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과 채찍의 역학
-이시환의 제7시집 『우는 여자』를 읽고
“저의 고통, 부자유는 민족의 그것과 일치․일체 되어 있고, 민족이 고통․불행․부자유에서 구원되었을 때, 나도 거기에서 해방되겠지요.”(1973년 3월) 이 글은 이른바 ‘서씨 형제’사건으로 투옥된 재일한국인 서승의 말이다. 1973년 3월 서울 구치소에 수감 중 한 말이다. 13년 후 그는 대전교도소에서 남긴 편지글에서 “벌써 봄이다. 3층에 있는 나의 방에서 보이는 산야는 아직 황량한 황야의 풍경이긴 하지만, 밝고 강한 햇살에 흙이 녹아서, 얼마 안 있어 강인한 들풀이 싹을 틔울 것이다. 신생新生이 이 세상에 가져다줄 것을 절실하게 기원하면서.”(1986년 3월) 70년대의 민주화운동의 흐름 속에서 서승․서준식 형제의 투옥은 한국사회와 일본사회에 큰 이슈를 던져 주었다. 무려 17년간의 긴 투옥생활 중 정치권의 민주화․반미투쟁선언을 하며 51일간의 단식투쟁(헝거 스트라이크)도 하였다는 사실과 ‘비전향’을 이유로 장기 독방 수형생활을 집행당하여 인권원칙에 반하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또한 부단한 전향 강요 속에서도 남북통일과 민주주의를 구하는 신념으로 거부하였다. 신체적․정신적 고통과 부자유를 민족의 그것과 동일시하면서 민족이 고통․불행․부자유에서 구원되었을 때 자신도 거기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87년의 대통령 직선제가 이루어지는 한 해 전인 ’86년 3월에 그는 서울의 봄과 함께 신생과 희망을 3월의 황량하고 차가운 감방에서 내다보았다. 서승에게 민족은 자신과 동일하다. 1973년 3월 13일에 무기징역의 판결이 확정되어 길고 긴 옥중 생활을 보낸 그에게 국가보다 민족이 우선이었다. 이 형제들은 1971년 4월에 반공법․국가보안법위반 등 혐의로 무기징역을 언도 받아서 17년만인 1988년 5월 25일 주거제한 처분의 조건이 붙은 상태로 동생 준식 씨가 먼저 출옥했다. 1988년 5월 25일 아사히신문 석간에서 ‘서씨 「40세의 날」의 자유’라는 제목으로 그의 출옥 소식이 보도되었다.
루이 알튀세르(Louise Althusser, 1918-1990)는 이데올로기와 무의식을 접목하면서 국가를 만들어진 거대한 조직으로 보면서 그 예로 서양 중세의 그리스도교 신국(神國)의 이데올로기와 체제를 들고 있다. 근대 국가의 기초가 이 중세의 신국과 그 시스템이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국가의 작동원리를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폭압적인 국가기구(RSA)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ISA)이다. 전자는 군대, 경찰, 사법기관, 교도소, 병원 등의 기구들이고 후자는 교육, 문화, 스포츠, 매스컴 등이 이에 속한다. 국가 시스템의 유지는 이 두 개의 기구에 의해서 작동된다고 한다. 그러니 국가가 그 구성원인 국민을 길들이는 방법은 바로 이 두 기구를 통해서 이루어지므로 한 국가의 국민이 그 국가의 정권에게 자신들의 권력을 선거를 통하여 이양하면서도 그 행정력에 지배를 받는 것이다. 이것이 대의민주주의의 시스템이다. 당근과 채찍은 국가가 국민을 길들이는 방법임을 알튀세의 구분에서 찾는다. 서씨 형제들에게는 민족이 존재하지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일본사회에서 재일한국인으로서의 사회적 차별과 모국의 통일을 민족에서 찾는다. 그들에게는 민족의 통일이 있지 남과 북 어느 한쪽의 국가나 정권은 투쟁의 대상이리라.
