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환의 시법 : 부드럽게 생동하는 이미지들
-④광물이미지
심종숙(시인/문학평론가)
시인은 늘 자신의 외부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물이나 동식물, 인공물, 사람들, 그리고 눈으로 직접 보기는 어렵지만 망원경으로 바라보는 우주의 별들 속에 있다. 이 삼라만상과 인공적인 사물을 그의 주위에다 두고 시인은 자신의 내부의 세계를 말하기 위하여 이것들을 끌어온다. 그러니 시인의 눈이 그것을 바라보되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지어 구조화하느냐는 시인의 몫이 될 것이다. 하나의 대상을 두고 시인들마다 다르게 관계를 맺는 이유는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살아온 경험과 사유 방식에 따라 다양하게 대상과 관계 맺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아스펙트상은 ‘~로서 보다’라는 관계 맺기의 구조이다. 그러니 대상을 무엇으로 보고 어떻게 관계 맺어지느냐에 따라 동일한 대상이어도 관계 맺는 내용의 다양성에 따라 시인 각자의 개성을 지닌 시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어디까지나 주체의 입장에서 객체를 바라보는 것이라면 객체의 입장에서 주체에게 말을 걸어오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대상을 두고 주체를 투사하는 방식이 근대의 방식이라면 현대의 시인은 말을 걸어오는 대상과 소통을 하여 공감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주체의 마음은 늘 비워져 있어야 한다. 비워져 있지 않으면 늘 대상에 대한 주체의 투사로 대상의 본질은 가리게 된다. 주체를 비워 대상을 바라볼 때 대상은 자기의 말을 해 온다. 자신의 본질을 바라보게 한다. 근대의 대상들은 주체의 폭력적 점유, 구속, 오도로 얼룩져 있다. 대상을 가두는 주체의 힘의 남용은 대상들을 부자유스럽게 하고 대상들이 지니는 본질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였다. 물론,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는 주체의 일방적인 고백이나 대화가 아니라 대상으로부터 오는 것을 읽어내려는 주체의 노력에 기인한다. 자연물이나, 동식물, 인공물, 사람들, 우리들의 의식세계, 기억을 바라보고 그쪽에서 오는 메시지를 읽고 소통하려는 태도는 어디까지나 주체가 올바른 관계 맺기를 통하여 가능해지는 마음의 작업일 것이다.
우리 주위에 나뒹구는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메시지를 품고 있고, 그것을 주워드는 사람은 그 돌멩이와 관계 맺기가 이루어진다. 돌멩이를 귀에 갖다 댄다. 이 돌멩이의 소리를 듣는다. 돌멩이는 그 장소에서 사람과 조우하기 전에 큰 바위의 일부였을 것이다. 그것이 쪼개어져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다 보니 그렇게 둥글둥글한 모습을 갖추어 부드럽게 손에 잡혔을 것이다. 이 돌멩이는 큰 바위로부터 쪼개지고 떨어져 나오는 아픔을 겪었을 것이다. 그 바위는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해면이 융기하여 태산준령을 이루었다가 오랜 비바람에 씻기어 몇 덩어리로 깨어졌거나 그 일부가 떨어져 나왔을 것이다. 그것이 비에 쓸려 계곡물을 따라 강에 이르러 돌이나 자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대하의 흐름을 따라 물의 힘을 받으면 강의 모래알이 되거나 바다의 모래알로 부수어질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장구한 세월이 흘렀겠는가. 이 돌 하나의 역사가 이렇게 유구하니 산천은 얼마나 많이 변하였으며, 인간의 문명 또한 얼마나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였겠는가. 생성된 모든 것이 명멸해 가지 않는 것이 없다 하였다. 다만, 시간이 장구하게 흐를 뿐이다. 대하나 바다의 모래알들도 더 시간이 지나면 먼지가 되어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대기로 우주로 날리거나 그 흔적조차 사라져 버린다. 그러니 불교에서 말하듯 삼라만상은 모두 명멸하고 만상동귀라 하였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공하다고 하였다.
