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예술을 통한 국가 간의 경쟁력
최성숙(한국화가, 창원시립문신미술관 명예관장, 숙명여자대학교 문신미술관 관장)
“나는 노예처럼 작업하고, 서민과 같이 생활하고, 신처럼 창조한다.” - 문 신
각 분야의 문화 예술가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예술을 통해 국가 간의 경쟁력을 어떻게 높일 수 있을까, 또한 경쟁력을 높이려면 어떤 요소들이 필요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함께 생각할 시점이다.나는 문 신(본명 文安信) 선생의 일생을 지켜보면서, 한 예술가의 작업과 예술 자체를 응용한 작업들이 국가 브랜드 창출의 기본 핵심이라는 것을 주지하고 있다.
창원시립문신미술관, 석고원형박물관, 숙명여대 문신미술관 등은 세계적인 조각가 문신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한국 대표 미술관이다. 유럽의 유수한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조각이 문신의 위상을 실감케 한다. 조각가 한 명이 지역사회와 국격을 높이는데 일조했다. 프랑스 ‘르 피가로’지 1면을 장식한 그는 고향 마산의 문신미술관 뒷동산에 잠들어 있다.
나는 문 신의 화가로서의 삶(다양한 개인 전시회), 문신미술관 조성(마산, 서울 숙명여대), 국가 브랜드 사업 참여(올림픽 공원 조각 설치 등), 문신 브랜드 사업(국회 세미나, 보석 전시회, 국립극장 연주회, 신인의 향기, 영화제 초청) 등을 통해 얻은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나는 문신 넥타이, 스카프, 머그 잔, 보석 등으로 문 신 예술의 브랜드화작업을 추진해왔다.
국가브랜드 창출은 거창한 구호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국가가 주도해서 할 일도 아니다. 국가는 민간인들의 아이디어가 합당하면 조직적 체계 구축과 성공을 위해 그들을 지원하고, 지속적 창의력 고양을 격려해야 한다. 국가 브랜드 창출은 역발상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보여주기 꺼려하는 부분까지도 국가 브랜드 이미지 형성의 도구로 사용되어야 한다.
문신 선생 사후 20년 동안, 그의 예술정신 계승을 위한 브랜드화 작업은 의미 있는 성과와 한계점을 동시에 도출시켰다. 20년의 노력과 정성에 대한 인상을 피력하고자 한다.
시인 이광석(李光碩)의 추도시를 다시 읽으면서 그날의 침통했던 분위기를 떠올려 본다.
「삼가 文信 선생님 영전에」 오늘 우리는 미래가 기억해야 할 오직 한 분/ 위대한 조각가 문신 선생님을/영원한 평화의 나라로 보내드리기 위해/이 자리에 머리 숙여 엎드렸습니다.//이제 선생님께서는 그토록 사랑하셨던/저 마산의 푸른 바다와, 선생님 생명의 모태요, 예술혼의 텃밭인 추산공원/그리고 마산과 마산 사람들의 가슴에 심은/고향 사랑의 진솔한 정을 한 줄기 향불로/사르시고,우리 곁을 영영 떠났습니다.//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울었다고 했습니다만, 선생님은/참으로 파란만장한 예술가의 삶을 국화꽃처럼 지고지순하게 살아오셨습니다.//저 암울했던 일제치하의 고뇌, 외롭고/힘겨웠던 파리 유학 시절, 그리고 선생님/ 필생의 염원이자 피와 땀의 결정체인/ 『문신미술관』을 개관하시기까지/선생님은 선생님의 작품세계만큼이나/가열하고 고독한 삶을 묵묵히 지탱해/왔습니다.//그러나 우리는 기억할 것입니다./돌아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술혼불태워 명작들을 창조함으로써 이 나라/문화예술재단에 저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하신 그 청고한 정신 길이 되새겨/당신의 거룩한 예술혼을 지키는 데/시민적 자긍심을 결집시켜 나갈 것입니다.//선생님, 문신 선생님!/꽃은 지는 모습이 더 아름답다고 했습니다./이제 선생님은 죽음이라는 강을 건너/가셨습니다만 당신의 높고 큰 예술혼은/저 추산공원 일송정 푸른 소나무처럼/마산과 함께, 이 나라와 함께 영원히 살아/빛날 것입니다.//다시 한 번 영전에 엎드려 기원 드립니다./부디 평안히 가시옵소서./안녕히 가시옵소서(1995년 5월 27일)
세계적 조각가 문신은 화가, 공예가, 도예가, 판화가 등 그 어떤 명칭으로 불리워져도 자랑스러운 예술가이다. 선생은 1995년 5월 24일 새벽 다섯 시 반 향년 72세로 자택에서 선종하였고, 대한민국 정부는 금관문화훈장 추서를 의결했다. 선생은 늘 고향을 가슴에 안고 살았다. 이제 문신 선생이 가신지 20년, 미술관 뒤편, 선생의 묘소에는 참배객이 늘고 있다.
선생은 임술년 개띠로 한국인 아버지 문찬이(文贊伊)와 일본인 어머니 치와타다키(千綿タキ) 사이의 차남으로 1922년 1월 16일 탄광지대인 일본 큐슈 사가현 다께오(九州 佐賀懸 武雄)에서 출생했다. 선생에 대한 흔적을 더듬어보고, 그의 불꽃같은 삶을 회상하면서, 작가의 예술정신과 유지를 잇고 따르는 나를 중심으로 한 문신미술관의 활동사항을 살펴보면서 미술관 운영의 지향점을 같이 고민하고 모색해본다.
2011년 12월7일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는 늦었지만 고인이 된 문신 선생께 공로예술가상을 상찬했다. 사실, 문신 선생 사후에 문신 선생을 알리고 문신미술관 운영에 절대적인 도움과 새로운 브랜드 창출에 앞장 선 사람은 나라고 한다. 문신 미술관의 제대로 된 운영은 문신 선생의 예술정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따른 사람들을 지원하는 것이다.
문신선생 사후에 창원시립문신미술관은 2003년 문신미술상 제정하여 총 13회에 걸쳐 수상자를 냈다. 이런 시상은 그의 정신을 이어받는 의미 있는 활동 중의 하나이다. 있는 것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미래 지향의 작가에게 작가적 역량 발휘와 그 지평을 넓히라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문신 예술정신에 대한 지속적 사랑과 적극적 창작을 고무하는 상이다.
문신 선생 타계 이후의 연보를 살펴보자. 1995: 11월 대법원 신청사 조형물 ‘해태상’ 제막, 1996:문신추모 1주년-흑단, 친필자료 문신미술관. 마산, 1997: 9-11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내 ‘카루젤’ 초대전, 파리, 1998: 가나아트갤러리 초대전, 서울, 2000: 1.1 새 천 년 밀레니엄 조각 카퍼레이드(CNN 위성중계), 6-7 문신 타계 5주년 기념 유작전. 가나아트. 서울, 9-11 문신 보석 순회 초대전. 홍콩 서울 마산 라스베가스, 2001: 국정홍보처 해외홍보관 상설 전시(북경 한국문화원, 2001.7.10.―2002.12)에 문신예술 계승을 위한 모색기였다.
2003년 4월 30일(수) 저녁, 프레스 센터 국제회의장에서 본격적 문신 예술사업 추진을 위한 문신예술포럼이 창립되었고, 모든 사항들을 검토하는 자리였다. 이후 서울 숙명여대 문신미술관 행사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펼쳤다. 2011년 4월 23일 한국예술평론가 회원들이 ‘문신예술의 세계화’를 위한 마산 세미나를 열고, 문신미술관 주변을 탐방하고 문신 선생의 예술정신을 기리는 자리를 가진바 있다.
