 죽음 저편에/ 사철 푸른 나무숲/ 거기 있을까/ (…) 어디 계실까/ 주님은 어디/ (…) 오, 주여 이제는 여기/ 우리와 함께, 주여 우리와 함께 하소서.” 

               그들은 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한다, 그러나

이것은 1973년 원주 카톨릭회관에서 초연된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첫머리다. 1970년대의 캄캄한 겨울에 거리로 쫓겨난 거지, 문둥이, 창녀들과 이들을 도우려는 수녀, 이들을 등쳐먹는 순경과 사장, 이들을 외면하는 대학생과 신부. 그리고 시멘트의 감옥에 갇혀 금으로 된 관을 쓰고 있는 예수. 예수는 금관을 벗어 문둥에게 주지만, 신부와 순경, 사장이 달려들어 도로 예수의 머리에 씌워 버리고 예수는 다시 시멘트로 굳어버린다.

장면은 바뀌어 성탄일을 눈앞에 둔 2009년 12월 하순, 용산참사의 현장인 남일당 건물 앞 거리.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소속의 신부와 수녀, 스님, 문인, 학생, 일반시민, 유가족들이 모여 미사를 올리고 있다. 그동안 철거 용역 깡패들과 경찰들의 폭력과 정부의 무관심 속에 단식을 계속하다가 쓰러진 문규현 신부의 뒤를 이어 그의 형인 문정현 신부가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남일당 성당’이라 불리는 이 거리의 성당엔 금관을 쓴 예수는 보이지 않는다.

금관을 쓴 예수는 어디로 갔을까? “예수님, 누가 예수님을 감옥에 가두었습니까? 그들이 누구입니까?”라는 문둥의 질문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다. 오직 저희들만을 위하여, 저희들만의 신전에 나를 가두었다. 내가 너 같은 가난한 백성들에게로 가지 못하도록 그들은 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한다. 그러나 나의 이름으로 그들은 나를 다시금 십자가에 못박는다. 그들은 나의 제자임을 자랑한다. (…) 가난한 사람들의 굶주림을 외면하고, 박해받는 의로운 사람들의 고통스런 외침에 귀를 막는다. 그리고 그들은 세속의 안락과 부귀와 영예와 권세에 너무나 가까이 있는 탓에 그들의 귀에는 나의 말도, 너희들 가난한 백성의 외침도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들이 나를 가두었다.”

              나라란 무엇이고 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매서운 추위 속에 찾아온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달콤한 크리스마스 캐롤보다 김민기가 작곡한 「금관의 예수」를 들으며 용산참사의 희생자들과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을 추모해야겠다. 그리고 나라란 무엇이고 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겠다. “나라란 우리에게 빼앗기만 하는 곳/ 땅에서 쫓아내고 집을 빼앗는 곳/ 지아비를 빼앗아가고 지어미를 짓밟는 곳.”(신경림의 「새재」가운데에서) 정말 그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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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정지창
· 영남대학교 독문과 교수
· 전 민예총대구지회장
· 저서: <서사극 마당극 민족극>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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