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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환의 시법 : 부드럽게 생동하는 이미지들-⑤식물이미지- 심종숙(시인/문학평론가)

장코폴로 2015. 12. 21. 00:57

 이시환의 시법 : 부드럽게 생동하는 이미지들

          -⑤식물이미지

심종숙(시인/문학평론가)


 


  대지에 뿌리를 박고 빛과 물, 양분을 먹으며 식물들은 자란다.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갖가지 야생의 풀들이 나 있는 들판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다. 사시사철 피는 꽃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쁨이다. 고마울 따름이다. 문학의 꽃은 시라고들 한다. 인간의 꽃은 여자라고 한다. 그렇듯, 꽃은 결실을 맺기 위하여 잠시 필 뿐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어떤 아름다운 꽃도 열흘을 붉게 피어있지 못한다는 의미는, 이 지는 꽃처럼 인간의 생명도 삼라만상도 때가 되면 다 먼지 되어 사라진다는 불교의 무상과 코헬렛의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라고 말하는 것이리라. 저 들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야생화도 한 포기 풀들도 모두 소중해지는 것은 그것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러져갈 것이기에 더욱 아름답다. 한 그루의 나무가 우리에게 그늘을 드리워 여름에 쉬어가게 하며, 그 가지들에 새들을 깃들여 둥지를 틀게 한다. 바람이 쉬었다 가고 새들도 쉬었다 지난다. 한 줄기 햇살이 구름 속에서 터져 나와 나ant가지 사이로 긴 발을 내릴 때 나무는 하늘에 있는 태양과 대화를 나눈다. 한 그루의 나무에는 여러 줄기 빛발이 내린다. 나무는 가볍게 빛발을 투과시킨다. 그 안에 일렁이는 빛발은 나무를 눈부시게 만든다. 일렁이는 태양의 온기를 받아 겨울나무는 추위를 잊는다. 잎들이 진 나무들이 생존하는데 빛은 필수불가결이다. 겨울바람을 쉼 없이 날려 보내는 나뭇가지들은 무섭게 휘청거린다. 그 바람에도 나무는 쓰러지지 않는다. 여름의 폭풍우를 견딘 나무는 겨울의 매서운 바람에도 휭휭 소리를 낼 뿐 꿋꿋이 버틴다. 철새들이 먼 길을 오는 동안 잠시 머물러 가는 이 나뭇가지는 새들의 쉼터이다. 봄이 되면 이 나무들의 가지에는 꽃을 먼저 피우거나 잎이 돋아난다. 초록의 계절에 나무는 화려한 꽃등을 켜고 겨우내 지친 영혼들을 기다려 맞이한다. 꽃나무 아래에서 오는 봄을, 꽃이 지는, 가는 봄을 아쉬워하며 노래한 옛 시인들은 이렇게 자연의 순환을 가슴 깊이 공감하며 그 감흥에 젖어 감정을 풀어내었다.

  이시환의 식물 이미지는 크게 꽃과 풀, 나무의 이미지이다. 이 꽃과 풀과 나무가 동물이나 광물 이미지와 합성되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먼저, 꽃과 관련되는 이미지들을 살펴보자. 그의 시적 에스프리가 살아 숨 쉬는 첫 시집 『안암동日記』의 「꽃」을 읽어보자.

  

 너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 아니면 판독해낼 수 없는 상형문자. 아니면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의 깊이이고 그 깊이만큼의 아득한 수렁이다. 너는 나의 뇌수에 끊임없이 침입하는 어질머리의 두통이거나 그도 아니면 정서적 불안. 아니면 흔들리는 콤플렉스. 시방 손짓하며 나를 부르는 너는 눈이 부신 나의 상사병. 깊어가는 불면의 내 침몰. 내 기쁨.


-「꽃」, 『안암동日記』에서


  꽃은 시적 화자 ‘나’에게 방언, 상형문자, 어둠의 깊이, 수렁, 어질머리, 두통, 정서적 불안, 콤플렉스, 상사병, 침몰, 기쁨이다. 꽃은 생명을 상징하기에 알아들을 수 없는 세계의 방언이며 상형문자이다. 이 눈부신 생명에 비해 내면의 ‘나’는 어둠을 지니며, 그 어둠은 깊고 나를 수렁에 가둔다. 그러니 눈부신 생명의 꽃 앞에 서면 현기증과 두통, 불안으로 심신은 떨린다. 나의 꽃에 대한 상대적인 감정에서 오는 콤플렉스이며, 일방적인 상사병으로 나는 서서히 침몰해가지만 기쁨의 침몰이다. 이 일방적인 나의 꽃에 대한 사모는 「오랑캐꽃」에 오면 더욱 농밀하며 상호적이다.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있는 나의 배 위로 배를 깔고 누워있는 당신은 황홀이란 무게로 나를 짓누르고. 짓눌려 숨이 막힐 때마다 햇살 속 저 은사시나무 잎처럼 흔들리면서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면 출렁이는 세상이야 부시게 부시게 출렁일 뿐.