2004년부터 2011년 까지 팔년간은 문신예술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다양한 문화행사를 펼친 때 이었다. 2004: 4.30 마산시립문신미술관으로 재개관, 5.10 숙명여자대학교 문신미술관 개관, 2005:스페인 발렌시아 ‘한국의 영혼’ 문신전, 소년에서 거장까지-자료 발간. 숙명여대 문신미술관, 9-11 제3회 발렌시아 비엔날레 특별초대. 스페인, 2006: 6.5 ‘월드컵 기념 문신 국제조각전’ 독일 바덴바덴 레오폴트 광장, 9.17 독일 바덴바덴 필하모니 ‘영예의 전당’에서 문신추모음악회, 2007: 8.11독일 바덴바덴 필하모니 ‘문신미술영상음악축제’, 7-9 ‘문신종합예술특별전’ 마산시립문신박물관, 8.26~9.4 ‘앙상블 바덴바덴’ 한국순회연주 (마산, 장흥, 서울), 10.12 ‘문신의 예술과 국가문화산업 발전 전략’ 국회세미나’, 2008: 화가문신(고양어울림 미술관, 고양),문신국제음악단 <앙상블시메트리> 내한공연(마산315아트센터, 서울국립극장), 2009:문신미공개 도자특별전(서울), 숙명여자대학교 문신예술 10년 기념 대축제Ⅰ․Ⅱ․Ⅲ(서울), 앙상블시메트리내한연주회,서울․마산:귄터쉬바르쯔의 창작곡 ‘조각가 문신에 대한 대칭음악’ 한국초연, 제2회 문신저술상 시상식 및 심포지엄(서울),문신 초기 구상 회화_조각가 문신의 회화(마산), 세계적 조각가 문신 국가 브랜드화를 위한 세미나 및 특별전시회( 국회의원회관, 서울), 2010: 문신활동전시Ⅰ: 거장의 운명(1940~1950년대), Symmetry 생명창조(1960년대), 거장(巨匠)의 유럽시대(1970년대)(서울), 미공개 드로잉 ‘시메트리의 마법’전, 문신예술을 노래하는 시인의 향기(서울), 제1회 문신국제조각심포지엄 개최(창원),창원시립 문신원형미술관 개관(창원), 앙상블 시메트리 내한연주회(3.15 아트센터 대극장, 창원), 2011: 문신활동전시Ⅱ: 예술한국의 새로운 빛(1980년대), 불멸의 거장 문신(1990~1995), 문신의 약속-문화국가 가치 창조(1996~2005)(서울), 열정과 집념의 응결체 ‘문신의 나무조각’(마산), 문신을 위한 창작무용 ‘달의 사나이’(마산315아트센터 소극장, 마산), 문신, 이응로의 ‘아름다운 동행’,문신미술관(마산), 이응로 미술관(대전)에 이르는 작업은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방대한 분량의 예술행사였다.
2012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소소하게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2012: 삶과 예술의 여정-문신 드로잉전(창원), 창원조각비엔날레(돌섬해상유원지, 창원), 2013:문신의 線선[Line], 球구[Sphere] 생성되다 성장하다 태어나다(서울), 문신도화_도자에 흐르는 드로잉 세계(창원), 2014: 숙명여자대학교 개관 10주년 기념전_Moon Shin_Material(서울), ‘문신아트상품전_달과 별’展(창원, 서울) 등은 문신예술의 새로운 도약과 예술 상품으로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시기이다.
예술평론가 장석용은 『달과 별 사이』展 평에서, ‘낮은 곳으로 임한 예술상품들’이라고 하고 문신미술관 시립화 10주년 기념 아트상품전에 대한 인상을 적어 내었다.
「2014년 7월 1일부터 8월 24일까지 마산 문신미술관 제1․ 2 전시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아트상품전 『달과 별 사이』는 로댕과 헨리무어의 진정한 계승자인 마산출신 세계적인 조각가 문신과 5․ 16민족예술신인상전 동양화부문 수석에서부터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최우수예술가상에 빛나는 화가 최성숙의 예술과 사랑의 로만틱 가도를 동행할 수 있는 ‘꿈의 공간’을 제공한다. ‘달과 별사이’는 교과서에서는 볼 수 없는 최성숙이 쓴 귀한 동화에 삼시제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프랑스의 끈질긴 귀화 요청을 뿌리치고 추산동에 영구 귀국한 뒤 부부가 일군 미술관, 추산의 봄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여름엔 문신의 정원엔 은방울 꽃, 봉숭아, 수련 위로 잠자리가 노닐고, 고추밭에 고추가 매운 맛을 더해가며, 긴 꼬리 내리며 가을을 울던 닭들, 겨울 산봉우리에 잔설이 말갈기처럼 휘날리던 겨울의 추억이 오이로파의 클래식한 음차와 하모니를 이룬 아트상품들이 달달할 것만 같은 느낌으로 별 빛으로, 달빛으로 파도처럼 다가온다.
그들의 예술 궤적을 유추할 수 있는 낭만 퍼레이드, 문신 미술관의 아트 상품전은 1995년부터 지금까지 19년간 정신없이 매진한 최성숙의 집념의 산물이다. 이 작품들은 몽유도원의 신비에서 고갱의 원색 유희에 걸친 만화경의 경지를 보여준다. 그녀의 작업은 지난 유월의 한 달 반 동안 독일, 프랑스, 헝가리, 크로아티아에 소장된 문신 예술의 빛나는 광휘에 화답하는 위대한 작업이다. 문신의 드로잉에 자신의 상상력을 극대화시키는 일은 바람직한 전범(典範)이다.
바다를 가로막은 아파트들의 등장은 능멸 뒤의 분노를 낳았지만, 최성숙은 고수답게 그림속의 바다를 위안의 도구로 삼았다. 붓으로 평정하고 싶은 세상은 아직도 ‘미개의 늪’으로 남아있지만 그녀는 늘 바람직한 진전의 중심에 서 있다. 그녀가 아트상품전에서 수줍게 보여준 사연은 놀라운 서정의 판타지에 사랑을 듬뿍 실은 것이었다. 여름을 느끼게 하는 곤충들, 문신의 정원, 크리스마스를 맞은 가족들과의 추억 같은 인간미가 풍기는 자연스런 풍경들이다.
이 전시회의 주인공 최성숙은 경기여고, 서울미대 회화과, 서울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서독 괴팅엔대, 프랑스 아카데미 그랑쇼미엘에서 수학한 당대 최고의 엘리트이자 작고한 문 신 선생의 아내로서 지금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미스코리아가 떴다며 아이들을 몰고 다녔던 그녀, 발레를 배우고 피아노 교습을 하며 색감, 운동감, 리듬감을 익히던 그녀도 고수나 장인들이 지녔던 도덕적 품성과 계율로서 진중하고 묵직한 제자들과 작품들을 생산하고 있다.
달이 되어 떠난 문 신 선생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을 고스란히 담은 새벽별 최성숙의 컵과 찻잔 같은 도자기, 자신의 그림과 문신의 드로잉을 응용한 넥타이, 쥬얼리, 스카프, 액자, 쿠션, 부직포가방,미니어처 등 140여종의 아트상품은 만지고 보는 것만으로도 동화를 읽는 것과 같은 감동과 황홀에 이르게 한다. 아트상품을 통해 예술가의 마음을 읽어가다 보면 하늘을 닮은 바다가 내 품에 안기고,예술가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 자신이 연상될 것이다.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예술 전 장르를 섭렵하고, 유학과 다양한 해외 견문에서 자연스레 체득한 예술 감각으로 빚은 작품들은 장인의 경지에서 서민들을 배려하는 고운 심성에서 기인한 것들이다.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은 공유하는 것이 다. 최성숙, 인간이 어디까지 지고지순의 사랑이야기를 끌고 갈지 기대가 된다. 2015년 5월 24일이면 문신 선생 서거 20주년이 된다. 우리는 그녀가 각고의 노력으로 이루고자한 예술작업에 무슨 도움이 되었는지 반성해볼 일이다.
문 신 선생의 유지에 따라 방대한 마산의 문신미술관을 마산시에 기증한 숙명여대 회화과 객원교수, 진정한 예술가의 작품을 일상에서 만나고 사용할 수 있는 예작(藝作)을 소지하는 자는 행복하다. 이런 아트상품들은 문신의 작품을 널리 일상에서 만나고 사용하게 하겠다는 목표를 두고, 최 교수가 숙명여대 연구원들과 아이디어를 내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탄생시킨 십구 년간의 결과물이다. 최성숙의 스토리텔링이 있는 아트상품들은 지속적 인기를 얻을 것이다.」
장석용은 또한 문신의 <드로잉 & 쥬얼리> 展에 대한 인상으로 ‘춤추는 선(腺)에 취한 만개한 주얼리들’로 전시회 평을 적었다.
「프리틸라라 썬버기의 근엄의 향이 쏟아지고, 금강신화의 아다마스가 견고한 의지를 드리울 때, 문신의 드로잉은 보석들을 유혹하고 절세 심미가 들을 포로로 삼는다. 문신의 성(城)은 견고하지만,진입이 허용되면 꿈과 판타지로 가득 찬 그의 동선(動線)에서 헤어날 수 없다.