이시환의 제7시집 『우는 여자』(2003)는 ‘풍자, 비꼼, 웃음, 모순(satire)’의 기법이 두드러진다. 그가 비꼬는 대상은 무엇인가에 중심을 두며 이 시집을 읽어야 한다. 그가 ‘일러두기’에서 “겉으로 드러난 편 편의 의미에 대해 너무 집착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자칫, 천박한(?) 섹스 탐닉주의자나 비도덕적인 인간의 배설물로 내비칠 수 있으니까 말이다.”라고 부드러운 경고의 말을 하면서 이 시집을 읽는 독자들이 세상과 인간을 보는 눈의 ‘개안 내지는 개벽’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 한 권의 시집을 통하여 세상과 그 세상을 이루는 인간에 대해 마음의 눈이 열린다는 의미는 얼마나 큰가? 어떻게 세상과 인간의 본질을 이 한 권의 시집으로 다 파악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만 있다면 이 시집은 과연 성공한 시집이 될 것이다. 이 시집이 독자들에게 팔리고 안 팔리고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팔려야 많은 이들이 개벽․개안을 하는 것이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시집이 많이 팔릴 수 있을까? 여기에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시인이 시집이 많이 팔려서 먹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시를 쓰는 것을 취미로 하지는 않는다. 먹는 것을 마련하고 시를 여기로 쓰는 것은 더욱 아닐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 시인이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면서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한다. 이 소통에 대한 원의를 담은 시가 얼마나 잘 제조되었고 얼마나 출판전략이 좋았느냐에 따라서 판매부수가 올라갈 수는 있다고 해도 여전히 시를 읽은 사람은 적다. 시를 쓰거나 시를 연구하거나 시를 가르치거나 시를 특별히 좋아하는 독자들에 한해서 시집은 유용할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밥이 되지 않는 시를 쓴다. 왜 그는 시를 쓰는가? 시를 써서 밥이 되지는 않으나 여가생활, 명예 추구, 인간 사이에서 고독함, 세상과의 길항, 자신의 존재론적 고뇌 등과 같은 이유로 인해서 쓰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정화하기 위해서 쓰는 것인가? 아니면 뭔가의 목적성을 띠고 시라는 형식을 통하여 대중에게 선전, 선동하여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시인은 쓰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시환 시인은 이 시집의 자서에서 “여기 실리는 시들의 대부분은, 2002년 12월 30일 오후 시간부터 쓰기 시작하여 2003년 1월 5일 새벽 사이에 걸쳐, 그러니까 약 7일간 다 썼던 것으로, 내 생애 처음 있는 기이한 일”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자서의 글에서 유추되는 바, 이 시집의 시들을 쓰기 전에 이시환 시인은 이렇게 많은 시편들 -정확히는 118편- 을 완성한 적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많은 양의 시를 약 7일간의 짧은 시간에 다 쓰는 일은 그의 시업 중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는 기이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마치 자동기술처럼 내면의 솟아오르는 무언가를 게워내는 데에 7일을 걸려 다 게워내었다는 의미이다. 시인은 7일간의 어쩌면 긴 배설을 하였다. 그런데 어떤 배설인가? 배설 이전에는 어땠는가? 배설 이전에 비해 배설 이후에 어떤 느낌이 그에게 찾아왔을까? 시원함일까, 허탈함일까 아니면 후회감일까 만족감일까 이것 또한 독자의 입장에서 궁금한 사항이다. 좌우간 그에게는 시원함과 만족감이 찾아왔지 않을까 추측한다. 그 배설의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 필자에게는 그것이 ‘비꼼’의 전략에서 그 비꼼이라는 틀 속에 집어넣어서 돌리니 이렇게 많은 시가 쏟아져 나온 것이라고 본다. 이 시집의 시편들은 그런 비꼼의 기법에서 오는 힘을 받은 것이다. 그러니 서정시의 무거운 감성의 외투가 사라진다. 가벼운 말들이 가볍게 쏟아지는 느낌으로 이 시는 술술 넘어간다. 이렇게 술술 새어나오는 내면의 시의 방에서 두루마리 화장지가 술술 풀리듯 그는 한없이 허옇게 풀려진다. 그가 풀어낸 말들의 화장지가 어디까지 닿을 것인가? 그의 이 말들이 얼마만큼의 내압에 견디지 못하고 가공할 속력으로 분출되었으며 그 말의 분사가 어느 범위까지 뿜어졌느냐는 중요하다. 그러니까, 아래로는 한없이 설사처럼 배설하고 위로는 한없이 게워낸다. 복부의 위장과 7미터의 소장과 대장에 순대 속처럼 꽉꽉 채워져 있는 것은 그의 영혼에 정신에 마음에 둥지를 트고 서식하거나 기생하고 있는 무의식과 전의식, 의식하는 단계의 모든 말들이리라. 이 말들은 어떤 의미나 기호를 정확히 가지지 않는 말과 감정이 뒤섞인 것이거나 말이 되기 전 단계의 감정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것들을 쏟아낸 것이 바로 그의 시가 된 것이다.