-「오랑캐꽃」, 『안암동日記』에서


  오랑캐꽃은 작고 땅에 붙어서 자라는 보라색과 흰색을 지닌 제비꽃을 말한다. 봄꽃이며 우리네 서민들이 좋아하는 전통적 정서가 짙은 꽃이다. 그러나 바닥에 붙어있듯 하는 오랑캐꽃인 당신은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있는 나의 배 위로 배를 깔고 포개어 누워있다고 하여 아주 농밀한 연인들의 사랑의 모습으로 의인화하고 있다. 시인이 오랑캐꽃을 대하는 자세는 연인처럼 친밀하고 농밀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활유법을 써서 움직이지 못하고 붙박혀 있는 오랑캐꽃을 나를 짓누르는 황홀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 연인의 애무에 짓눌릴 때마다 시적 화자는 눈이 부시게 출렁이는 세상의 이쪽과 저쪽을 바라본다. 꽃의 황홀은「벚꽃 지는 날」에서는 나에게 ‘법열’을 느끼게 한다.


    간밤에 마음과 마음이 통했는가?


     아주 가벼웁게 바람의 잔등을 올라타는

     저 수수만의 꽃잎들이 추는 군무(群舞)가

     마침내 반짝거리는 큰 물결을 이루어 가는 것이,


     그 모습 눈이 부셔 끝내 바라볼 수 없고

     그 자태 어지러워 끝내 서 있을 수도 없는

     나는, 한낱 대지 위에 말뚝이 되어 박힌 채

     그대 유혹의 불길에 이끌리어 손을 내어 뻗는 것이,


     간밤에 마음과 마음이 통했는가?


     아주 가볍게 몸을 버려서 하늘을 나는 꿈을 꾸는,

     저 흩날리는 꽃잎들의 어지러운 비상(飛翔)!

     그 마음 한가운데에서 일어나 소용돌이치는

     법열(法悅)의 불길을 와락 끌어안는다, 나는.


       -2003. 4. 22. 00:5                          

       「벚꽃 지는 날」, 『상선암 가는 길』에서


  꽃이 지니는 아름다움과 생명력은 이 시에서 바람과 결합하여 시적 화자 나에게 ‘법열’의 불길을 일으킨다. 그 법열의 불길을 와락 끌어안는다. 바람과 꽃의 마음이 통하고 시적 화자인 나와 꽃의 마음이 통하여 일어나는 법열의 환희 앞에서 마음은 소용돌이친다. 법열이란 득도의 절정에서 느끼는 희열, 열락, 법락을 말하므로 이 시는 벚꽃이 일제히 지는 모습에서 무상함보다는 바람을 타고 도는 흰 꽃잎들의 군무가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득도의 법열을 일으키는 것에 비유되어 있다고 하겠다. 생명이란 이렇게도 아득하고 아찔한 것이며, 가슴이 벅차올라 기쁨으로 넘쳐나는 경지로 이 때 모든 마음의 어둠은 한 순간에 사라지고 오로지 열락만이 존재하는 완전히 충만한 세계이다. 이 시는 그런 경지를 시로 표현하고 있다. 「蘭․1」과 「蘭․2」에서는 난이 지니는 생명력을 노래하였다.


기다란 목숨으로/ 가녀린 떨림으로/시방 살아 있음//그만큼이 기쁨이요/그만큼이 슬픔이요/꼭 그만큼의 그것//더 이상/아무 것도 아닌/우리 뜨거움//이 땅 가득/어둠을 어둠이게 하라/빛을 빛이게 하라.


-「蘭․1」, 『바람序說』에서


홀로/이 세상 모서리에서//흔들리며/무너지며/부서지며/다시/태어나며//시방/이 땅을 흔드는/뜨거운/ 몸짓으로//갈아 귀를 세우고/감아 눈을 뜨는.


-「蘭․2」, 『바람序說』에서


  「蘭․1」과 「蘭․2」는 난의 가는 잎사귀를 보고 시인은 그 목숨, 떨림을 읽어낸다. 그 이유는 난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한 포기 난이 살아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기쁨이자 슬픔이다. 그 살아있는 뜨거움만큼 우리 인간의 삶도 뜨겁다. 난 한 포기처럼 우리네 인생도 그와 같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난 한 포기가 살아있는 것이 귀하듯 우리네 삶도 소중하며 어둠이 어둠으로 빛을 빛이게 하는 것도 난이 지니는 고매함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각자 홀로 이 세상 모서리에서 한 포기의 난처럼 때로 무너지며 부서지기도 하면서도 다시 부활하고 이 땅을 흔들기도 하는 뜨거운 몸짓으로 귀를 갈아 세우고, 살아있는 것들 안에 존재하는 숨과 말씀을 듣고, 눈을 감아 마음의 눈을 떠서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한다.

「백목련․1」에 오면 꽃을 바라보는 시인의 에스프리는 이미지를 다소 화려하게 의장하기 보다는 꽃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주체 죽이기인 ‘나’를 죽이는 사랑의 화신으로 변화되어 있다.