2008년 4월25일(금)부터 6월 30일(금)까지 숙명여대 문신 아트 갤러리에서 화가 최성숙(문신미술관 관장, 동양화과 객원교수)은 자연에서 연원한 부드러움에서 우주에 이르는 철학적 명제에 걸친 문신의 역동적 드로잉 작품을 다양하게 응용한 보석들을 선보이고 있다.
은에 백금도금, 은에 산화철 도금, 18금, 18금도금 등에 담긴 보석들은 문신의 선(腺)을 최대한 살린 것들이다. 다양한 폭과 높이를 가진 작품들은 초기 작품들의 멋과 맛을 한층 가미시킨다. 조화와 균형의 신봉자이자, 이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작가는 우주를 이야기 한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무색이 채색이 되고, 무생물이 생물이 되는 듯한 착각과 착시를 유도하는 보석의 변신만으로도 모세혈관이 꿈틀되는 감동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선․ 원의 오묘한 기하에 대한 이치해독은 수많은 인연과 사랑의 하모니를 창출한다.
작가의 자유로운 상상은 중력 제로의 신비를 체험케 하고, 일상의 소중함과 작은 미물에도 자유공간을 제공하고자 했던 희망과 염원으로 가득 차 있다. 그가 꾼 꿈들은 서포의 구운몽처럼 그냥 꿈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는 희망의 자양분이 되었다.
나비처럼 가볍게 착지하고 싶었던 조국의 비뚤어진 현실에서도 개미처럼 부지런하고, 황소처럼 뚝심이 있었던 문신 선생이 떠난 지도 십 삼년이 되었지만 그는 아직 우리 곁에 살아 숨쉬고, 그의 예술에 대한 희망은 우리의 나약하고 불안한 소시민들의 정신을 일깨운다.
거대 운동장처럼 뿌리를 내리는 삼나무, 오년이 지나서야 싹을 틔우는 대나무처럼 문신 선생은 깊고도 넓은 마이스터의 뿌리를 내려 오늘의 문신예술이 있게 하였다. 문신, 그는 여전히 그의 작품들로 밀레니엄의 주인공이 되어 우리에게 통일과 화합을 역설한다.
조국의 하늘을 비상하며 문신이 바라다본 풍경은 우화의 틀에 갇힌 개구리가 될 수 있고,무도회의 수첩에 묘사된 가면무도회 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문신은 아직 그의 작품 속에 다양하게 살아 있고, 우리가 문신의 작품을 접하면 행복해지는 집단최면을 경험하게 된다.
문신미술연구소 개관 기념, 문신의 드로잉에서 피어난 보석 38점(귀걸이 3점, 목걸이 2점, 브로우치 33점)은 실버 라인 드로잉 28점을 포함해 진주와 섭 다이아몬드의 도움을 받고 있다. 젊은 날의 아픔을 간직한 문신의 드로잉은 라일락 잔향처럼 짙은 여운을 남긴다.
불멸의 조각가 문신의 드로잉을 바탕으로 21세기를 열면서 제작된 라인 주얼리/문신의 드로잉 선을 기본으로 만들어진 보석들이 전시회를 통해 처음으로 일반인과 만나게 되었다. 이미 문신 드로잉 자체는 국내․외에서 예술성과 상품성을 소지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제작자 김현희와 최성숙의 선별감이 돋보이는 이번 전시회는 36점의 드로잉으로 38점의 보석을 만들어 현란한 예술품으로 탄생되는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작업이다. 전시된 드로잉 작품들은 숙명여대 소장품으로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들이다.
문신보석드로잉 특별전은 예술가 문신이 생전 문신예술을 보석으로 형상화시키기 위하여 창작한 문신보석 제작용 드로잉으로서, 특히 선과 면을 분할하는 과정에서 그 형태들을 자연스럽게 보석으로 형상화 시킨 매우 특이한 보석 드로잉이 특별 전시되어 있다.
밀레니엄을 맞이하여 라스베이거스와 홍콩, 베이징에서 콜렉터들로부터 뜨거운 호평을 받은 적 있는 문신 드로잉/조각의 보석화 작업은 세계미술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수립하는 쾌거였다. 장르 간 상호보완성 인식은 상생을 넘어 비상을 지향하는 전향적 접근이다.
후배 예술가가 추진해야 할 주요 덕목 중 하나는 문화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수행하기 위한 기구를 구성하고 설계하는 것이다. 또한 아무리 탁월한 플랜이라도 그것을 실행해야 하는 조직과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 점에서 최성숙 또한 빛나는 한 점의 보석이다.
시메트리, 균형과 조화를 이루었어도 그 균형이 영원할 수 없다. 그 균형이 영속성을 지니려면 작품의 대한 새로운 연구,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작품의 균점 모색 행위도 행해져야 한다. 문신의 <드로잉 & 쥬얼리> 展은 가변성의 역사를 새로 쓰는 끄레아시옹 행위이다.
문신의 드로잉에는 사계의 변화가 담겨 있으며, 전투가 있으며, 승리의 찬가가 근대성을 담보하고 있다. 우주와 예술에 헌신한 문신 작품의 장르 분화가 본격 이루어짐은 그가 작품으로 다시 탄생함을 의미하고 우리 곁에 영원히 머물 수 있음을 의미한다.
가족과 인간에 대한 미안함과 아쉬움은 마음 속 깊이 자신을 자발적 히브리 노예像으로 만들어 내었고 제작된 작품들은 평화, 균형과 안정, 희망을 갈구하는 작품들로 가득하다. 그의 드로잉, 문양들은 그가 현실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추억속의 아름다움일 수 있다.
피카소의 선묘에 크게 영향을 받아 드로잉 작업에 관심을 두었던 문신은 추상조각 작업에 돌입하면서 드로잉 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집중과 선택의 기로에서 그는 늘 험한 길을 택했다.자신을 이겨 내고자하는 승부 근성이 늘 그 앞에 놓여 있었다.
문신예술 추진단 혹은 문신게릴라들은 숙명여대 내 “문신-닥센 시메트리 토털아트 전시관 설립”을 기획하고 무한도전의 문신 탐사계획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문신예술이 새로운 한류의 주축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전 세계의 뜨거운 관심으로 입증되었다.
일례로 재작년 유월, 독일의 세계적 휴양지 바덴바덴에서 ‘명예의 전당’ 설립 이래 최초로 한국인 문신을 위한 “위대한 예술가 문신을 위하여.”란 추모음악회가 바덴바덴 필하모니에 의해 개최되었고, 작년 한국 문신미술관에서 에서 또 다시 감동적인 음악회가 열렸다.
피카소・샤갈과 견주어지는 문신은 세계 젊은 음악거장들이 주축이 된 앙상블 시메트리(스페인 마욜카 창단 음악회)의 뜨거운 추앙을 받아왔고, 독일 등지에서 문신미술영상음악국제축제를 통해 문신과 문신의 작품을 소재로 한 교향악곡 창작곡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프랑스, 스위스, 영국 등에서 문신섬유패션예술의 연속적인 세계최고상 수상은 신화창조의 또 다른 유형이다. 문신의 피투성은 이렇게 장르의 크로스 오버를 선도한다. 몽밀(蒙密)의 성(城)을 떠나 빛의 이미지로 만나는 문신의 드로잉과 보석들은 날개를 달았다.
샘물처럼 솟아나는 새싹처럼 순수한 초록 에메랄드빛으로 다가 올 문신 미술의 미래가 ‘굿윌 헌팅’과 행복이 가득 찬 부드러움의 오부제가 되어 영속성을 지니길 기원한다.」
시인 장석용은 숙명여대 시인의 향기에서 문신을 『발카레스의 神』으로 칭송하고 문신에 대한 인상을 적어 내었다. 그 시의 전문을 게재한다.
황금종려 잎새 너머/ 피어오르던 지중해의 햇살/하늘을 향해/ 햇살을 노예로 삼아/아침바다에 비친 쪽빛으로/ 만다라의 의식을 거행하겠노라고 했다.
태양새를 타고 즐기던 꿈의 유영/야전의 세월/전사의 소부대 전투/라브넬 고성의 견고함/그 실존의 횃불로 ‘태양의 인간’을 쏘아올리고/작은 신의 아들임을 입증했다.
검푸른 파도와/ 간지럽히는 바람에도/흔들리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달의 사나이, 그대는/예술에 대한 투혼을 발휘했다.
미풍처럼/ 구름정원에 남아있는/ 그대의 전설/바람인 듯/ 떠돌아다니는 그대의 느낌/사랑으로 남아있는 우뚝 선 조형
발카레스의 혼으로 찾아 낸/개미의 눈물, 게르니카/참회로 빚은 시메트리로 우주와 소통하던 그대/노스트라다무스의 예지로 누에 천을 탄 그대/발카레스의 신이시여!/찬미 받으소서!
