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 눈이 올듯한 하늘이네요.
12월 한 달 동안 마음을 전하는 선물 특별전시 '크리스마스 우체국'을 엽니다.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바로 나오는 신선함, 즐거움, 추억을 전하고자
때로는 아이의 마음을 갖고 살고픈 어른들의 소망을
회전목마, 루돌프, 하얀 눈, 반짝이는 별에 담았습니다.
전시보러 꼭 한 번 오시고, 어제 아시아경제에 실린 글 보내드립니다.
마음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
오현금 올림 010-3115-7551
"잊혀진 여인"
‘언프렌드(unfriend)’가 뉴옥스퍼드 아메리칸 사전의 올해의 단어로 뽑혔다고 합니다. 'un'이라는 접두사 탓에 얼른 ‘친구안하기’로 번역 했습니다. 사이좋은 친구가 된다는 말은 있어도 어떻게 친구를 안하도록 할 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unfriend'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일촌끊기와 같은 의미로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위크에서 '친구목록 삭제' 등에 쓰이는 신조어”라는 설명 기사를 읽고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습니다.
몇 년 전에 작은 딸이 친구랑 저녁에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말에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중학생이 친구랑 카페에서 만난다고? 그것도 저녁시간에? 저도 모르게 어디서 만나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응, 8시, 다음 카페에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이버 공간의 카페를 저는 순간적으로 현실 공간의 카페로 착각한 거지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며 맺는 관계도 정리할 줄 몰라 쩔쩔매고, 기껏해야 이메일만 사용하는 저로서는 사이버 세상에서 인간의 네트워크를 만든다는 것은 엄두도 못내는 일입니다.
요즘 많이 사용하는 싸이월드나 페이스북에서는 가까운 친구들을 등록해 친구의 목록을 만든다고 합니다. 가장 친한 친구가 ‘일촌’이지요. 제가 알기로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일촌, 형제 자매 관계가 이촌, 마주보면 가장 가까운 사이이지만 돌아서면 남이 되어버리는 부부사이는 무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이버 세상에서의 일촌은 그냥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에 불과한 것이랍니다. 일촌의 숫자가 많음은 자신이 인기 있다는 것을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이기에 많은 사람이 등록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일단 일촌으로 등록을 할 때는 서로의 동의하에 이루어집니다.
그와는 반대로 사이트의 주인이 ‘친구삭제하기’ 혹은 ‘일촌끊기’ 항목을 상대방과 의논도 없이 클릭함으로써 둘의 관계는 끝이납니다. 어느 날 나는 내가 여전히 그 친구의 일촌이라 생각하고 접속했는데 그 친구가 나를 ‘unfriend’시켰기에 더 이상 가까이 갈 수 없는 상황이 생기게 됩니다. ‘엄마, 수영 끊어줘, 학습지 끊어줘, 태권도 끊어줘…’라며 늘 엄마한테 조르던 아이들이 사이버 세상에서는 자신의 의지로 마구 친구를 끊어버리는가 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친구 목록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삭제 당해서 한마디 변명도 할 수 없고 가까이 갈 수도 없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인간의 만남과 헤어짐이 클릭 한 번으로 쉽게 될 수 있는 일인가요?
저는 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여러 겹으로 싸여있는 양파를 떠올립니다. 양파의 가운데에 제 자신이 있는 것이지요. 가장 가까운 껍질에 있는 사람들, 두 번째 껍질에 있는 사람들, 다섯 번째 껍질에 있는 사람들… 나는 그 친구를 세 번째 껍질에 두었는데 그 친구는 나를 첫 번째 껍질에 두었다면 서로의 기대가 어긋나 힘들어집니다. 비슷한 순위에 두도록 같이 노력해야 오랫동안 만날 수 있게 되겠지요.
요즘 수첩에 전화번호를 적어 다니거나 외우는 분은 거의 없습니다. 휴대폰에 저장해 두었다 전화번호 검색을 눌러 이름을 입력해 번호를 찾아냅니다. 어느 날 전화번호 추가를 눌렀는데 1000명이 넘어 더 이상 저장할 자리가 없다는 메시지가 떴습니다. 그때 처음 휴대폰의 번호저장 한도를 알았고 제가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싶은 분이 1000명씩이나 된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마음의 거리가 가장 멀다고 생각되는 분의 전화번호부터 수첩에 적어두며 지우기 시작했습니다. 저와는 관계없는 단어인 줄 알았던 ‘unfriend’ 단어의 의미를 알기시작하면서 말입니다. 요즘은 이러한 작업을 주기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삭제할 때마다 그분과 보낸 시간을 생각하며 한때는 가까운 사이였는데 지금은 왜 1000명 밖으로 보내야 하는지 생각해봅니다.
어떤 분이 나의 휴대폰에서 떠나감으로 세월이 지나면 나에게서 잊혀지는 사람이 되고, 나 또한 어떤 분에게서 ‘친구 삭제’됨으로 인해 잊혀진 여인이 되겠구나 생각합니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여류 시인이자 화가였던 마리 로랑생의 시를 떠올립니다.
권태로운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슬픔에 젖은 여인입니다.
슬픔에 젖은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불행을 겪고 있는 여인입니다.
불행을 겪고 있는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병을 앓는 여인입니다.
병을 앓는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버림받은 여인입니다.
버림받은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쫓겨난 여인입니다.
쫓겨난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죽은 여인입니다.
죽은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잊혀진 여인입니다.
오현금 토포하우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