문득, 귀 밑을 스쳐가는/바람의 비늘처럼//숨이 붙어있는 시간이란/그저 잠깐의 이 쪽 저 쪽이라/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순간이요 세월인데/내 이승에 발을 붙이고 살면서/이 한 몸 구석구석 살라 보았나/있는 거 없는 것 다 주어도 부족할/진짜 사랑이라는 것 한 번 해 보았을라/단 한 순간만이라도/ 너도 모르게 나도 모르게/내 아닌 너를 위해 진정/쏙 빠져 보기라도, 미쳐보기라도 했을라./시방 거추장스런 허물을 벗어버리고/쾌히 나를 죽여감으로/다시 태어나는 너의/눈부신 알몸이/나의 눈물을 굴리는 까닭은.


-「백목련․1」, 『바람序說』에서


마침내/돌아앉아 가부좌를 틀면/훨훨 불타며 터지는/이승의 껍질 속에서/나비떼가 솟아오르고//낮게 낮게 깔리는 내음/줄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면/그대가 벗어놓은/그 빈 자리/내 서슴없이 빠져 죽을/하늘이 거기.


-「백목련․2」, 『바람序說』에서


  「백목련․1」에서는 흰 목련이 피어있는 자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는데, 그 아름다움은 자신을 완전히 연소하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다시 부활하는 데에 있다. 이 시의 세계는 불교적 무상감을 바탕으로 찰나에 지나지 않는 이승의 삶 동안 자신을 버림으로써 너를 위해 나를 연소한다. 그 연소의 아름다움을 희게 핀 목련을 통하여 보았다. 원래 흰 색일랑 순결, 정의, 승리를 의미한다. 사랑의 순렬함을 지니고 열정적으로 너를 위해 나를 연소하는 삶을 통해 승리를 한다. 거기에는 어떤 장식이 필요 없다. 몸을 전적으로 던지듯 삶을 온전히 바쳤기 때문에 미사여구가 필요치 않다. 그러니 거추장스런 옷과 같은 허물은 불필요하리라. 백목련은 짧은 순간 동안 피었다 지므로 그 덧없는 이승의 시간 동안 자기를 완전히 연소한다. 만개한 꽃의 모습은 완전 연소의 절정의 때여서 시인에게는 눈물겹기만 하리라. 「백목련․2」에서는 득도에 이르는 이의 완전한 자기 비움을 나비떼가 날아오르는 것에 비유하면서 시적 화자는 그 아득한 경지에 자신도 몸을 던지고픈 마음을 노래함으로써 백목련과 일치를 이루려고 하였다. 사라지는 것, 특히 순간적으로 명멸해가는 꽃의 덧없음을 「풀꽃」에서도 안타깝게 노래하고 있다.

 

오늘 하루/산다는 것이 무엇이냐/무엇이 참 사는 것이냐/묻지를 말게//그저 사는 것처럼/시방 살아있는 것처럼/살다가 보면/살다가 보면/그 자리 그 내음/저만의 빛깔로 터지는/풀꽃망울의/작은 흔들림같이/잠시 머물다 가는 것임을/머물다 가는 것임을//그래 더욱 안타까이 아름답고/더더욱 소중하고 절실한 것을/그저 흐르는 물처럼/바람처럼.


-「풀꽃」, 『바람序說』에서


  삶은 있다가 없어지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이 풀꽃을 통해서 간취하며 잠시 머물 뿐인 이승에서의 한 때가 아름답고 소중하며 절실한 것이라고 노래한다. 「목련」에는 꽃이 피어있는 시각의 이미지를 청각의 이미지로 바꾸고 ‘부활하는 새떼’에 목련을 비유하여 동적으로 치환하고 있다.


    아니,

     왜 이리 소란스러운가?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여니


     막 부화하는 새떼가

     일제히 햇살 속으로 날아오르고


     흔들리는 가지마다

     그들의 빈 몸이 내걸려 눈이 부시네. 


    -「목련」, 『백년완주를 마시며』에서


  바깥이 시끄러운 이유는 새떼들이 이제 막 부화하여 하늘로 날아오르느라 소란스러웠던 것이다. 활짝 핀 목련을 부화하는 새떼에 비유하여 시각을 청각으로 바꾸었다. 그러면서 가지에 남은 꽃은 새들의 알이 깨어진 껍질에다 비유한 시적 기교가 돋보이는 시이다. 새들이 날아가고 껍질만 남은 공허함을 한꺼번에 지는 봄꽃의 무상함을 간취하게 하는 이 시는 목련 시편들 중에 절창이라 할 수 있겠다. 꽃이 겨우내 추위와 바람을 견딘 끝에 꽃을 피웠듯이 새들도 껍질을 찢는 아픔을 견디어 화려한 비상이 도정된다는 동식물의 생태를 통해 인간의 삶 역시 고통 속에 은총이 있고, 그 고통을 위대한 인내로 극기할 때 승리와 열매가 찾아온다는 삶의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런 꽃들의 자기 연소는 「새삼 꽃들 앞에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저리 빠알간 물결 속으로

     저리 노오란 바람결 속으로

     저리 하아얀 세상 속으로

     온몸을 던지는 저들 꽃처럼


     네 아름다움의 절정에 서 보았는가?