국가 브랜드화의 일환으로 세칭 ‘문신부부의 조각과 아트상품’이 신세계백화점으로 나들이 갔다.이에 대한 신문 기사로 그 인상을 대신한다.
「작고한 세계적인 조각가 문신의 조각과 부인 최성숙 숙명여대 문신미술관 관장의 아트 상품이 백화점으로 나들이를 나가 화제가 되고 있다. 신세계 백화점 영등포점이 지난 10월 24일부터 11월 2일까지 고객에게 열려 있는 공간인 백화점 로비와 10층 라운지에서 ‘문신 조각’전을 열고 있다.
조각가 문신(1923-1995)은 1940년대 중반부터 왕성한 미술활동을 시작하였고, 1960~70년대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에서 조각가로 활동하며 국제적 명성을 날렸다. 파리에서 만난 서울미대 출신의 화가 최성숙과의 운명적 만남으로 국내외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수채화, 유화, 도자기, 공예, 조각 등 모든 분야의 미술에 능통했던 문신은 수많은 전시회와 조각심포지엄 등으로 전 세계의 인기를 얻었고, 구소련 개방 직후 한국작가로는 처음으로 90년대 초반 동유럽 순회전시를 했다. 유럽 유명 미술관은 거의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경기여고 동아리에서 남다른 두각을 나타냈던 화가 최성숙은 자신이 즐겨하는 12간지 회화와 설경, 유럽 풍경과 문신의 드로잉을 이용한 찻잔, 쟁반, 도자기류, 넥타이, 스카프 등을 전시하고, 일반인과 담소하고, 촬영하고, 인터뷰하는 귀중한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백화점 중앙 문을 열면 바로 접할 수 있는 문신 선생의 대형조각 ‘지(志)’ 등 브론즈 조각 10점, 채화5점을 포함한 평면작품 12점과 최성숙 관장의 땀과 피가 섞인 가방, 머그컵 등 다양한 종류의 문신아트상품도 함께 전시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유동인구가 많은 열린 공간에 진열하여 보다 많은 관람객에게 문신의 조각을 선보이고자 열리게 되었다. 전시 이벤트로 11월 1일과 2일, 오후 3시, 5시에 문신 조각에 대한 설명이 있으며, 전시 기간 내 예약을 통해 문신미술관 최성숙 관장의 동양화 강의한다. 일반인과의 문신예술을 위한 소통의 일환이다. 」
나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최성숙 문신미술관 관장에 대한 인상’으로 대신한다.
「경기여고와 서울대 미대 출신의 최성숙 관장은 2005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로 부터 ‘올해의 최우수예술가’(미술부문)로 선정되었다. 한국화가 최성숙은 데뷔 이래 수묵산수화의 전통적인 습속에서 탈피, 자유로운 조형적인 해석으로 주목받아왔다. 경쾌하고 활달하며 역동적인 선을 구사하는 하는 가운데 현실에 밀착함으로써 시각적인 호소력이 강한 그녀의 작품들은 가시적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관념의 세계로까지 자유롭게 넘나드는 확장된 조형세계를 거느린다.
사실적인 시각에 충실한가 하면 비구상적인 영역도 아우르면서 창의적인 자유로운 발상에 의탁하는 그녀의 발상은 언제나 신선한 충격으로 넘친다. 특히 문신 선생 10주기 기념행사와 모교 경기여고에서의 초청전은 그녀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최성숙 관장의 마산에서의 다부진 활동과 아울러 서울 숙명여대 문신미술관에서의 다양한 활동으로 문신 미술을 세계적으로 알리는데 주력해왔다. 그녀는 2008년 4월 25일 문신미술관내에 문신미술연구소를 발족시키면서 문신예술의 체계적 관리와 지속적 연구 및 저술활동 등을 통한 문신예술의 항구적 발전을 담보하고, 국제적 활동 강화 등을 통해 거장 문신의 세계적 예술업적을 재정립하고 문신예술의 세계적 지평을 확대, 조국을 지킨 예술한국의 영원한 빛으로 문화국가 위상 고양과 민족문화창달에 기여, 차세대 문화예술 인재 발굴 및 양성에 이바지하고 있다.
문신미술연구소는 최성숙 관장의 주도로 1. 문신예술 저작권 법정관리 ・ 총괄 기획 ・ 종합 관리(연구체계 확립) 2. 연구 활동 및 결과물 집대성(학술 심포지엄 개최, 문신예술서적 지속 발간) 3. 문신예술 기록보존 및 문신의 국내외 예술업적 ・ 활동, 발굴 ․ 소개 4. 문신 작품 감정 등 예술풍토 정화 ・개선 5. 문신예술 기념행사, 각종 미술행사 개최 및 지원 6. 국・내외 유수미술관 및 국제적 예술그룹들과 교류 강화 7. 새로운 장르로의 융합과 확산을 거듭하는 종합예술로의 항로개척 8.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 등에 각종 예술문화 발전 정책 건의 9. 문신예술 재조명으로 현대미술사 재정립(국가예술문화 기반강화) 10. 기타 연구소의 설립목적에 부합되는 부대사업을 해오고 있다.
또한 문신미술연구소는 경비에 충당하기 위해 도서출판 및 문신예술을 브랜드화한 아트상품 개발사업과 예술문화 전시・공연 및 관련행사 기획 사업을 해오고 있다. 문신미술연구소의 재정적 부담이 되는 사업을 시행하거나 불우 예술인 돕기 기금조성이나 연구소를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필요할 때에는 1. 정부, 지방자치단체 또는 문화재단 등 관련 기관의 보조금, 2. 각종 기부금, 3. 아트상품 ・ 저작물 판매 등을 통한 수익금으로 기금을 조성, 충당 할 수 있도록 되어있지만 후원회의 효율적 운영이나 아트 딜러나 프로모터 등 전문 인력의 부족으로 국내외 비즈니스에 있어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문신국제상앙블(앙상블 시메트리)은 세계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문신예술을 국제화시키기 위해 문신미술연구소는 세계평화와 인류화합에 기여할 문신 포함 <세계 5대 조각 거장전> UN 및 ‘유럽 등 6대주 순회전’ 개최 추진, 세계 유명미술관 및 국제적 예술그룹들과 교류강화, 문신예술선양 해외기반 구축 강화(미국, 프랑스, 독일, 중국, 일본 등),국제적 명성의 문신 디자이너를 육성하여 문신 고유 디자인을 보호하고, 문신예술을 통한 남북평화와 화합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문신예술을 통한 민족문화 업그레이드 운동 전개 및 영원한 민족예술의 등불로 숭모하고 문 신예술 재조명, 재평가로 한국현대미술사 재정립하기 위한 ‘종합석고조각미술관’건립, 국제전 유치 등을 통한 문화명소로 부상시키고 문신미술연구를 위한 미디어 ・ 영상연구소 설립과 ‘문신 아틀리에관’ 건립, 문신예술의 산업화 콘텐츠화, 섬유・보석・패션・도자기 등 세계적 브랜드로 육성, ‘문신영상미술’ ‘문신미술영상음악’ 활성화, 문신저술활동 강화, 지속적 출판문화 전개(문신예술연구시대),<문신예술 다큐멘터리> 2013년 탄생 90년 ・ 2023년 탄생 100년사 제작, 문신 생애를 연극 ・ 드라마 ・ 만화 ・ 무용 ・ 뮤지컬 ・ 영화화 추진. 한국의 혼을 지킨 거장의 조국애 선양, ‘문신 전 작품 보증서 발급’, ‘저작권 관리’ 등 예술문화풍토 개선, 정화 에 앞장서고 있다. 최성숙 관장의 새로운 문신예술의 탄생을 위한 작업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마산시립문신미술관(문신예술 총본산. 고향을 국제 문화도시로 부상)
숙명여대문신미술관(문신아카데미 본산. 문신예술 연구 메카)
문신석고(원형)미술관(예술문화의 새로운 명소. 국제 교류 전 중심)
문신의 아틀리에(치열한 삶의 현장 재현. 문신예술의 영원한 명소)
문신불빛조각공원(장흥아트파크. 최후의 혼 불 ‘불빛조각’ 집대성)
사이버문신미술관(문신예술종합도서관. 문신예술발전역사 총체적 축약)
문신예술기록관리실(문신자료 총괄 보존・관리 ‘예술한국 천년의 빛’)
문신예술문화재단(문신예술의 항구적 발전 기반구축. 세계화 선양 등)
문신미술상위원회(중앙언론사로 주관사 변경 요청. 지역함몰 경계)
문신저술상위원회(문신예술연구기반 구축. 영속적인 ‘출판-심포지엄’ )
문신미술연구소(문신예술 총괄관리. 문신예술의 세계적 지평확대 등)
문신국제음악단(앙상블 ‘시메트리’ 세계적 음악단으로 육성)
문신출판위원회(연 2〜4권 이상 문신예술서적 및 문신도록 연속 출간)
