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무와 군무로 구성된 무용계의 중진들의 이날 공연은 춤 본(교과서)을 정독하는 듯한 진지함과 몰입의 열정을 보여주었다. 심원(深源)의 걸작들은 다양한 방법론으로 춤의 가치를 증명해 보였다. 한국 춤의 전통은 도도한 색조와 격의 상급을 제시하고, 춤 철학의 심오한 깊이감으로 관객들로 하여금 체계적 춤 지식을 전수하고 있었다.
한윤희는 군무의 시각적 비주얼로 ‘원소스 멀티유스’로의 확장을 몸소 보여주었다. 고통 분담이라는 수사법을 구사하여, 거대 질서 속에 자신을 찾아가는 작업은 즐기는 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양 있는 소비자들의 시선에 걸린 그녀의 ‘가사호접’은 가치판단의 상점을 차지한다. 그녀가 세관(細觀)구사해낸 춤은 경험 이상의 깊은 철학적 구성인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출연: 김다애, 김은진, 김인애, 김정민, 박동아, 배윤주, 송윤서, 우현희, 윤시진, 이세이, 이연정, 조혜령, 지선화, 고아라, 권채영, 김은채,배서연, 오예진, 조소담, 조은주, 김현지A, 김현지B, 박가영)
●한윤희: 용인대학교 문화예술대학 무용과 교수, 중요무형문화재 재92호 태평무 이수자, 우리춤협회 부이사장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정재만류)는 한국춤의 백미이다. 승무는 한국 춤사위를 총 집대성해 놓은 춤으로써 질량의 확대가 크며 공간 구성미가 아름답다. 종교적 색채를 지닌 제의적 춤으로 천지인(天地人) 삼재 사상이 내재된 담백한 절제미를 보여준다. 춤의 사군자 중 대나무에 비유되는 ‘승무’는 한성준-한영숙-정재만으로 전해진다.
민성희의 ‘승무’는 그녀 자체의 몸 구성에서 나오는 유연성, 전통을 바탕으로 자신이 구성한 내면의 심리묘사에서 나오는 독창성, 노련한 춤 기교가 돋보이는 고귀한 숙명의 춤은 폭풍우가 끝난 뒤의 아침고요 같은 매력을 소지하고 있다. 성숙으로 치닫는 그녀의 춤은 스승들의 정신을 잇고 있는 남다른 노력이 솔직하게 드러나 보인다.
●민성희: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이수자, 부산대학교 이학박사, 서울종합예술대학교 겸임교수, 제39회 부산동래전국전통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
『태평무』(정재만류)는 한성준에 의해 착안되어 손녀 한영숙에게 전수된 춤 이다. 난(蘭)에 비유되는 이 춤은 왕비가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며 추는 춤이다. ‘태평무’는 한성준-한영숙-정재만으로 이어진다. 한영숙의 ‘태평무’는 활옷 속에 당의를 입고 한삼을 끼고 추다가 후에 당의만 입는 춤으로 발전된다. 정재만은 활옷을 태평무와 당의 태평무를 합성하여 재구성한 춤이다.
이주연의 ‘태평무’는 절대적인 전통을 이어가는 춤 군(群)의 하나인 이 춤을 자기의 춤으로 소화해내고 있다. 다양한 왕비가 있듯, 왕비 역의 이주연은 아담한 체구에 귀여운 풍모가 드러나는 춤 연기로 ‘태평무’를 소통하고 친밀감이 돌게 만든다. 그녀의 디테일한 춤사위와 춤을 대하는 자연스러운 연기는 가을날의 풍요의 상징인 주황 빛 감을 연상시킨다.
●이주연: 세종대학교 무용학박사,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이수자, 제16회 한밭전국국악대회 명무대상(대통령상), 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겸임교수
『교방살풀이』(임이조류)는 기본살풀이춤에서 변형된 춤이다. 구성지고 애절한 춤사위로 시작되는 이 춤은 여성스러운 교태감을 살린 춤이다. 기녀들이 표현해 낼 수 있는 아기자기한 느낌을 살려 경쾌하고 역동적 춤사위로 마무리된다. 즉흥성이 강하고 원색의 한복이 시각적 비주얼을 더하는 밝은 느낌의 춤이다.