     네 생명의 불길 속에 서 보았는가?


     살아있음의 쓸쓸함으로

     살아있음의 기쁨으로

     살아있음의 불꽃으로

     온몸을 던지는 저들 꽃처럼  


     -「새삼 꽃들 앞에서」, 『상선암 가는 길』에서


  제1연에서 꽃들은 빠알간 물결이 되고 노오란 바람결이 되고 하아얀 세상이 되어 온몸을 던진다. 꽃들을 동적으로 표현하여 연소하는 이들의 아름다움의 절정에 서 보았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리고 그 꽃이 지니는 생명의 불길 속에 서 보았는가라고 반문한다. 이 반문의 반복 속에서 시인은 독자들로 하여금 꽃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불길 속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그러니 꽃들은 살아있음의 쓸쓸함이고, 살아있음의 기쁨이며, 살아있음의 불길이며, 그 속으로 몸을 던지는 분신(焚身)의 이미지를 지닌다. 이 불꽃 같은 연소의 이미지, 몸을 던짐, 분신의 이미지는 연꽃과 닮았다. 진흙에서 영롱한 연꽃을 피워내는 생명의 꽃, 연꽃으로 이미지는 변화된다.


     진흙 속에 뿌리를 내렸어도

     진흙을 뒤집어쓰고 나오는 연화(蓮花)의 얼굴을

     나 역시 보지는 못했소.


     -「여래에게․7」, 『애인여래』에서


  연꽃은 불교에서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는 꽃이요, 불교의 진리를 상징하는 꽃이다. 연꽃은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살지만 연꽃에 진흙을 묻히고 나온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연꽃의 무구성을 표현한 것이다. 「연꽃․2」에서는 연꽃이 지닌 생명성을 산문시 형태로 시인은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나의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생기기 전 세상을 뒤덮고 있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늪 위로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위로 소리 소문 없이 솟아오른, 커다란 연꽃 한 송이가 내내 웅크리고 있다가 조용히 벌어지면서 핏덩이 같은 붉은 해 하나를 게워 놓는다. 순간, 하늘과 땅이 갈라지며, 하늘에선 별과 달이 생기고, 땅 위에서는 온갖 것들이 꿈틀대며 약동하는 소리들로 가득하다.


나는 그 한 가운데에 서있지만 어느새 그가 피어놓은 세상이 때를 다하여 서서히 오므라듦을 내다본다. 그 자궁에서 나온, 어둠과 빛이 빨려 들어가고, 온갖 소리와 형태를 가진 것들이 흡수되어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마침내 세상은 단 하나의 까만 점이 되고 만다. 연꽃 한 송이가 그렇게 피고 지는 순간을 지켜보면서 나는 수없이 연꽃 송이를 가슴에 품고 더 멀리 가는 시간의 수레를 타고 재롱을 떨 뿐이다.


-「연꽃․2」, 『눈물 모순』에서


  한 송이의 연꽃에서 태초의 생명이 태동하고 대지 위의 만상이 약동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시간에 따라 명멸하여 간다. 우주의 자궁에다 비유한 연꽃은 생멸을 관장하는 꽃으로 비유되어 있다. 이것은 연꽃 한 송이가 피고 지는 일과 동일하다. 그러니 연꽃은 우주의 생성과 소멸을 상징하며 어둠을 꿰뚫는 빛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누가 오시려나?

     집집마다 연등 하나씩을

     처마 밑에 내걸어 놓았네.


     안과 밖이 따로 없는

     허공 속에서 붉은 마음 달래려나?

     속내마저 드러낸 채

     목을 빼어

     저마다 한 곳을 바라보네.


    -「연꽃․3」, 『눈물 모순』에서


  연등을 달아놓고 부처를 기다리는 마음은 아마 그의 탄신일을 전후하여 이런 풍경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연꽃은 어둠 속의 빛과 생명, 희망이니 석가의 제자들은 모두 수행, 정진의 마음으로 이 등을 마음의 조명, 청정심, 일심의 바람을 담아 내건다. 어두운 세상의 한 줄기 빛이 되어 오실 세존을 기다리는 중생심을 이렇게 표현하였다고 본다. 그 연등 속에서 “나는 보았네./땅의 눈빛 하늘의 미소.”(「연꽃․4」)라고 하여 대지와 하늘이 하나이며, 삼라만상과 우주가 한 송이의 연꽃 속에 깃들어 있는 이 광경을 시인은 고요 중에서 바라본다. 절대 고요 속에서 한 송이 연꽃이 떠오르는 듯한 이 시는 어떤 경지에 올랐을 때 나오는 선시이다. 시집 『눈물 모순』은 이시환 시인의 구도 여행지인 인디아 기행을 계기로 쓰여진 것이며, 『상선암 가는 길』, 『애인 여래』와 같은 구도의 여정에서 나온 시집 중에 절정에 이른 시기의 것으로, 그의 불교적 사유의 꽃이 피어 있는 시집이며, 그것은 바로 연화이다. 이 연화에 대해서 대승경전의 최상경이라 불리는 『묘법연화경』에서의 묘사를 인용해 보자.