문신축제위원회(국・내외 대규모 문신종합예술축제 기획 ・ 진행 ・ 관리)
문신라이프아트위원회(문신예술 응용 ‘실생활 예술영역’ 연구 ・ 확대)
문신문학클럽(시와 문학으로 피어나는 문신예술. 문신예술 시인의 밤)
문신연극클럽(문신예술을 연극으로 선양. 국・내외 문신연극 기획)
문신영상미술클럽(국・내외에서 영상미술로 문신예술 널리 선양)
문신디자인클럽(세계화 선양과 종합예술로 변주를 위한 디자인연구)
문신예술변주클럽(문신예술의 전령사 ・ 연금술사. 문신의 후예들)
문신애호인클럽(문신예술애호인 클럽. 문신의 사람들. ‘문신예술의 ’밤‘)
문신-닥센 토탈아트 시메트리 전시관(예술문화산업의 새로운 가치창조)
문신보석(쥬얼리 연구팀. 문신보석으로 국・내외 문신예술 선양)
문신한복(문신한복으로 문신예술 국・내외 선양)
문신패션(문신패션쇼 포함. 패션으로 국・내외 문신예술선양)
문신섬유토탈아트(해외매장・섬유공장 추진. 문신-닥센 전시관 운영)
문신피혁(벨트・지갑・핸드백 등. 세계 매직쇼 등에 연속 참가)
문신도자(‘문신명품자기’로 국내외에서 문신예술 선양
문신 크리스탈 아트(귀빈용 특별 아트)」
마에스트로 문 신에 대한 이병주 소설가의 글을 살펴보면 문신예술이 왜 위대하고, 그의 예술이 국가 브랜드화의 제1전선에 놓여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격렬한 인간을 말하려 하고 보니 나는 말의 빈곤을 느낀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가’ 그것부터가 문제이다. 60수년의 풍상, 그 낮과 밤을 통해 이미 신비의 세계를 구축해 놓은 이 인간을 짧은 문면으로 스케치한다는 것은 도대체가 불가능한 노릇이다. 기껏 나름대로의 감상을 적어 볼 뿐이다.
문 신의 얼굴과 체구에 접할 때마다 나는 ‘이 사람이야말로 영락없는 예술가이다’ 하는 실감을 갖는다. 물론 그가 창출한 수많은 명작들이 배경으로 깔려 있는 심상에 비친 탓이겠지만, 그의 얼굴은 예술가가 아니고선 상상할 수도 없는 운명과 정열과 기품이 간연함 없이 융합되어 주조된, 그 자체 오묘한 예술이다.
생과 중심에서 불타오르는 불꽃과 생명의 운율에 단련되어 깊고 굵다란 주름을 이마에 새긴 그 얼굴은 영겁의 인내로서 의연한 프로메테우스를 닮았다. 그리고 그 독수리와 같이 매서우면서도 때론 비둘기처럼 부드럽게도 되는 눈빛은 자연의 섭리와 역사의 공포와 인간의 붕괴와 애환을 골고루 보았으면서도 끝끝내 미와 진실과 화합을 믿고 예술에의 순교를 각오해 버린 의지와 정감으로 가득 차 있다.
어느 누가 자기의 인생을 살지 않고,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나가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만 대개의 경우 운명의 흐름 속에서 류목처럼 되는 것이 고작이다. 세상에 예술가는 많아도 자기의 풍모자체를 예술로 만들어 버린 사례는 극히 드물다. 그런 사실로서도 문신은 천성의 예술가인 것이다. 천성이란 표현은 갖가지 함축을 가진다. 그것은 내버려 두어도 나름대로 꽃을 피우는 들국화 같은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도 광명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 자생자발적인 신념이 어떠한 역경,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이끌어 세우는 강인한 자기의지로서 작용하여 부여된 재능을 개화시키고 결실시키지 않고 배겨내지 못하도록 하는 섭리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생애는 나면서부터 결코 순탄하지가 않았다. 아버지는 탄광부였고,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는 사나이였다. 어머니는 일본인이었다. 모정이야 없었을 까닭이 없지만 다섯 살 난 아이를 두고 떠날 만큼 비정했다. 그 유년시절이 얼마나 어두웠을까, 그런데 문 신은 그 유년시절을 목가적으로 회상하고 있고, 고독은 했을망정 어린 감수성을 상하지 않았다. 13, 4세 때 벌써 그는 남의 집 일을 하며 스스로의 생활을 꾸려나갔다. 그런 소년 시절이 암담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암담하지 않았던 것은 이 무렵 미술에 대한 개안이 있었다는 사실로써 알 수가 있다. 운명에 순종하면서도 그 흐름에 맡겨버리지 않고 그 흐름을 자기 뜻하는 방향으로 돌릴 줄 아는 지혜가 있었던 것이다.
16세 때 동경의 미술학교에 들어가 고학을 시작하며 청년기를 맞이하게 되는 기간도 보통의 인간으로선 견디기 힘든 시기이다. 생활에 시달려 적당하게 사회와 타협하여 애락 또는 찰나주의에 빠져들든지 배김주의의 노예가 되든지 했을 것인데 그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궁박한 생활, 고난에 벅찬 생활을 하면서도 그 궁박에 지치지도 않았고 고난을 고난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히 희귀한 품성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러한 품성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대답은 뜻밖에도 간단하다.
그는 자기가 할 일을 알고 있었다. 나가야 할 방향을 알고 있었다. 만들어야 할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기 속에 무궁한 광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지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고독 속에서도 슬프지 않았고 실의 속에서도 시들지 않았고, 가차 없는 자기수련을 감행할 수 있었다. 동경시절 그러니까 20세 안팎일 때 그린 것으로서, 유일하게 남아 있다는 그림은 젊은 화가 자신의 초상화인데 나는 그것을 보고 문신의 오늘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인상파풍으로 그려진 그 초상은 세상을 곁눈으로 보고 자기의 화업에만 열중하겠다는 만만찮은 결의가 풍겨 나오고 있는 결연한 자기선언이었고 풍요한 앞날을 짐작케 하는 재능의 표출을 곁들인 자기약속이었다.
천재는 탐구적이라고 한다. 탐구적에는 반드시 의지력이 동반한다. 의지력이 동반하지 않은 천재는 한때 밤하늘을 수놓았다가 꺼져버리는 불꽃놀이와 다를 바 없다. 영원할 수가 없다. 이럴 때 천재는 강인한 의지력이란 말과 동의어가 된다. 거꾸로 이렇게 :천재가 있기에 강인한 의지력이 생겨나는 것이다. 예술가의 강인한 의지력은 선행한 작품을 원천으로 한다. 불모의 연속에서 의지력이 생동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문 신은 틀림없는 천재이다. 그 작품이 보여주는 성과는 강인한 의지력을 내면에서부터 내뿜고 있는 광휘로서 화려하다. 그것이 또한 탐구력으로 번역될 수 있다는 것은 문 신의 작품엔 언제나 발견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 신의 작품마다에서 새로운 발견을 얻는다. 곧 새로운 감동이다. 그의 초기의 작품, 즉 그가 프랑스에 가기 전에 만든 작품은 거의 대부분이 회화인데 사실적 경향이 두드러져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에서 벌써 새로운 맹아가 있었다. 어느 미술평론가는 자연주의적 수법이라고 했지만 인상파풍에서 표현주의적 경향이보였고 不원 비구상에서 추상으로 나아갈 예시가 있었다.
그 예시란 그가 추구하고 따르고 있는 내면적 필연성이다. 그의 내면적 필연성은 자연 또는 주변을 철저하게 관찰한 끝에 우주의 섭리, 또는 원리적인 것에 육박하려는 의지로 화한다. 형체의 저편에 그 형체를 있게 하는 그 무엇, 색채의 저편에 그 색채를 있게 하는 그 무엇에 집착하게 된다. 급기야 우리는 문 신의 강렬한 추상을 통해 세계의 어떤 원형 같은 것에 이끌리게 되는 것이지만 그 길은 천재에게만이 허용된 행운의 길이다. 천재에게만이 허용된 행운이란 천재가 아니고선 포착할 수 없는 기회라는 뜻으로도 된다. 설혹 그런 기회가 있었다손 치더라도 천재 없인 보람 없이 지나쳐버릴 기회라는 뜻으로 된다. 우선 그를 프랑스에 보내게 한 충동이 그런 것이었다.