바위나 돌에는 그저 평범한 것도 있지만 시장에서 값이 나가는 귀한 보석도 있다. 이 보석들은 모두 지층에서 매장되어 있을 때에 지층의 운동에 따라 생긴 결정체들이다. 시에서 광물이미지는 바위, 돌, 모래를 비롯하여 화려한 색깔이나 모양을 지니며, 아주 단단한 결정체를 가진 보석류, 철, 주석, 납 등과 같은 금속류 광물들이 이미지를 이룰 때이다. 이 광물류의 모양이나 색깔, 특성에 따라 시적 이미지를 만든다. 그것은 시인이 어떤 상상이나 비유 -직유, 은유- 를 할 때 그 특성에 맞는 광물을 기억으로부터 불러와서 자기의 시에서 관계를 맺어 구조화하는 것이다. 시인의 이 시적 행위는 섬세한 지적 작업인 동시에 영적인 작업이 된다. 영적인 작업이라는 의미는 광물이 지니는 속성이나 본질을 깨닫고 그것을 시에서 이미지를 형성한다는 뜻으로, 자연이나 우주적 몽상에서 오는 영감이 있어야 한다. 바위, 돌, 모래는 자연물의 광물 이미지이며, 보석류는 시에서 이미지를 한층 섬세하거나 미적으로 탁월하게 이미지를 조형하며 고귀하고 영원성을 지닌다. 그것은 보석류 광물이 지니는 특성이다. 보석류 광물은 주로 아름다운 미적 이미지, 견고성, 영원성, 고귀함을 지닌다. 그리고 금속류 광물은 차가움, 저항성과 둔중함, 견고함을 지닌다. 만해 한용운의 시집 『님의 沈黙』에는 님과의 사랑의 맹세를 ‘황금의 꽃 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라고 비유하여 황금의 특성이 지닌 빛남과 견고성, 불변성, 영원성을 사랑의 옛 맹세에 비유하고 있다. 그밖에도 이 시집에는 시적 화자의 자기 성찰이나 님이 떠나가고 님을 기다리는 비탄과 탄식, 눈물을 진주에 비유하여 ‘진주 눈물’이라고 표현하거나 님을 기다리는 시적 화자 자신이 아공(我空)으로 되어가는 경지를 수정이나 금강석(=다이아몬드)에다 비유하여 영혼의 투명성과 견고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반대로 님과 나의 합일을 훼방하는 장군이나 ‘나’를 나라도 없고 민적도 없으며 인권도 없는 처지로 만든 일제에 대해서는 ‘칼’로 비유되는 차가움, 견고함의 이미지를 조형하여 만해 시 특유의 저항성을 드러내고 있다. 일본의 시인 미야자와 겐지(宮沢賢治, 1896-1933)의 경우는 그의 시나 동화에서 보석류의 광물의 이미지를 조형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작가가 어릴 때부터 돌 채집이 취미였으며, 나중에 자연과학을 배우는 학도였다는 점과 보석상의 꿈도 있었던 자전적인 요인도 있으며, 불경에 심취하고 행자였기에 불경의 진리를 비유하기 위해 보석 이미지로 쓰고 있기 때문에 그 영향이 깊었다고 한다.
이시환의 시에서 주로 등장하는 광물 이미지는 바위, 돌, 모래이다. 보석류에 비해서 아름답지도 않지만 자연물 그대로인 이 이미지는 변화무쌍한 시간과 공간, 신의 메시지(말씀, 생명, 숨)를 간취하게 한다. 그 외에는 이미지를 구성하기보다 시행에서 부분적으로 쓰이는 경우로, ‘금강석보다 더 단단한 적막(寂寞)조차도/산산조각이 나고 만다’(「무서운 태풍」)가 있다. 삼라만상들을 사라지게 하는 파괴력을 지닌 바람의 위력을 이야기 하는 시에서 내적인 적막도 산산조각 내어버리는 위력을 지니며, 그 적막은 보석류 광물 중에 결정도와 강도가 제일 높은 다이아몬드에 비유하고 있는 표현이다. 그리고 철의 가공품인 칼을 소재로 하거나 호미를 소재로 한 시 - 예를 들어, 「칼」, 「호미」, 「조선낫」과 같은 시편들은 민중의 고단한 삶과 저항성을 내포- 가 있다.