이 때 일월등명 부처님께서 대승경을 설하시니 이름을 무량의라 했으며, 보살을 가르치는 법이요 부처님이 깊이 간직하는 바이었습니다. 이 경전을 설하시고는 곧 대중 가운데서 가부좌를 맺고 무량의처삼매에 드시니,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이 때, 하늘은 만다라꽃, 큰 만다라꽃, 만수사꽃, 큰 만수사꽃을 비처럼 내려 부처님과 대중 위에 흩뿌리고, 널리 부처님의 세계는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습니다. (중략) 이 때, 여래께서는 미간의 백호상으로부터 광명을 놓아 동쪽 1만 8천의 부처땅을 비추시니, 두루 미치지 아니한 곳이 없어, 지금에 보는 이 모든 부처땅과 같았습니다.


(『묘법연화경』, 구인사역편, 대한불교천태종, pp.28-29)


  경전에서는 석가모니 부처가 법을 설하시고 난 뒤에 가부좌를 틀고 무량의처삼매에 드실 때 하늘에서는 ‘법비’라 불리우는 만다라화와 만수사화가 내려왔다고 묘사한다. 그리고 미간의 백호상으로부터 광명을 놓아 부처땅을 두루 비추었다는 내용이다. 이 풍경은 장엄하기 그지없으며 무량의처삼매에 든 부처의 원력으로 종교적 신비를 이루었다는 의미이다. 인디아 기행시집인『눈물 모순』속의 「인디아 연꽃」은 연꽃에 얽힌 오랜 불교설화를 모티브로 하여 연꽃으로 상징되는 부처의 자비가 인도인들에게 어떻게 삶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지를 시적으로 형상화하였다.


     눈이 부셔 바로 볼 수 없네.

     너무나 멀리 있기에

     너무나 높이 솟아 있기에

     가까이 다가가 만져볼 수도 없네.


     다만, 그 커다란 연꽃 송이 위에서

     막 태어난 갓난아이 울음소리 들리고,

     그 연꽃 송이 위에서

     이따금 황금빛 왕관을 쓴

     새들이 날아오르네.


     다만, 그 커다란 연꽃 송이 위에서

     무시로 천둥 번개 치고,

     그 연꽃 송이 위에서

     이따금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반짝거리네.


     하지만 임자는

     그 연꽃 송이 위에 앉아

     명상 삼매에 빠져있네.

     어느 날 운이 좋게도,

     그 연꽃잎 한 장이 떨어져서

     한참을 나풀나풀 지상으로 내려오는데

     그 꽃잎이 땅에 닿자마자

     에메랄드 빛 작은 호수 하나가 생기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내 눈조차 의심할 일이 생기고 마네.


     얼마 후 갈증에 지친 사람들은

     제 눈들을 비비며 사방에서 모여들고,

     호숫가 한쪽 귀퉁이에서는

     목욕재계(沐浴齊戒)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엎드려 기도하고 찬양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신화를 쓰고

     신전을 세우느라 분주하네.


     -2008. 04. 30. 

     「인디아 연꽃」『눈물 모순』에서


 인간의 삶은 그저 먹고 입고 편안히 잠을 자면서 그날 그날의 노동만을 하면서 살아가지 않는다. 의․식․주를 얻기 위해 노동을 하고 노동을 하면서 오는 고단함과 인간의 힘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천재지변이나 인간사에서 자신의 힘으로 어쩌지를 못하는 일이 생길 때 선으로써 극복하게 될 지 또 다른 악덕으로 되갚음을 하게 될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인간이 고난 가운데 약하다는 것은 그만큼 악, 즉 어둠의 수렁에 빠지기 쉬운 존재라는 것이다. 이럴 때 선한 신께 의지하여 선으로써 극복하고 승리할 때 인간의 고난은 지나간다. 소박한 고대의 인도인은 부처의 은덕으로 만들어진 작은 호숫가에 모여들어 기도와 찬양을 하고 신화를 쓰고 신전을 세워서 신을 기린다. 인간이 만든 신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러나 ‘있는 나’이신 분은 영원히 계신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으로써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히브리서, 11장 1-3절)  화려한 꽃들이 아름답고 칭송을 받는 것은 작고 눈에 띠지 않는 야생화가 있기 때문이다. 야생의 풀 한 포기도 소중한 것은 그 작은 것도 크신 임의 손에 의해 창조되었기에 거기에 있는 것으로도 소중하다.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따라서 그것의 용불용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가치판단의 오류에 빠진다. 이시환 시인은 그 풀에 대하여 소박하며 가진 것 없어 때로는 힘 있는 자들의 수탈의 대상이 된 우리 민초들을 비유하고 있다. 「잡풀․1」, 「잡풀․2」, 「잡풀․3」은 봉건사회의 신분제 속에서 피압박 민초들을 잡풀에 비유하여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에서 고통으로 신음하는 하층민의 설움을 노래하고 있다.