많은 화가들이 프랑스로 간다. 물론 진지한 예술에의 정진을 다짐한 출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의욕엔 다소의 허영, 또는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적지 않게 섞여 있었을 것이고 굳이 내면적 필연성이라고 할만한 절박함을 결여한 경우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문신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를 프랑스로 보낸 충동엔 허영도 없었고, 요행을 바라는 마음도 없었다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정진의 과정에서 용솟음치는 내적인 필연성이 그를 프랑스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 내면적 필연성이 생활의 필연성과 합쳐 고성을 수식하는 공사장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파리에서 북쪽 80킬로 상거에 있는 16세기 초 고성의 수식작업을 맡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그는 그 곳에서 근 3년 동안 석공, 목수, 미장이 노릇을 하고 두 성탑의 지붕까지를 손질하게 되었다. 대단한 체력을 요구하는 일인 동시에 이만저만한 심리적 판단력이 없인 될 일이 아니었다. 문신은 그 작업을 통해 자기 속에 잠재해 있던 조각가를 재발견하고 드디어 조각가로서 우리 앞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이 없어도 조형예술에 관한 폭넓은 관심과 재능을 가지고 있는 조각가로서 입신할 수 있었겠지만 그 고성이 문 신에게 끼친 의미는 크다. 조각가로서의 문 신을 주조해 내기 위한 용광로의 역할을 그 고성이 한 것이다. 우연한 인연이 그의 예술을 위해선 필연적 작용을 한 셈이다. 나는 이 사실을 들었을 때 ‘로댕’을 연상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로댕은 국립미술학교 입학시험에 세 번을 낙제한 후 석공의 조수로서 장식가, 주조사, 금공사(金공사), 세공사, 조소공 등 갖가지 노동에 종사함으로써 조각가로서의 기초적인 기량을 닦았다.
나는 결코 이러한 사실을 우연한 암합이라고만 보질 않는다. 하나의 천재를 가꾸기 위해선 뭔가 섭리의 힘이 움직인다는 신비를 소중히 하고 싶다. 이런 일들을 합쳐 프랑스는 문 신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그 곳에서 겪은 고생까지를 합쳐 위대한 공헌을 한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가 일방적인 포혜자라는 뜻은 아니다. 문 신은 파리의 영광일 수 있기 때문이다.
1980년 4월의 어느 날 나는 파리의 교외에 있는 문 신의 아틀리에를 방문했다. 내게 있어서 그것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13, 4호쯤의 농가가 들판 한가운데 조그마한 못(지)을 끼고 봄볕 아래 졸고 있는 듯한 농촌이었는데 문신은 그 곳 어느 농가의 창고라고 하기보단 헛간 같은 델 상하로 질러 2층으로 만들어 거쳐하고 있었다. 1층은 우리 시골의 대장간을 닮은 작업장이다. 연마기 같은 것이 한 구석에 있고 비좁은 공간엔 작업 도중의 대소미완성작품과 공구들이 꽉 차 있었다. 통나무로 만든 계단을 4, 5단 오르니 그곳이 거실이었는데 탁자를 비롯한 모든 조도가 문 신 자신이 만든 작품들이었고 이것저것이 산란해 있어 비집고 앉기가 겨우 였다.
여류화가이며 드물게 보는 미인인 최성숙씨가 있었기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더라면 삭막하고 잡다해서 견딜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문 신이 부인과 결혼하기 전엔 그 고절한 방에서 수년 동안을 혼자 작업을 한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뭐라고 형언하기 어려운 감회가 서렸다.
그러나 차츰 그 장소에 익숙하게 되자, 바로 이곳이 수많은 명작을 산출한 공방이란 상념과 더불어 이 이상으로 호사스런 곳이 다시 있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멀리 고국을 떠나 20년 어쩌다 한 달에 한두 점 팔리는 그림으로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 그는 미와 진실의 추구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업적은 10년 내 파리를 비롯하여 프랑스 명지 , 독일에 까지 매년 수회씩 전람회를 열 수 있었을 만큼 왕성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갔을 그 무렵엔 파리의 미술계에 문신의 명성은 이미 정립되어가고 있었다. 파리의 저명한 미술평가론가 ‘쟈크 도판느’같은 사람이 서슴없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하튼 문신은 위대한 예술가의 한사람이며 미래가 기억할 예술가이다.” 그의 말을 들먹일 필요 없이 나는 그가 위대한 예술가라는 것을 알고 있다.
미켈란젤로가 대리석에서 다비드를 파내었다면 우리 문 신은 흑단을 휘어 미의 원형, 우주의 원리를 파낸다. 흑단과 쇠나무는 문 신의 작업에 있어서 극히 상징적이다. 그런 재료와의 만남 자체가 그의 독창성에서 비롯된 것이거니와 비상한 의지와 체력이 조형에의 정열에 동반하지 않곤 그러한 재료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가 선과 형성과 색채로 표현한 그림은 일거에 우주의 본원, 생명의 본질에 뛰어들려는 박진력의 표출인 동시 그 의지와 정열이 바로 예술일 수 있다는 추상회화의 정수를 말한다. 그런가 하면 그의 조각은 우주와 생명의 운율을 시각화 해 놓은 갖가지의 바리에이션이다. 원과 호와 직선과 각의 대칭적 조화는 불협화음까지를 거느려 결국은 화음으로 이끄는 공간적인 음악이 되어 음악지상의 음감을 구성하는 절묘함을 보인다. 일러 나는 신비라고 하는 것이다.
그 광택, 그 섬세, 그 정교,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생명력의 리듬에게 우리는 어떤 말을 붙여야 하는 것일까. “이것으로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느냐.” “표현하려 한 게 아니고 그 자체가 표현된 거다.요컨대 숨겨져 있던 생명이 그런 미로서 나타난 거다. 그러니 무어라고 할 수가 없다.” 이런 선문답처럼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시시각각으로 유동하면서도 영원한 생명의 순간순간을 감당할 말이 우리에겐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언어도로선 설명할 수 없고 심행처마저 다한 곳에서 문 신의 예술은 스스로 조형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문신과 같은 예술가를 동시대인으로 가졌다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그러한 문신을 개인적으로 친자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의 자랑으로 안다. 동시에 문신과 같은 존재를 가졌다는 것이 조국의 명예라고 치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파리에서 돌아와 고산에 정착한지 어언 오년, 그가 조국에서 어떤 위적을 행할 것인지 기대해 볼 만하다. “만물은 엄연히 원초에서 생성했어도 그것을 시각으로 볼 순 없었다. 인간은 현실에 살면서 보이지 않는 미래(우주)에 대한 꿈을 그리고 있다.” 그의 제작메모에 있는 글이다. (1986. 3. 李炳注)」
문신미술연구소와 문신예술기록관리실을 소개하면서 문신예술의 국가브랜드화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역사적인 세계 최초의 문신미술연구소와 문신예술기록관리실은 숙명여대 문신미술관내에 존재한다. 문신미술연구소는 미술전반에 관한 연구와 문신미술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새로운 연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고, 문신예술기록관리실은 문신의 친필원고에서부터 문신에 관한 방송자료까지 방대한 자료가 보존・ 관리되는 곳이다.
문신아카데미의 본산이며 새로운 문신예술의 산실인 문신미술연구소와 더불어 ‘문신예술이념 실현’과 ‘문신의 약속’ 실천을 위하여 마련된 문신예술기록보존실은 약 3톤 분량 문신예술 전 자료가 수집되고 보존, 비치되어 있다. 국・내외 예술문화분야 학자들이 지속적 활동과 국제예술그룹들과의 교류강화 등을 통해 문신예술의 지평확대 및 예술문화발전 등에 공헌하고 있다.
문신예술기록보존실은 숙명여대문신미술관 르네상스 플라자 B2 204호에 있다. 문신 선생 친필원고 10,000여매(각종 세계 거장작품 친필 비평, 일대기생활상・심경 친필 정리, 국내외 친필 서신 등), 작품 슬라이드, 문신예술역사정리 파일 250여권, 미술관 건립 및 문신예술 발전사 전 자료, 각종 중요 문서, 각종 행사 등 사진(5만여 장), 문신예술 출판물 전 자료, 방송 및 각종 행사・전시 영상 자료 2,500여회분, 국내외 신문, 정기 간행물・국내외 평론 및 학위논문 등 전부, 토털아트 자료 등 전 자료 보존, 관리되는 곳이다.