전진희는 하늘 색 저고리와 밤색 치마를 주조로 한 원색의 한복을 하고, 빨간 옷고름에 비녀장식을 하고 독무로써 기녀의 애환을 중량감 있게 잘 그려낸다. 아이돌 스타들의 춤의 전시(前視)인 ‘교방살풀이춤’은 군무로 기능하거나 독무로 추어져도 분위기를 살릴 수 있는 무기적 춤이다, 열광적 춤의 흥미 요소들로 전진희 춤의 환상모델로 만들어 버린 기교에 주목한다.
●전진희: 서울시무용단 수석단원, 중요무형문화제 제27호 승무 전수, 임이조 전통춤보존회 이사, 세계무용연맹 이사, 리을무용단 이사
『산조』(배정혜류)는 외부와 차단된 채 안채를 지키는 규수, 보름달이라도 뜨면 여인은 지난 세월을 떠올리며 한바탕 흥겨운 춤을 춘다. 거센 바람을 가르며 도도하게 흐르는 강줄기처럼 인생 풍파를 묵묵히 겪어내는 여인의 내면의 감정을 표현한 춤이 ‘산조’다. 절대적 신비감을 지닌 여인이 자신의 집 안마당에서 추는 춤은 기도처럼 경건하다.
김현미는 이태백 아쟁의 나지막하고 지속적 저음의 산조 음색에 맞춰 감성을 일구어 내는 춤사위로 이 작품을 관습적 틀에서 현실로 끌어낸다. 온 몸을 뜨겁게 만드는 이 춤은 열정에 몸이 시린 여인의 내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춤으로 구원받는 김현미의 산조는 배정혜의 춤수사학을 충실히 구사하면서도 자신의 창작품에 대한 자력(磁力)에 애정을 느끼는 듯하다.
●김현미: 선화예술학교 무용부장, 리을무용단 단장 역임, 시립무용단 단원 역임, 이화여대 교육대학원 졸업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이매방류)은 한국 전통사상의 중심인 음양오행, 기, 태극 등을 잉어거리, 완자걸이, 비정비팔, 빗디딤, 양우선 등 다양한 동작으로 표현한다. 이매방의 살풀이춤은 흥이 많고 춤 마디마디마다 멋이 넘쳐흐르며 일정한 규칙 안에서 행해지는 즉흥성은 한과 흥 등의 정서를 극대화한다.
기교파 이매방(본명 이규태)이 예형(藝型)을 제시한 박성호의 ‘살풀이춤’은 장고와 구음이 돋보이는 남도 살풀이와 자진모리 가락에 맞춘 것이다. 기교의 탁월성을 보여주는 그의 춤은 그가 속해있는 무용단의 실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남성 ‘살풀이춤’의 계보를 이어가는 그의 소박한 연희가 이날 공연의 의의를 더욱 살린 춤으로 기억된다.
●박성호: 국립국악원 무용단 수석단원,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제97호 살풀이춤 이수자,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 박사 졸업
『광란의 제단』(김백봉류)은 1959년 초연된 김백봉류의 무당춤이다. 군무로 이루어진 춤은 화려한 복식, 빠른 템포감으로 우리 춤의 지고(至高)한 신명이 존재함을 알린다. 사제의 의미를 느끼며 발원이 이루어짐에 그 기쁨이 절정에 이르고 신기는 더욱 앙양된다. 한국 전통 채색의 의미를 부합시켜 격렬한 움직임을 통해 내면의 세계에 몰입됨을 표현한 작품이다.
김경회는 우울한 일상을 털어내는 ‘광란의 제단’을 통해 굿판의 행위와 신기가 올랐을 때처럼 광란과도 같은 격렬한 움직임을 역동적 춤사위로 구성, 관객들의 동참을 유도하며 몰입의 경지를 잘 표현해 내고 있다. 표현의 극대화를 위한 도구와 장단에 조화되는 방울소리는 춤의 역동성을 배가 시킨다. 그녀의 안무작은 이 작품 자체의 주제에 잘 밀착되어 있다.