먼저, 자연 광물인 바위, 돌, 모래는 그의 시에서 어떤 이미지로 조형되고 있는지 알아보자.
하, 인간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구나.
문득, 이 곳 중선암쯤에 홀로 와 앉으면
이미 말(言)을 버린,
저 크고 작은 바위들이 내 스승이 되네.
-2004. 7. 26. 01:46 「상선암 가는 길」전문,『상선암 가는 길』에서.
자연의 크고 작은 바위들은 이 시에서 화자는 말을 버렸다고 한다. 바위의 침묵을 말을 버렸다고 의인화하여 표현한 이 시는 시인의 묵상, 관상의 여정으로 들어가는 시집『상선암 가는 길』의 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는 시이다. 그 말을 버린 바위처럼 시인은 묵상과 관상의 여정을 걸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그 바위들이 자신의 스승이라고 밝히고 있는 시이다. 이 시가 『상선암 가는 길』의 첫 시편으로 놓여진 이유도 바로 그러하리라. 시인은 말없는 자연을 통하여 서로 대화하고 그의 고요와 적막, 적요를 향한 내적 여정의 스승으로 삼았다. 자연 속에 깃들어 있는 신의 메시지를 들으려면 인간세상과 같은 시끄러운 곳을 피하여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시인은 ‘인간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구나’라고 한탄한다. 이 소음을 피하여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이라는 암자의 이름들은 곧 바위가 있는 자리로 그의 내적이며 영적 여정이 바로 하선암, 중성암, 상선암을 올라가는 것처럼 점점 더 고요의 세계로 침잠하고, 사막에 와서는 정화와 재생의 의식을 치르는 단계로 이어지는 과정의 초입에 이 시가 놓여져 있다. 그가 이렇게 내적 영적 여정으로 불가피하게 들어가는 이유는 「콩나물 기르기」에서 침묵을 강요하는 한 통속의 세상이 그를 억압하였기 때문이다.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는/저 밑도 끝도 없는, 무성한 말들!/분명, 저 무성한 말들이 눈을 초롱초롱 뜨고 있는/한반도의 어둠 속에는/화려한 수사(修辭)도, 궤변도, 논리도,/인간의 오만도, 눈물도, 진실도/그것들의 함정도 뒤섞여 있으리라.//저들의 목이 마르기 전에 충분히, 자주 물을 주어야/쑥쑥 길게 자라나는 콩나물이 되듯이//저들에게 실명(失明)게 하는 햇빛을 주면/푸른 싹을 내미는 자기 모반을 꾀하듯이//저들에게 때맞추어 물, 물을 주지 않으면/앞 다투어 잔뿌리와 실뿌리를 숱하게 뻗어내려/마침내는 서로 엉켜 붙어 한 통속이 되어 버리듯이/인간 세상의 무성한 말들이 무성한 말을 낳아/빽빽한 콩나물시루 속 같은,/숨쉬기조차 어려운 한 통속의 침묵을 강요하네.
-2003. 3. 30. 21:32「콩나물 기르기」전문,『상선암 가는 길』에서.