세상엔 그런 여자도 있다.
세상엔 그런 풀꽃 같은 여자도 있다.
오르가즘이란 산의 7부 능선만 올라가도
신음 대신 간헐적으로 울기 시작하는 여자.
8부, 9부,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슬픔의 바다를 토해 놓듯이
허허벌판에서 엉엉 우는 여자.
그녀의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으면서
더욱 힘 있게, 더욱 깊숙하게, 더욱 빠르게
구석구석 몸 안에 퍼져 있는 불씨에 불을 댕기면
그녀의 험준한 계곡에선
쏟아지는 폭포수 소리가 들린다.
분명 이 세상을 처음 나올 때의 울음소리보다
더욱 격렬하고, 더욱 원시적인,
기쁨과 슬픔이 분화되기 전의 울음을
천지간에 쏟아놓는 여자.
세상엔 그런 여자도 있다.
세상엔 그런 풀꽃 같은 여자도 있다. -「우는 여자․・2」전문
이 시에서의 여자처럼 이시환의 시편들은 세상을 향하여 사람들을 향하여 운다. 이 울음은 괴이하고 신기하고 이해할 수 없는 울음으로 슬픔과 기쁨이 분화되기 전의 울음이다. 슬픔인지 기쁨인지도 모르는 어정쩡하기도 하고 알 듯도 말 듯도 한 그런 울음이다. 그러므로 이 여자는 바로 시인 자신이다. 「우는 여자․1」에서처럼 ‘구석구석 알몸 속으로 숨겨진 슬픔의 씨앗들이/이성적 제어력이 약해진 틈을 타/일제히 싹을 틔우며 몸 밖으로 나오는 탓일까./라고 하여 이 여인은 아무리 말려도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바로 이 시 구절에서와 같이 시인의 무의식과 전의식 그리고 의식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이것은 멈출 줄 모르는 대량생산 체제의 컨베이어 벨트에 실린 부품처럼 낱낱이 하나의 몸체로 조립되기 전의 모습으로 계속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이 시집의 시편들은 그런 컨베이어 벨트에 실린 시인의 무의식과 전의식 그리고 의식이 각각 언어로 조립되기 위하여 계속 쏟아져 나오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러니 생리적으로는 약 7일간의 긴 배설이지만 역사적으로는 그의 반생 동안 쌓인 것의 배설이니 짧은 배설의 기간에 죄다 쏟아놓은 것이라 하겠다. 그런 그의 시가 비꼼을 통해서 쏟아졌기에 더 폭발적으로 짧은 시간에 긴 배설을 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 배설은 큰 소리로 엉엉 우는 대성통곡, 잔 울음인 흐느낌, 적당한 소리를 지닌 울음, ‘기쁨과 슬픔이 분화되기 전의 울음’, 교성, 땀, 여성의 분비물, 남성의 정액, 몸냄새, 눈빛, 토사물, 똥, 오줌 이런 것들이 모두 섞인 것들이다.
어인 일인가?
오늘은 유별나게 도로가 막히고
지하철조차 돼지 창자로 만든 순대 속이 떠올려질 만큼
미어 터진다.
알고 보니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다들 신촌으로, 신천으로, 영등포로,
강남으로, 대학로로 몰려가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다가,
눈이 맞은 자들은 여관으로, 모텔로,
비좁지만 탄력 있는 자신들의 승용차 안으로 기어들어간다.
이 날 밤, 자지러지던 이무기들의 즐거운 비명이
현란한 네온사인 불빛 속으로
꿈틀거리며 기어 나와 발에 밟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근심 어린 얼굴은
어디에서도 보이질 않는다.
이날 밤, 여성들의 사타구니 밑으로 사정(射精)했던
남성들의 고단백질을 칼로리로 환산한다면
과연 얼마나 되며,
그 에너지로 빌딩을 세우듯
이 땅에 평화를 세운다면 어찌 될까?