     들쭉날쭉

     생김새만 사람이지

     짐승에 다를 바 없어

     사방이 캄캄하여

     뿌리조차 더듬을 수 없는

     이 모양 이 꼴 좀 보소

     밤이 되면

     이슥한 밤이 되면

     거역할 수 없어

     몸뚱이 하나로 누워있는

     소가 되어 소가 되어

     소를 타는 상전나리

     숨찬 고개 넘어가다

     안방마님

     눈치 채는 날이면

     주인 없는 이 몸은

     어이 될꼬 어이 될꼬

     서릿발로 꽂히는 질투

     못 견디어

     끝내는 裸에 쌓여

     강물 속으로 강물 속으로

     강물 되어 흐르는

     안개꽃 바람의 넋

     입을 열지 않고  


    -「잡풀․3」, 『白雲臺에 올라서서』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한 어느 억울한 사연을 가진 하인 신분의 여성이 이 시의 시적 화자이다. 죽어서 구천을 떠돌듯 하는 이 여인은 강물 속으로 수장 당하면서까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다. 입을 봉해진 채로 수장 당하는 이 여인의 비극은 「잡풀․1」의 “가난이란 죄값으로/아내를 저당 잡히고/자식마저 奴와 卑로” 바친 어느 가난한 소작농의 비극적인 죽음과 동일하다. 상전의 죄를 대신하여 옥살이도 곤장도 강요받다가 결국에는 한 생을 마감하는 피어린 설움이 배어난다. 이시환 시인은 잡풀들 속에서 이렇게 주류로부터 버려지고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박탈당한 서민들의 고통을 들었다. 「잡풀․2」에는 달맞이꽃에서 어느 한 늙은 몸종의 슬픔을 “시집가는 아씨 따라/손도 되고 발도 되고/저승문을 여닫는/눈이 되어 귀가 되어/마디마디 속속/이 한 몸 거덜났네”라고 노래하였다. 상전의 딸이 시집 갈 때 몸종으로 따라가 시집살이를 함께 하면서 아씨의 손이 되고 발도 되며 산 세월이 그녀의 손등에 거북이 등껍질처럼 나 있고 몸은 이제 쓸모가 없이 되고 가슴은 텅 비어 있을 뿐이다. 그저 터져 나오는 것은 한숨의 탄식과 눈물뿐이며 의지할 곳 없는 신세를 달맞이꽃에 비유하였다. 「풀잎」에서는 풀잎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 비유하여 하나 되어 가는 ‘우리’로 표현하였다.  


    머릴 들어 위를 보면 하늘이요

     굽어보면 땅이라


     하늘은 언제나

     당신의 마음 속 빈 주머니마냥

     가득 차 있고


     땅은 어디서나

     숨 쉬는 크고 작은 것들로

     텅 비어 있다


     이 거짓말 같은 참을

     거듭거듭 깨달으며 살아가는

     우린 우린 이제

     마시지 않고 취하는 법을 꿈꾼다


     채워도 채워도 차지 않는

     우리들의 가슴 속

     저마다의 잔을 기울여 비우고

     그득한 하늘을 바라 눕는고


     마침내

     하나가 되어 흘러가는

     우리는.     

                        

     -「풀잎」, 『바람序說』에서


  들판에 가면 이름 모를 많은 풀들이 나있다. 그 풀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돋아나서 커간다. 그러나 그 풀들은 풀만큼의 키로만 큰다. 키가 작은 풀과 키가 큰 풀, 중간의 것들, 꽃을 피우는 풀들과 꽃을 피우지 않는 풀들이 나있다. 이 풀들은 그저 봄이면 돋아나 산천을 푸르게 하다가 서리를 맞고 스러져 간다. 풀잎에 구르는 이슬도 태양이 떠오르면 사라지고 만다. 특별히 우리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면서도 풀들은 봄이 되면 어김없이 돋아난다. 우리네 사람들도 뭔가로 가득 채워보려고 애를 쓰며 살아가지만 다만 풀잎처럼 사라져 간다. 마음은 공허하고 텅 빈다. 그러니 하늘을 바라보고 누울 수밖에 없는 삶이다. 하늘을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우리들에게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네 삶이 그렇듯 풀잎도 그런 존재이다. 인간의 욕망은 채워도 채워도 공허할 뿐이므로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풀들이 하늘을 바라보고 자라듯이 우리 인간도 하늘을 바라볼 때 충만 되며 모두 풀처럼 하나가 되어 흐를 수 있다. 바람이 불면 풀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바람 부는 대로 눕는다. 그 중에 어느 풀이 반대로 눕는 일이 없다. 풀잎은 모두 비어 있기에 생명의 근원인 바람이 부는 대로 눕는다. 이것은 생명이 흐르는 이법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만유는 이 이법에 의해 운행되고 있다. 시인의 눈은 그 보이지 않는 세계의 작은 것들이라도 우리에게 열어서 보여준다. 성경의 다니엘서나 요한묵시록 같은 묵시문학은 바로 가려져 있는 것을 열어서 드러내어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묵시문학이라 불리우고, 우리 눈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현현하여 주는 것이다.