시집의 마지막 부분에 놓인 이 시는 실로 무서운 시라는 인상이다. 와글대는 인간의 소리, 주의․주장이나 논리, 궤변들이 콩나물시루 같은 무리를 이루어 자기네들끼리 뭉쳐 다니며 자기들과 다른 주의․주장과 말에는 관심이나 존중, 차이를 인정함 없이 일방적으로 힘을 행사하여 폭력을 낳는 한반도의 암울한 어둠의 일면을 시루 속의 콩나물에 비유하여 야유와 조롱, 냉소, 조소를 보내는 이 시는 아이러니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침묵을 강요하는 한국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이렇게 표현한 시인이 누가 있었던가. 시인은 아마 우리의 사회, 문단이나 세상사에서도 이렇게 느꼈기에 침묵을 강요하는 그 분위기 속에서 홀로 내적 영적 여정을 걷는 것이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폭압적인 현실을 등 뒤로 하고 그는 구도의 여정을 걸음으로써 현실에서 느끼는 실망감과 상대적인 박탈감을 구도의 여정으로 허전하고 상실로 인한 아픔을 치유, 정화하고 재생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고인돌․1」,「고인돌․2」,「고인돌․3」,「고인돌․4」,「새해 아침에-고인돌의 傳言」에 오면 오랜 시간이 지나고 바위에서 떨어져 나온 거대한 고인돌을 바라보면서 연작시편 4편을 쓰고 있다. 이들 시편에서 고인돌의 침묵, 인간의 욕망, 소박한 믿음들을 고인돌을 통하여 이미지화 하고 있다.
어디선가 굴러온,/생긴 그대로의 사투리 같은 투박함으로//천년의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깨어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을 단단함으로//죽은 자의 권위와/산 자의 힘을 과시하는 단순함으로//모여 사람 살던 곳에 세워진/믿음 하나.//얼핏, 지나치면 모를까/귀를 주고 눈길 주면//비로소 말문을 여는/먼 옛날 옛적의 소박한 우리네.//그저 깬돌이거나 간돌에 지나지 않건만/그저 그것으로 세우고, 괴고, 깔고 덮어서//수 천 년 전 이 땅에/모여 사람 살던 이야기보따릴 숨기고 있네.//얼핏, 지나치면 모를까/마음 주고 체온 나누면//멎은 피가 다 도는/먼 예날 옛적의 우리네 믿음 하나.
-「고인돌․2」, 『상선암 가는 길』에서
인간이 신에게 의탁하고 경배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현대의 물신주의나 상업화된 소비사회에 신은 하나의 상품으로 거래되거나 교환되는 풍조이다. 그러나 이 「고인돌」시편에서 시인의 눈은 무엇을 바라보는가? 그는 원시의 소박하고 꾸밈없는 인간의 모습을 바라본다. 그저 천재지변에서도 불편함 없이 먹고 살아가고 자녀를 낳고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소박한 소망을 신께 의탁하기 위해 신의 숨결을 담아 머물게 하려는 집인 고인돌을 세웠다. 훨씬 나중의 종교건축들처럼 화려하거나 장엄하거나 기교적이지 않아도 소박한 그대로 인간의 원의가 말없이 담겨있고 거기에 내재하는 신을 시인은 고인돌을 통해 바라본다. 그러면서 이 고인돌의 이미지들도 고인돌이 가르쳐주고 시인에게 메시지를 보내주고 시인은 그것을 착신하여 시를 쓰고 있다. 인간 스스로 신이 되어 권력을 휘두르고 말과 주의․주장도 소유화하고 그것을 일방적으로 행사하는 폭압의 시대에 고대인들의 소박한 신에 대한 경배와 믿음, 서로 따뜻하게 품어주며 어울렁 더울렁 살았던 그들에 대한 친밀감과 숨결을 느낀다. 그래서 시인은 「고인돌․3」에서 더 간명하고 더 투명하게 고인돌을 노래한다.
수 천 년 전의 바람이 깃들어 있고
수 천 년 전의 구름이 깃들어 있는,
수 천 년 전의 어둠이 고여 있고
수 천 년 전의 햇살이 고여 있는,
수 천 년 전의 사람과 사람의,
힘과 믿음과 소망이 숨 쉬고 있는,
가장 무겁고, 가장 단단한 침묵의 말씀이여,
그 말씀의 하늘이시여, 땅이시여.