크리스마스이브에 정작 우리 곁에 계셔야할
예수 그리스도는 어딜 가시고,
질척거리는 죄인들의 욕망만이
골목골목에서 성(城)을 쌓는구나. -「크리스마스이브」전문
「크리스마스이브」는 풍자나 비꼼을 지나서 웃음을 자아낸다. 이시환이 이 시집에서 보여주는 전략은 바로 이 시에서 나타난다고 하겠다. 세타이어(satire)란 비꼼과 풍자, 웃음, 모순을 말한다. 그는 거룩하며 고요하고 평화로워야 할 크리스마스는 어디가고 없는 현실을 이렇게 남녀 간의 성 풍속도를 통하여 모순되고 부조리하며 타락한 세상을 비꼬고 풍자한다. ‘남성들의 고단백질을 칼로리로 환산’이라는 우스꽝스러우면서 그로테스크리얼리즘의 기법을 정사의 모습을 통해 웃음을 자아내게 하고 여기에서는 성에 있어 우위의 점하고 있는 남성성을 뒤집으면서 비꼬고 있기도 하다. 빌딩은 남근 상징이며 사정, 고단백질 칼로리, 거짓되며 타락한 이 땅에는 사회적 정의의 결과인 진정한 평화가 존재하지 않음을 고발한다. 그러니 ‘지하철조차 돼지창자로 만든 순대 속을 떠올릴 만큼 미어터지는’ 타락한 인간들이 흥청거리며 욕망의 불꽃을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마치 개떼들의 교미처럼 인간의 동물성을 발가벗기고 그런 질척거리는 인간들의 욕망만이 뒷골목의 어둔 곳에서 성을 쌓는다고 개탄하고 있다. 빌딩과 성(城), 이무기(뱀)는 모두 남성성을 상징하고 있고, 그것의 욕망만이 넘치니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는 부재한다는 의미의 시이다. 이러한 욕망의 메커니즘은 새디즘[sadism]과 매저키즘[masochism]의 구조로 되어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이러한 힘과 권력의 역학이 남성과 여성, 국가와 국민, 개인과 전체의 사이의 구조로 작동되는 욕망의 메커니즘이다.
짓밟아 주세요.
짓밟아 주세요.
이 편안함과 안락함보다 고통이 더 짜릿한
내 몸 안의 푸른 생명의 바다로 하여금
고개를 들게 해줘요.
제발, 내 안의 나를 일으켜 주세요.
인정사정없이 나를 짓밟아 줌으로써
내 안의 나를 깨워 주세요.
이 혹한을 거든히 이겨내는 보리싹처럼
나를 짓밟아 주세요.
나를 짓밟아 주세요. -「눈으로 말해요」전문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편안함과 안락함을 거부하고 오히려 고통을 받는 쪽을 욕망한다. 이 욕망은 매저키즘의 원리이다. 이 욕망을 답청(踏靑)에 비유한 시다. 그 목적은 ‘내 안의 나’를 깨우기 위해서이다. 굼벵이는 밟아야 꿈틀댄다고 한다. 밟히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굼벵이보다 밟힘으로서 꿈틀대는 굼벵이가 되고자 한다. 그 이유는 편안함과 안락함을 버리고 내 몸 안의 푸른 생명의 바다가 고개를 들게 하고 내 안에 잠자는 나를 깨우기 위한 것이다. 종교적 고행이 자신의 신체를 통해 육신을 넘어서 자기를 버리고 영원한 생명의 진리를 구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러한 피학적 욕망은 새디즘과 함께 맞물려 돌아가는 것으로 남과 여, 국가와 국민의 관계와 같은 상징계의 질서에서 툭툭 터져 나오는 것이다.
채찍과 당근이라, 참 좋은 말이지.
그리 좋아하는 당근은 주지 않으면서 채찍만 가해 보라.
말 못하는 말도 화를 내며 그대를 거절할 거야.
그렇다고 당근만 배불리 먹여 봐라.
네가 가야할 때는 몸이 무거워 잘 뛰지도 않을거야.
그러니 적당히 당근을 먹이면서
채찍을 가하는 게 좋아.
이것은 말 타는 녀석이 말에게나 하는 짓이지.
그런데 요즈음 이 당근과 채찍이,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아주 편리한 공생의 원리가 되고 있잖아?
미국의 부시가 북한의 김에게,
조폭의 두목이 아랫것들에게,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즐겨 쓰는 민주적 방식이니
채찍과 당근이라, 참 좋은 말이지.