  이시환 시의 식물 이미지 중 나무는 꽃과 더불어 주요 기둥을 이루고 있다. 먼저「가시나무」에서 ‘나’는 갈증의 불길 속으로 던져지는 가시나무로 투사되고 있다.


    가시나무, 가시나무,

     나는 가시나무.


     비 한 방울 들지 않는 사막 가운데

     홀로 사는 가시나무.


     가시나무, 가시나무,

     나는 가시나무.


     나귀 한 마리 쉬어갈 수 있는

     한 조각 그늘조차 들지 않고,


     작은 새들조차 지쳐

     깃들기도 어려운 가시나무.


     가시나무, 가시나무,

     나는 가시나무.


     마침내 갈증의 불길 속으로

     던져지는 가시나무.


     가시나무, 가시나무,

     나는 가시나무.                  


     -「가시나무」, 『몽산포 밤바다』에서

 

  가시나무는 물이 부족하여 생물들이 살기 어려운 사막에서 살기 때문에 키도 크게 자라지 않고 덤불처럼 가시를 잔뜩 달고 살아간다. 잎도 작고 많이 나 있지 않아서 그늘이 되지도 못하고 가지가 튼튼하지 못하니 새들도 둥지를 틀지 않으며 쉬어갈 곳도 없다. 다만, 물이 부족하여 ‘갈증의 불길 속으로 던져지는 가시나무’라는 표현에서와 같이 생명수를 그리는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고 그 불길에 휩싸인 나무이다. 재목도 되지 못하고 인간이나 짐승이 쉬거나 깃들 수도 없는 불모지의 ‘떨기나무’ 같은 쓸모없는 나무이다. 그러니 불길 속으로 던져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존재이다. 이 시는 시인의 철저한 자기 응시이다. 자신이 이런 나무라고 전체 8연 중 1, 3, 6, 8연에 네 번이나 반복하여 되풀이하고 있다. 이 시를 읽으면 이 반복되는 4개 연에 의해서 시인과 독자는 울게 된다. 인간은 불속에 던져지는 가시나무가 아니고 키가 크게 자라고 잎이 무성하며 많은 가지들에 바람을 날리며 새들을 깃들게 하고 사람을 쉬어가게 하는 기쁨과 충만의 나무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 가시나무에는 그런 충만의 기쁨이 없고 갈증의 극단에서 절망과 철저히 유리된 고독 속에 죽어가는 가시나무이기 때문에, 그런 나의 피맺힌 고백과 절규이기에 독자들에게 더 크게 울림이 온다. 그들에게도 자신이 가시나무인지 아닌지를 생각하게 하면서도 어쩌다가 이런 나무가 된 불쌍한 처지의 자신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며 부정적인 자기를 넘어 긍정적인 자기상을 확립해 나가야 함을 시인은 말하고 있다.

  「어느 느티나무 앞에서」에는 “너는 평생을 이곳에 붙박여 살았어도/고작 햇살과 바람과 물만으로도/봄 여름 가을 겨울 낮과 밤의/삼백 년 영화를 이미 누렸거늘/그 비결이 무엇인고?”라고, 삼백년 넘는 느티나무에게 그 비결을 묻는다. 불필요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두터운 땅과 깊은 하늘의 축복을 받아 그저 햇살과 물과 바람으로도 삼백년을 건재한 느티나무에게 시인은 경의를 표한다. 「단풍나무 아래서」는 “오늘은 내가 여기 앉아 쉬지만/내일은 다른 이가 앉아 쉬리라.”라고 짧은 경구 같은 시 속에서 사람에게 그늘을 주는 넉넉한 단풍나무에게 시인은 매료되다가 「어느 단풍나무 한 그루」에서는 단풍 든 나무를 분신(焚身)하여 자기를 던지는 사람으로 바라본다.


나도 어쩔 수 없네./이 몸조차 주체할 수 없어/그냥 내버려두었네./세상 천하 가운데에서/저 홀로 다 타버리도록/그냥 내버려두었네.//시방 분신(焚身)하는 단풍나무 한 그루.