예술하나로 세계 예술계를 경탄시키면서 사랑하는 조국을 위하여 말할 수 없는 영광을 안겨주었고,사후 더욱 ‘대한민국 예술문화의 빛’으로서 세계의 어떤 예술가들도 꿈꿀 수 없었던 종합예술로 찬란히 부활하여 세계예술역사상 유례없는 새로운 장르로의 확산과 융합을 거듭하면서 위대한 열풍을 일으키는 문신과 문신예술은, ‘문신예술을 통하여 예술문화를 발전시켜, 이 땅에 풍요로운 예술문화를 꽃 피우겠다’는 순수한 열정에서 출발하는 문신의 약속을 실천함으로서 “예술한국 천년의 영원한 빛“이 될 것을 다짐한다.(문신미술연구소 의원 일동)
숙명여대 문신미술관은 그동안 1) 문신의 일상(삶과 작품세계)을 다룬 시인들의 시낭송 2) 문신 작품을 모티브로 한 춤과 음악과 어우러진 시낭송 3) 영상과 어우러진 문신 시 낭송 4) 무언극 등으로 풀어본 문신 5) 문신의 보석과 어우러진 시낭송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했다. 특히 2008.9.7(일), 오후 4시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세계 국립극장 페스티발 특별 초청으로 ‘앙상블 시메트리’ 공연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문 신 선생 타계 이후 바람직한 문신미술관 운영에 대한 문신예술 정신 계승사업에 대한 평가와 향방에 대해 진솔하게 자리가 있었다. 문신미술관을 축으로 예술과 흥행, 조용한 원칙적 정리와 관광과 판매 양 측면에서 접근하면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양 방향 미술관의 활성화 방안으로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면 최선책이지만 그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여러 곳에서 제시된 의견들을 살펴본다.
미술관 운영은 미술관의 현황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운영 시스템(조직, 재정, 시설, 소장품)과 운영 프로그램(전시, 교육 프로그램, 홍보 프로그램)을 살피는 일차적 점검과 지역 특성에 맞는 적합한 프로그램 개발을 통한 발전방향을 설정하는 2차적 방안, 그리고 외국 미술관의 운영사례와 지역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한 공공 미술관 마케팅전략기획을 세울 필요가 있다. 어린이들이 부모와 함께 가자고 조르는 미술관이 되어야한다. 유소년 축구에서 유망주를 기러내듯 문신미술관에서 그림그리기 체험, 조각 실습 등으로 ‘미니문신’을 키워야 한다.
지금까지 문신예술 계승사업은 조용한 문화 창달로 성공한 것 같다. 하지만 수익사업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익사업 창출을 위해서는 문신 미술관 주변을 문화마을로 조성하고 다양한 토속 음식과, 주변경관에 대한 볼거리로 나들이 가보고 싶은 곳이 되어야 한다. 문신 미술관 앞 꽉 막힌 아파트의 존재는 위대한 작가 문신과 문신미술관을 대하는 마산의 무지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역에는 문신미술관에 대한 정보가 없다. 시의 기본적 책무이지만 관광객이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끔 하는 홍보자료와 교통편이 제공되지 않는다. 셔틀 버스가 미술관 까지 운영되어야 한다. 외국어 도우미와 외국어 서비스가 제공되어야 한다.
가족과 친구와 함께 방문하는 문신미술관이 지역의 문화 중심이 되고 교육적 측면에서 방문하는 대표적 명소로 거듭나야 한다. 문신예술이 지역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열정을 읽어야 한다. 문신미술관은 스튜디오를 제공, 전시, 미술작가에게 스튜디오 및 기타 편의시설제공, 작가설명회 및 세미나 개최, 오픈 스튜디오 개최, 도록 등 출판물 발간, 국내·외 교류 네트워크 구축, 운영, 미술작가 상호 교환입주 프로그램 운영, 지역주민 및 학생 연계한 미술 프로그램도 개발·운영 등 타 스튜디오가 하는 기본 작업들을 참고로 새로운 프로그램을 창출해야한다.
창원시는 문신 미술작품의 효율적인 전시, 국제화, 활성화, 전폭적 지원을 위한 시립문신미술관 운영과 업무 전반에 대해 전문가들과 수시로 대책을 마련해야한다. 1)선진국에서 문화봉사 교육프로그램을 기본으로 하여 미술관 일반관리 및 운영, 전시기획 · 설치 · 운영, 작품 보존, 연구 등 미술관 관련 분야에 대해 정보를 고유해야한다. 2)자원봉사자 전문화를 위한 교육 등 적정한 관리체계를 유지하여 자원봉사자를 확충하고 1. 미술관 관람안내 2. 통역 및 외국책자 등의 번역업무 3. 미술관의 특정업무(기획전시 설명, 어린이미술관 수업 등) 지원 4. 기타 전문성을 요하는 미술관 업무에 대해 시기별·업무별 자원봉사자 소요인원 등을 고려한다.
미술관, 문화마을, 문화 생태도시 조성을 통한 문화발전은 문화예술인, 전문가, 주민, 행정이 참여 유기적 관계를 이룰 때 가능하다. 창원문신미술관이 공공미술 콤플렉스로 특성화되고, 시립미술관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지역주민과 소통하는 전시로 커뮤니티 중심의 미술관 운영방향 정립을 정립하고 타 미술관과 분명한 차별화를 이룰 때 그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다.
창원시 주체가 되어 운영하는 시립미술관, 숙명여자대학교가 설립 운영하는 '대학미술관'은 상호 보완적 요소가 많이 있다. 소장품의 규모, 소장품의 가치, 소장고 유무, 전시설비와 전시공간의 규모 등의 차이로 각각 특색이 있다. 대부분의 미술관이 입장수입을 기본으로 하지만 문신미술관은 외국의 유명미술관처럼 다양한 아트 상품들을 판매했으면 하고, 지속적으로 상품을 개발했으면 한다.
흠집 난 미술관은 바다를 조망하는 전망을 잃어버렸다. 바닷가에 즐비한 러브호텔이 마산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일반 관광객들이 단체로 머물 대형 숙소도 없다. 예향 마산이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는 건전한 장소로 인식되기 보다는 먹고 마시고 향락을 즐기는 공간으로 인식되기 십상인 곳이다. 모든 문화적 역량을 집중할 생태계를 상실한 가운데 문화예술인들의 창작활동을 고무시키는 공간으로써 시민들의 문화예술 충족과 건전한 미술활동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문신미술관은 각종 강의, 세미나, 문화강좌가 열리는 공간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문신미술관은 온도, 습도, 조도의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진 미술관이다. 적절한 입장료로, 인기를 끌 수 있고, 관객들의 편의를 위해 개관시간의 탄력적 운용과 개관일수도 가능하다면 고려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미술관의 안전을 위한 경보시스템과 천연재해나 안전을 감독하는 순찰 업무가 병행되어야 한다. 주민들, 미학자, 미술가, 건축가, 건축디자이너, 도시계획 전문가, 환경문제 전문가, 조경 전문가, 문화행정가 등이 도시미학적 차원에서 문신미술관 주변 환경을 재진단하여야 한다.
하늘을 막고 갑갑하게 들어섰던 아파트를 걷어내고 문신미술관이 바다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 태어난다면 마산은 그 아파트 철거 비용의 몇 배를 거두어 드릴 수 있을 것이다. 교육, 문화, 예술, 엔터테인먼트 요소까지 잘 갖춰진 격조높은 도시 재생 사업의 대표적 경우는 미국 뉴욕의 하이라인 파크, 첼시마켓, 미트패킹 지구와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 브릭레인 등을 들 수 있다. 탄광촌,발전시설, 달동네, 쓰레기 하치장 등을 이용한 재생사업은 고급 디자인으로 새롭게 될 수 있다. 마산, 새로운 문화도시 이미지의 핵심은 문신미술관에 있다. 문 신 미술을 찬찬히 들어다 보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문신 예술정신 계승을 위한 예작(藝作)들은 성과를 거두었다. 최성숙 관장을 비롯한 남겨진 자들이 여러 오해와 비난을 감수하고 20년에 걸쳐 정성을 다해 노력한 결과는 헌신, 그 자체였으며 그 정성은 치하 받아야 마땅하고, 그 한계점을 시 당국은 잘 알고 있기에 문신미술관 사업에 매진한다면 대기업 유치와 같은 성과가 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21세기는 굴뚝 산업이 아니고 정보, 문화예술, 서비스 산업이 주도하는 사회이다. 잘 숙지하여 마산을 문화산업, 특히 문신예술이 지역사회를 먹여 살리는 호기를 이용하여보자.