●출연: (강원대 김경회 무용단)인치서, 최혜선, 서주연, 박시내, 송용경, 조용인, 이성미, 이희준, 정현조, 정지영, 최경하, 임동천, 김현아, 전현정, 정다정, 최예지, 유태은, 유가현, 유수연, 송인주, 이은비, 남혜지, 김채영, 신소민, 김혜영, 김경은, 강채은, 이지윤
●김경회: 강원대학교 무용학과 교수, 김백봉 춤 보전회 부회장,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교육위원
서정성이 두드러지는 이경수의 ‘남무’는 국수호의 기교적 ‘남무’에서 자신의 개인적 취향을 더한 것이다. 그는 국수호의 춤 정신과 상상력, 연기력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텍스트가 된 ‘남무’를 명작명무전에 올림으로써 같은 듯 다른 남성 춤의 현주소를 선보이고 있다. 좋은 전통을 이어받고, 컨템포러리 춤으로 확장시켜 온 그의 기본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경수: 세종대 무용학과 박사과정, 전 울산 시립무용단 상임 안무자, 전 국립무용단 단원
중요무형 문화재 제92호 『태평무』(강선영류)는 나라의 태평성대와 풍년을 기원하는 춤으로 100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너무 잘 알려진 춤 레퍼토리이다. 1938년 최고의 명무인 故(고) 한성준(韓成俊)이 재구성한 무용 중의 하나다. 강선영에게 전승되고 있는 ‘태평무’의 춤동작은 섬세하고 특히 발디딤이 독특하며 다양하다.
이미숙은 다른 ‘태펑무’의 분위기와는 다른 춤 고수의 놀라운 기교를 보여준다. 그녀의 춤은 인간적이며 그녀는 몰입에서 오는 현란한 춤사위로 두려움 없이 거침없이 무대를 휘젓는다. 전통 연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구체적 사실을 입증시킨 그녀의 ‘태평무’는 여느 안무가들의 춤을 대하는 자세와 닮아있다. 그녀는 전통에 기반을 둔 창작무용에도 관심을 갖는다.
●이미숙: 성균관대학교 체육학박사, 의정부시립무용단 단장,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이수자
김백봉(89)의 제자이자 딸 안병주가 이끄는 ‘춤·이음’ 무용단의 ‘부채춤(김백봉류)’은 그 화려한 군무로 유명하다. ‘부채를 주제로 한 춤’은 한국 연희사에서 가장 오래된 춤의 하나다. 부채춤은 우리나라 무용예술이 서양식 무대로 옮겨지면서 시대적 사상과 형식의 변모과정을 거쳐 1954년 김백봉에 의해 예술적으로 재창출되어 발전한 우리 춤의 상징이다.
펴고 접는 죽선과 한지의 소박하고 운치어린 지음(紙音)을 타고 만개한 꽃이 춤을 추듯 부채의 움직임은 변화무쌍하다. ‘풍성한 생명력의 우주, 평범한 일상에서 느끼는 삶의 진리, 무궁화 향기가 온 누리에 퍼져오면 사랑의 힘으로 절정에 이르는 민족애, 오늘은 끝이 아닌 내일을 기약하는 윤회’, 부채춤은 김백봉의 예술관과 우주관이 가장 집약된 작품이다.
안병주는 김백봉의 춤 정신을 가장 잘 파악하고, 춤 수사를 이어온 정통 춤 혈통이다. 자신을 비롯한 무용단의 군무는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충분하였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국민들에게 위안과 희망이 되었던 춤은 이제 국격을 높이는 춤의 아이콘이 되어 있다. 안병주의 자중이 스며든 춤은 ‘부채춤’을 구성하는 온전한 틀을 보여줌으로써 이 춤의 가치를 격상시켰다.
●출연: (안병주 춤·이음 무용단)김수진, 심민아, 이예린, 이주애, 최한나, 홍무경, 홍은표, 황수정, 권미정, 김남희, 성은경, 이예림, 하지안, 하예진, 한솔, 허지현, 홍정인, 황지수
●안병주:경희대학교 교수, ‘김백봉 부채춤’보존회(평안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 지정보유단체) 회장, 서울특별시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 우리춤협회 부이사장
세 팀의 군무와 일곱 팀의 독무로 구성된 명작명무전 두 번째 공연은 두 명의 남성 안무가와 여덟 명의 여성 안무가의 작품을 선보였다. 춤의 계승과 미래 발전가능성을 확인시켜준 제9회 우리춤축제는 조화의 묘를 보이며, 이 춤축제의 목적을 잘 알리고 있다. 약간은 버거운 팀 구성에서 오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우리 춤을 총정리 하는 작업은 존재가치를 부여받는다. 조직과 집행의 노고에 존중의 뜻을 보낸다.
장석용 글로벌이코노믹 문화전문위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