-「어느 단풍나무 한 그루」, 『몽산포 밤바다』에서


  이시환 시인은 이 시에다 부쳐놓은 자신의 소감을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문학적 진실과 실재하는 그것이 너무나 다름을 절감할 수 있었고, 허상 같은 내 삶이 미워지기까지 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그 이유는 1998년 2월부터 격월간 동방문학을 창간하여 만 8년을 펴내오면서 경험한 심산이었다. 지친 나머지 돌연 폐간 선언을 하고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심신의 피로를 씻었다. 그 과정에서 성경과 꾸란, 불경을 읽으며 종교적인 에세이집을 간행했고 인디아 기행시집인 『눈물 모순』과 연꽃 앤솔러지 『연꽃과 연꽃 사이』를 펴냈다.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서 오는 공허감과 피로를 종교적 경전을 탐독하고 순례의 여행을 떠나면서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그것들과 싸웠다. 그런 몸부림 중에 중국의 어느 자연공원에서 본 단풍나무 한 그루에 시선이 사로잡히는데 나름대로 문학을 위해서 살아온 그의 삶이었기에 분신하는 한 그루 단풍나무를 보며 위로를 얻었다고 한다. 생즉필사 사즉필생! 이럴 때 이 말이 적확하리라. 자기부정과 자기희생 없이는 이 고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대숲에서」는 바로 고뇌 중의 시인에게 자연은 말없이 고뇌를 넘는 비법을 가르쳐 준다.


     나는 보았네.

     나는 보았네.


     돌연, 바람이 불어와

     키 큰 대나무들이 휘어

     저 달을 가려도

     나는 보았네.

     나는 보았네.


     커다란 대나무가 부러질 듯 휘어도

     깊은 대숲은 고요하기 이를 데 없음을.


     네 푸르름 싱그러움 앞에서

     네 고요 네 적막 속에서


     나는 한낱 깃털처럼 가벼이

     들어 올려지는 것을.              


     -「대숲에서」, 『몽산포 밤바다』에서


  대나무는 곧게 자라지만 속이 비어있다. 속이 비어있기 때문에 바람이 불어와도 대나무는 부러지지 않는다.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릴 뿐이다. 그 고요와 적막 속에서 대나무는 한층 더 가벼워져서 부러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탄력을 지닌다. 이 광경을 시인은 “나는 보았네”라고 2개 연 4행에 걸쳐 반복하고 있다. 시인은 드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는 보았네”라고 반복한다. 그리고 그 광경만 본 것이 아니라 대나무가 부러질 듯 바람에 휘어도 고요하고 적막하기만 한 그 푸르름에 싱그러움에 시인의 마음도 몸도 깃털처럼 가벼이 들어 올려지는 것을 느낀다. 깃털처럼 가벼워 질 때 들어 올려질 수 있고 무거운 어둠들을 털어버리고 고뇌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대나무는 자신의 몸을 비웠기 때문에 바람을 따라서 흔들릴 수 있고 꺾이지 않는다. 이것은 자연의 이법이다. 그 이법 속에서 시인은 비워진 자신을 느끼고 대무나무와 하나가 된다. 「서 있는 나무」에서 시인은 그를 둘러싼 세상의 어떤 조롱과 멸시, 억압과 시련, 생명을 앗아가는 고통이 따를지라도 서 있는 나무는 죽어서도 서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서 있는 나무는 서 있어야 한다. 앉고 싶을 때 눕고 싶을 때 앉지도 눕지도 못하는 서 있는 나무는 내내 서 있어야 한다. 늪 속에 질퍽한 어둠 덕지덕지 달라붙어 지을 수 없는 만신창이가 될 지라도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을 봉할지라도, 젖은 살 속으로 매서운 바람 스며들어 마디마디 뼈가 시려 올지라도 서 있는 나무는 시종 서 있어야 한다. 모두가 깔깔 거리며 몰려 다닐지라도, 모두가 오며가며 얼굴에 침을 뱉을지라도 서 있는 나무는 그렇게 서 있어야 한다. 도끼자루에 톱날에 이 몸 비록 쓰러지고 무너질지라도 서 있는 나무는 죽어서도 서 있어야 한다. 그렇다 해서 세상일이 뒤바뀌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일이 뒤바뀌는 건 아니지만 서 있는 나무는 홀로 서 있어야 한다. 서 있는 나무는 죽어서도 서 있어야 한다. 


-「서 있는 나무」, 『안암동 日記』에서


  나무는 하늘을 향해 직립한다. 이것이 나무가 지닌 생태의 본질이다. 이 시는 “서 있는 나무는 서 있어야 한다”라는 시구절의 반복을 통하여 어떤 고난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는 굳건한 자세로 살아가야겠다는 시인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우리 사회의 시인은 이런 자세로 그를 둘러싼 상징계와 길항하여야 할 것이다. 그 속에서 시인은 조롱, 멸시, 억압을 받을지언정 서 있는 나무가 서 있듯이 사회적 정의와 인간과 우주만물의 존엄함, 그 안에 깃들어 있는 영원한 생명, 보편적 진리를 외쳐야 한다. 서 있는 나무가 서있어야 하듯이, 시인이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을 때 그의 시가 더욱 빛날 것이며 세상은 바뀌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