-「고인돌․3」,『상선암 가는 길』에서
‘수 천 년 전의’라는 반복 구절을 통하여 시인은 고인돌이 등장했던 석기시대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그 시공 속에서 바람과 구름과 빛과 어둠이, 사람과 사람의 발자국이, 그들의 힘과 믿음, 소망이 깃들어 숨 쉬고 있는 말없는 고인돌 앞에서 시인은 가장 무겁고 가장 단단한 침묵의 말씀을 듣는다. 그 말씀은 하늘이자 땅이며, 인간과 우주를 지은 신의 말씀이다. 그런 고인돌은 「고인돌․4」에 오면 ‘단단함으로/무거움으로/불변함으로/그런 단순함으로/온전한 상징이요 언어가 되는/돌 가운데 돌.’이며 ‘온전한 존재요 생명이 되는 돌 가운데 돌이라.’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러니 돌은 시인에게 상징이며 진실한 언어가 되고 온전한 존재이며 생명이 된다. 왜냐하면, 고인돌은 ‘죽은 자의 집도 되고/산 자의 안녕을 지켜주는 신이 되어/다시 태어나는 너’이기 때문이다. 「새해 아침에-고인돌의 傳言」에 오면 ‘단군의 후손들이여,/넘치는 지혜의 샘물을 쏟아내고,/정열의 장작더미에 불길을 지피고,/반도땅에 흐르는 피를 더욱 뜨겁게 하라.’고 고인돌의 전언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대신 전하고 있다. 고인돌은 큰 바위가 비바람에 파쇄되어 나오는 광물이나 그 바위에서 더 시간이 흘러 만들어 지는 것은 작은 돌이다. 이시환 시인은 이 지수화풍의 자연의 이치를 알고 거기에 따라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이동하면서 이미지를 조형하였고, 그것이 모래에 이르게 되나 나중에 공으로 모든 것이 돌아감을 이야기 하여, 불교적인 무상이나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공사상을 이 자연물을 통하여 반영하고 있다. 작품 「조약돌」을 읽어보자.
작은 조약돌 하나 손에 꼬옥 쥐고서
지그시 눈을 감으면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너의 숨소리 들려오고,
아득히 먼 때로부터
너의 심장이 고동치는 체온이 전이되어 오네.
밤하늘의 별과도 같이
바닷가에 무리지어 네가 있음으로
세상은 비로소
살아 숨 쉬는 것들로 가득 차있고,
그것으로서 세계가
한 덩어리임을 일러주네.
-2004. 11. 2. 11:20「조약돌」전문,『백년완주를 마시며』에서.
바닷가의 작은 조약돌 하나에서 시인은 태고의 숨소리와 심장이 고동치는 체온을 느낀다. 이 돌들이 바닷가에 무리 지어 있음으로 세상은 살아 숨 쉬는 것이며, 그것으로 세계가 한 덩어리임을 알려준다. 이 조약돌은 시인이 찾아간 바다만이 아니라 이 지구 전체에 여기 저기 있다. 그것들은 원래 커다란 바위였다. 그 바위의 파편이 조약돌이다. 그러니 무수한 조약돌의 무리는 거대한 하나의 바위에서 나온 것들이니 세계는 하나였다는 의미이다. 이 시에서는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상상이 옮겨지면서 세계가 각각 파편화된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인식을 갖게 한다. 현대사회의 파편화된 세태는 오랜 시간 전에 하나였던 때로 되돌아가야 함을 시인은 말하고 있고, 그 때의 숨과 따뜻한 체온이 그리운 심정을 이 시에 담았다고 하겠다. 시야말로 파편화된 현대 사회의 부정적인 양상을 복원해줄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이 시에서 그런 긍정적인 힘을 시인은 바라보며, 작은 조약돌에서 그 메시지를 읽고 있다. 작품 「돌」에서는 ‘작은 돌멩이 속에 광활한 사막이 있고, 그렇듯 사막은 하나의 작은 돌멩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며 상즉상입하는 자연물인 돌의 본질을 이야기하면서 바위, 돌, 모래가 모두 상즉상입하면서 하나인 광물임을 분명히 하고, 그 깨달음에서 그의 광물 이미지 조형의 절정을 이루고 특성을 보여준다.
아직도 내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수수만년
모래언덕의 불꽃을 빚는
바람의 피가
돌기 때문일까.