○문신 생존 시의 예술사적 흔적
1932-9세 /페인트 그림 배움.
1935-12세 /마산공립보통학교 27회로 졸업
1936-13세 /13-14세 마산 영화개봉관 간판을 그림. 진주, 통영까지 원정 다님.
1939-16세 /초등학교 친구 서두환과 함께 일본으로 밀항함.
1940-17세 /동경의 일본미술학교 양화과에 입학. 교내 데생대회에서 1등을 함.
1943-20세 /일본 예술인촌에서 ‘자화상’을 그림.
1945-22세 /광복과 더불어 마산으로 돌아옴.
1946-23세 /봄철 ‘마산다방’에서 최초로 유화 및 부조 개인전, 마산 중등학교 미술교사 부임
1947-24세 /교단을 사직함. 부산 마산 대구 진주 경주 등에서 10회 개인전.
1948-25세 /3월 제1회 문신 양화개인전, 서울 동화화랑(현 신세계백화점)
1949-26세 /서울 ‘동화화랑’ 제2회 개인전.
1950-27세 /종군화가로 입대하여 판화 ‘야전병원’ 제작
1953-30세 /서울에서 대규모 양화전을 가짐.
1957-34세 / ‘모던아트협회’ 참여. 박수근 한묵 박고석 천경자 등과 교류
1959-36세 / 마산 백랑 다방, 외교구락부, 일신 다방 등에서 수차례 도불전,
당시 활동상을 미공보원(USIS) ‘리버티뉴스’로 극장에서 상영.
1961-38세 / 프랑스에서 이응로 김흥수 만남. 김흥수 소개, 라브넬 성 성곽 보수공사를 맡음
1965-42세 / 홍익대에 실기강사로 출강, 석고 조각 창작
1967-44세 / 서울 신세계백화점에서 대규모 2차 도불전, 프랑스에서 ‘개미’ 조각 창작
1970-47세 / 8월10일 남프랑스 발카레스 야외조각장에 “태양의 인간”(13M)세움.
1971-48세 / 1. 23일 ‘리아-그랑빌러’ 화랑 개설.
스위스 ‘바젤 국제아트페어’에 출품하여 전량 매진됨 (3〜4점)
1972-49세 / 파리 지하철전에 대형 ‘석고 조각’ 출품, 프랑스 3TV에서 문신예술 소개
1973-50세 / 4월 피카소 서거, 피카소 추모전에 대형 폴리 조각 출품
9월 대형 석고 조각 작업 중 추락해 척추 부상.
1975-52세 / 11월, 파리남쪽 25km 후렛떼에서 농가 창고를 빌려 새로운 아틀리에를 만듬
1976-53세 / 서울 귀국전, 진화랑 (11. 3-11.15). 마산 귀향전 (12.6-12.12)
1978-55세 / 주불 한국 대사관의 재불화가 모임에서 동양화가 최성숙과 첫 만남.
1979-56세 / 1. 12. 최성숙이 ‘리아 그랑빌러 화랑’ 방문, 후렛떼의 문신 아틀리에 방문, 문 신이 청혼함. 5월 9일 서울 반포동의 최성숙 자택에서 문신-최성숙 결혼식
1980-57세 / 2월 마산 MBC 귀향 초대전, 10월12일 마산으로 영구귀국 함
1981-58세 / 미화랑 초대전 (5.15-22.) KBS ‘TV 미술관’ 제작.
1982-59세 / 신세계 화랑 초대전 (11. 15〜27)
1983-60세 / 마산 동서화랑 초대전 ( 12.10-12.16)
1984-61세 / 경상남도 문화상 수상, 마산 돝섬에 ‘평화’ 작품 세움. 남강대교 조형물 제작.
처음으로 스테인리스 스틸이란 신 재료로 ‘和’ 제작.
1985-62세 / 미술관 건립공사 본격적으로 착수, 한일그룹과 부산일보 본사 조형물 제작
1986-63세 / 서울 예화랑 초대전 (3. 18-3.28.)
1987-64세 / 문신 채화전(서울 한국화랑, 5. 29 〜 6. 12), 5월 4일 문신미술관 상량식 거행
1988-65세 / ‘올림픽 1988’ 설치(25M, 9. 12) (미 NBC, 영 BBC 현장 인터뷰 생방송 )
1989-66세 / 프랑스혁명 200주년 24인전 참가 (파리 아트센터),
서울 예화랑 초대전, 브론즈 작품 선보임. (10. 27〜11. 5)
1990-67세 / 문신예술 50년 초대전, 프랑스, 파리 아트센터 (2. 20〜4. 200
유고 자그레브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 6월-7월 )
유고 사라예보 시립미술관 초대전. (7월〜8월)
비영리 재단법인 문신미술관 승인 ‘미술관등록’
1991-68세 /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립역사박물관 초대전 (5. 4 〜 9. 4).
마산 송하 화랑 초대전, (10. 18〜31)
서울 빈켈 화랑 초대전, (12. 3〜15)
1992-69세 / 1,6 부산 백병원에서 위암초기 발견, 프랑스 정부가 英 헨리 무어, 美 알렉산더 칼더와 동시 초대 ‘세계 3대 거장전’ 개최함
파리 시청 살 셍쟝 시립미술관에서 문신 조각전 (7. 30 〜 10.3)
10.9 제11회 세종문화상 수상(문화부문)
11.3 프랑스 정부에서 ‘예술문학 영주장’ 훈장 전달.(주한 프랑스대사관)
1993-70세 / 국제신문사 사옥 조형물 제작, 양산 통도환타지아 내 조형물 제작.
1994-71세 / ‘문신 예술 50년’ 초대전. 조선일보-MBC 공동주최(4. 22 〜 5. 8)
‘문신미술관’ 완공 개관(5. 27)
미술관 인접지역에 고층아파트 건립허가에 크게 상심
대퇴부 골절로 마산 복음병원에 입원함. 위암이 재발 됨(8. 3)
12.27-2005.2.27 대형 불빛 조각전
1995-72세 / 1월. 의료진들이 ‘위중한’ 진료결과 통보함.
4. 12 비상 재단임원회의를 소집, 이사장직 사퇴함.
4. 14 경남대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 대 국민성명서 발표
5. 16. 마산의료원에 입원
5. 24 타계
5. 27. 10:00. 천주교 마산 남성성당에서 영결미사
해마다 반복하는 말이지만 나라의 국격은 예술가들이 상승시켜준다. 문신의 예술정신은 위대했고,문신의 조각과 기타 예술품들은 그의 사후에 더욱 빛나고 있다. 그의 예술품들은 어디에 어울려도 어울리고 소통이 되고, 가변의 역사를 써 낼 수 있는 수작들이다. 이제 지구촌 사람들은 그의 훌륭한 작품들과의 본격적 조우를 해야 한다.
문신 예술이 프랑스와 독일, 전 유럽을 돌며 전시되었을 때 전 유럽인들로부터 혼절에 가까운 열정적 환호를 받았다. 문신 아트상품의 고급화, 고전적 품위와 문신예술 자체의 아름다움 도출로써 상품개발의 절대적 필요성이 인지되어져야 한다. 세계적 브랜드로 확장된 문신예술상품들을 보고, 만나고 싶다.
결론적으로 한 나라의 예술을 통한 국가 간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서 고려할 문제점은 다음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예술작품의 생활화와 대중화를 통해서 그 나라의 문화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며 그것이 곧 그 나라의 문화지표나 경제지표 등으로 이어지는 것이 오늘날 세계의 추세다. 예술작품의 생활화와 대중화를 이루기 위해 전문직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 질 필요가 있다. 또한 전문가들의 이런 모든 활동을 하나의 창작활동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모든 일의 결과는 일하는 자의 마음가짐에 달렸다.
여기서 올바른 마음가짐이란 순수와 열정이며, 이것이 곧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이 때 실수나 실패는 염두에 두면 안 된다. 반드시 성공해야만 한다.
셋째, 우리가 열심히 해야만 하는 이유는 개인에게는 성취감에서 오는 행복감이 있고, 나라에는 국가 간의 보이지 않는 경쟁을 통해 경제력을 높이는 원동력이 된다. 이를 위해서는 투철한 국가관의 확립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최성숙(한국화가)은 작고한 문 신 선생의 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