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기록정신이 빛나는 조선시대의 일기 문화

장코폴로 2009. 9. 2. 09:27

기록정신이 빛나는 조선시대의 일기 문화


신 병 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최근 서거하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마지막 일기가 공개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감동을 주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삶의 흔적들과 앞으로 지향할 방향을 매일의 일기로 남긴 사례는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비롯하여,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등에 소장된 다수의 일기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왕이 쓴 일기, 『일성록』


규장각에서 우선 주목되는 일기 자료는 『일성록(日省錄)』이다. 정조는 세손 시절인 1760년(영조 36) 부터 매일 일기를 쓰고 이것을 국정 기록으로 남겼다.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써온 일기는 왕이 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783년(정조 7) 이후에는 신하들이 기록하는 방식으로 정착되었지만, 『일성록』의 모태가 된 것은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 쓴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였다. 정조는 증자가 말한 ‘오일삼성오신’(吾日三省五身: 나는 매일 나를 세 번 반성한다)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일찍부터 일기 쓰는 습관이 있었다. 1785년(정조 9) 정조는 자신이 탄생한 후부터 『존현각일기』에 이르기까지의 내용과 즉위한 후의 행적을 기록한 『승정원일기』 등을 기본 자료로 하여 중요 사항을 강(綱)과 목(目)으로 나누어 왕의 일기를 편찬할 것을 명하였다. 규장각 신하들이 실무를 맡았고, 1760년(영조 36)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의 기록이 정리되었다. 『일성록』은 마지막 왕 순종까지 150년간에 걸쳐 기록된 2,327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성록』은 국왕 주변에서 매일 일어난 일들을 요점 정리 방식으로 간추린 기록이다. 신하들이 올린 상소문을 비롯하여 국왕의 동정과 윤음(綸音:임금이 백성이나 신하에게 내리는 말), 암행어사의 지방 실정 보고서, 가뭄·홍수 구호 대책, 죄수 심리, 정부에서 편찬한 서적, 왕의 행차 시 처리한 민원 등이 월, 일별로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주요 현안을 요점 정리하고 기사마다 표제를 붙여서 열람에 편리하게 했다.


『일성록』의 첫 부분은 날씨로 시작한다. 『일성록』의 날씨 기록은 『승정원일기』의 그것과 함께 조선시대 기상 상황을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현재에도 일기 첫머리에 꼭 날씨를 기록하는 것도 어쩌면 이러한 전통의 산물인지 모르겠다. 한 글자 한 글자 붓으로 써 내려간 이 책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용어는 나를 지칭하는 ‘여(予)’다. 일인칭 한자인 ‘予’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 국왕을 지칭하는 ‘上 ’과 대비되면서 왕 스스로가 쓴 일기임을 확실히 증명해준다.

 

여러 일기 자료, 생활사의 보고(寶庫)


규장각에는 다양한 일기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다. 유희춘의 『미암일기』, 이귀의 『묵재일기』, 오희문의 『쇄미록(鎖尾錄)』, 이필익의 『북찬록(北竄錄)』, 윤창후의 『수주적록(愁州謫錄)』, 유만주의 『흠영(欽英)』 등이 대표적이다. 『용사잡록(龍蛇雜錄)』, 『난중잡록(亂中雜錄)』, 『고대일록(孤臺日錄)』 등은 임진왜란과 관련된 일기이며, 병자호란과 관련해서는 『병자남한일기』가 대표적인 일기다.


이순신은 전쟁이라는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차분히 일기를 써내려갔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정리하는 한편 전쟁을 준비해가는 방편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난중일기』에는 가족에 대한 걱정, 원균에 대한 불쾌한 심정 등 인간 이순신의 진솔한 모습이 나타나 있는 점도 주목된다.


『쇄미록』은 임진왜란 중 오희문이 겪은 일을 정리한 일기인데 민간인의 관점에서 임진왜란을 체험한 일기라는 점이 흥미를 끈다. 『고대일록』은 북인의 영수이자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정인홍의 제자 정경운이 쓴 전란 일기로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의 구체적인 모습이라든가 지방에서 사족들의 생활 형태들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유배 일기도 눈에 띈다. 바쁜 관직생활보다는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았던 유배기가 오히려 일기에 전념하게 한 셈이다. 『수주적록』은 18세기의 문신 학자인 윤창후가 함경도 종성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과 잡문을 기록한 일기로 국경 지역의 국방 상황 등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수주적록』의 말미에는 저자가 청나라 사람들과 교유하면서 배운 만주어를 한글 발음으로 기재해놓아 유배 생활에 적응하려했던 흔적이 잘 나타난다.  『북찬록』은 이필익이 안변에서의 유배 생활을 기록한 일기로, 유배지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비롯하여 북방 지역의 생활상이 잘 드러나 있다.


투철한 기록정신이 전하는 삶의 생생한 현장


16세기의 학자 유희춘이 쓴 『미암일기』는 개인이 쓴 가장 방대한 일기자료로 손꼽힌다. 『미암일기』에는 꿈이나 질병, 지방의 풍속 등 저자의 일상에 관한 기록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자료가 부족한 16세기 생활사 연구에 큰 도움을 준다. 『미암일기』는 『선조실록』의 편찬에 적극적으로 사료로 활용되기도 했다. 임진왜란으로 사초(史草)가 많아 소실된 상황에서 『미암일기』는 역사 자료로서 손색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유희춘과 비슷한 시기를 살다간 학자 이문건은 손자를 기르면서 그가 커가는 모습을 일기 형식의 기록으로 담은 『양아록(養兒錄)』을 남겼다. 이문건에게 손자의 출생은 귀양살이와 연이은 가족사의 불운에서 오는 이문건의 좌절감을 일거에 씻어줄 수 있는 가뭄 속의 단비였다. 이문건은 귀양살이의 여유(?) 속에 손자가 자라나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고, 기록에 대한 그의 열망은 이 모습을 하나하나 정리해내게 했다. 선비가 육아 일기를 쓰는 것이 크게 흠이 되지 않았던 조선전기의 사회분위기 또한 『양아록』을 쓸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육아 문제를 철저히 여성의 분야로 한정했던 조선후기였다면 『양아록』은 쉽게 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흠영』은 유만주(1755~1788)가 21세부터 33세로 요절하기까지 1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쓴 144권의 일기다. 저자는 서문에서 일기에 꼭 들어가야 할 것으로 사건, 대화, 문장, 생각을 꼽았다. 이 일기에는 저자가 공부했던 내용들을 중심으로 서양문물에 관한 것과, 생활사에 관한 기록들이 잘 정리되어 18세기 지식인의 학문 수준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 방대한 분량도 놀랍지만 하루도 일기를 거르지 않은 성실성과 근면함에서 조선시대 학자의 참 모습을 느낄 수가 있다.


최근에는 18~19세기를 살다가 노상추(1746~1829)가 쓴 68년간의 일기가 발견되어 이 시기 모습을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국왕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가 발판이 된 『일성록』을 비롯하여, 『난중일기』와 같은 전쟁 일기, 유배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꾸준히 쓴 유배 일기, 생활 일기 등 다양한 일기 자료들은 선조들의 투철한 기록정신과 함께 그들이 살아갔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만나게 해준다.


 


글쓴이 /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저서 :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함께, 2007

          『제왕의 리더십』, 휴머니스트, 2007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돌베개, 2005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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