아직도 내 눈물이
마르지 않는 것은
수수억년
작은 돌멩이에 하나의 눈빛을 빚는
바람의 피가
돌기 때문일까.
-「돌」전문,『몽산포 밤바다』에서.
이 시의 제목 밑에 시인은 돌과 사막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이렇게 적고 있다. “작은 돌멩이 속에 광활한 사막이 있다. 그렇듯 광활한 사막은 하나의 돌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우주는 마이크로코스모스와 미크로코스모스라고 우주론자들이 말한다. 그것과 같이 이 시에서는 모래는 돌이고 돌은 모래이다. 하나의 돌에도 광활한 사막이 있고 사막의 수많은 모래알은 하나의 돌이다. 그러니 시인의 가슴은 두근거린다. 수수만년 시간의 흐름에 가슴이 두근 댄다. 그 모래가 만들어 지는 과정의 돌의 불꽃을 바라본다. 그 불꽃이 일어남은 바람의 피가 돌았기 때문이다. 바람이 없었다면 비도 내리지 않고 바위의 파쇄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주만물을 순환시키는 거대한 생명력은 곧 바람일 터 시인은 돌에서 모래를 바라보며 모래에서 돌을 바라보며 그 속에 부는 바람의 피를 본다. 그 바람의 피가 돌기에 수많은 돌들은 모래가 되어 거대하며 적막하고 인간에게는 극복의 대상이며, 옛 은수자들에게 세상 것을 버리고 신을 찾아 오직 신에게 의탁하여 들어가 수행정진하면서 신의 메시지를 읽고 인간에게 전하였던 바로 그 사막이다. 시인은 바로 그 사막의 여정에서 옛 은수자들처럼 자기 정화와 재생을 꿈꾼다.
이시환의 광물 이미지는 모래의 집합체인 사막에 와서 그 이미저리들이 서로 엉켜서 거대한 울림을 낸다. 그것이 바로 ‘사막(沙漠)’이다. 사막은 그의 광물 이미지의 절정이다. 그래서 그는 사막을 남성 혹은 여성으로도 비유하고 있으나 「사하라 사막에 서서」에서는 사막에서 정화의 주체인 자신을 여성성으로 이미지를 조형하고, 그 사막에서 알몸을 씻음으로써 씻김 의식을 치루어 정화와 재생을 통한 새 생명력을 복원하고 있다. 이 사막은 신과 같은 남성성을 지닌 사막이며, 시적 화자인 시인은 여성이다. 아주 아름답고 고요한 침묵 가운데에 이루어지는 이 의식은 참으로 독자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그의 시의 힘은 바로 모래알의 점성과 같이 단단하고 응집력이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남성성과 여성성을 고루 구비하여 생동하고 있다고 하겠다. 「사하라 사막에 서서」를 인용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일 년 삼백육십오 일 내내/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이곳에/서 있는 산은 서 있는 채로/누워 있는 돌은 누운 채로/깨어지며 부서지며/모래알이 되어가는/숨 막히는 이곳에/아지랑이 피어오르고/간간이 바람 불어/모래알 날리며/뜨거운 햇살 내려 쌓이네./수수만 년 전부터/그리 실려 가고/그리 실려 온/바람도 쌓이고/적막도 쌓이고/별빛도 쌓여서/웅장한 성城 가운데/성을 이루고/화려한 궁전 가운데/궁전을 지었네그려./나는/그 성에 갇혀/깨끗한 모래알로/긴 머릴 감고,/나는/그 궁전에 갇혀/순결한 모래알로/구석구석 알몸을 씻네./검은 돌은/검은 모래 만들고/붉은 돌은/붉은 모래 만들고/흰 돌은/흰 모래를 만들어내는/이곳 단단한/시간에 갇혀/나는 미라가 되고/이곳 차디찬/ 적막에 갇혀/그조차 무너지고 부서지며/마침내/ 진토(塵土) 되어/가볍게 바람에 쓸려가고/가볍게 별빛에 밀려오네.
-「사하라 사막에 서서」전문, 『몽산포 밤바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