스스로 말(馬)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많으니
그 말을 타고 달리려는 이도 있게 마련 아닌가 -「채찍과 당근」전문
당근과 채찍을 적당히 가하면서 굴러가는 시스템을 조롱하는 이 시는 국가/국가, 사람/사람, 남자/여자, 미국의 부시/북한의 김, 두목/아랫것, 가진 자/못 가진 자, 말이 되고자 하는 사람/말을 타고 달리려는 사람의 역학 관계 속에서 즐겨 쓰는 민주적 방식이 바로 당근과 채찍이다. 민주주의의 체제가 지니는 겉과 안을 드러내어 그 결함 부분을 꼬집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스스로 말이 되고자 하는 사람과 짓밟히기를 바라는 피학적 욕망은「당신은 천사 나는 죄인」에서 “분명 내가 너에게 먹히고 싶었다./그 순간부터 나는 너의 노예가 되고 싶었고./나는 너의 순종하는 종이 되고 싶었다.”라고 시적 화자는 부르짖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정치와 남녀 간의 섹스가 한 통속의 역학 관계의 구도에 있음을 말한다.
정치와 섹스는 한 통속이다.
여러 사람을 상대로 거짓말을 해도 그럴 듯하게 해야 통하는
정치와 섹스는 단순하지만
남자들을 현혹시키는 힘이 있다.
정치와 섹스는 한 통속이다.
한 여자를 다루는 데에도
정치적 판단과 제스추어가 필요하듯
많은 사람들을 기만하는 데에도
한 여인을 다루듯 충분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정치와 섹스는 한 통속이다. -「정치와 섹스」전문
생 텍쥐페리는 동화 『어린 왕자』에서 상징질서의 ‘길들이기’를 여우를 통해 어린 왕자에게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라고 가르쳐준다.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를 여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준다.
넌 아직 나에겐 수많은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꼬마아이에 불과해. 그러니 나는 너를 필요로 하지 않아. 그리고 또 나 역시 너에게 아직 수많은 다른 여우들과 똑같은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지. 너는 나에게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아이가 될 것이고, 나는 너에게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여우가 되는 거지…
정치와 섹스 역시 길들이기이며 동시에 관계 맺기이다. 여우와 어린 왕자는 일대일의 관계 맺기를 통하여 서로에게 길들여지고 여우를 친구로 얻은 어린 왕자는 여우의 지혜를 통해 자기 별에 두고 온 꽃과 관계회복을 하는데 실마리를 제공받는다. 수 천 송이 꽃과 어린 왕자가 자신의 별에서 애정을 보인 꽃과는 다르다는 의미도 그 꽃이 바로 어린 왕자의 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가와 국민의 관계인 정치는 이시환 시인에게는 하나의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기만하며 길을 들이는 것이거나 깃대를 꽂고 따르라는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 말이 되고자하는 민주주의의 인민들은 이 당근과 채찍의 맛에 길들여져 있을 뿐이며 주체로서의 자리매김 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의 경제 시스템인 자본주의의 추악한 몰골을 “그의 가벼운 입술과/그의 얕은 머릿속은 천박하기 짝이 없네.”라고 일갈하면서 “열리고 닫힘이 따로 없고/어둡고 밝음이 따로 없는 곳에서나/그가 설 명분이 사라지려나.”라고 하여 민주주의의 존재론적 성찰을 들여다보게 한다. 민주주의는 닫힌 사회 어두운 구석이 여전히 있을 때 존립의 이유가 있을 뿐이지 열림과 닫힘이 따로 없고 어둡고 밝음이 따로 없는 곳에서는 그 설 명분이 사라질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가장 깨끗해야할
정치판이 썩어 문드러졌다고들 말들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 국민에 그 정치꾼이네
...................................
지금 우리에겐 혁명이, 혁명만이 필요하네.
총칼로써 사람을 죽이고
권력을 휘어잡는 혁명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문제가 무엇인지
눈을 바로 뜨게 하는
그런 혁명이 필요하네.
그런 뉘우침과 깨우침이 필요하네.
...............................
이제 우리는 무엇을 믿고 ,
무엇에 힘을 얻어 살 것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혁명, 혁명뿐이라네.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그 자리에 새 살이 차오르게 하는,
그리하여 우리의 건강한 삶과 미래를 보장해 주는
그런 혁명, 혁명만이 필요할 뿐이네. -「우리에겐 혁명만이 필요해」부분
주위의 사람들에게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을 일삼는 부부를 보고 주위의 사람들은 그들을 ‘똑같으니 살지’라고 말한다. 서로를 길들인 결과 그들은 둘이면서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다. 한 국민은 그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고 한다. 이시환 시인은 권력을 잡기 위한 혁명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문제’에 눈을 바로 뜨게 하는 깨끗한 혁명이 이 시대에 요구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시인으로서의 이시환은 「나를 건드리지 마」에서처럼 ‘폭발 직전의 침묵’으로 머물고자 한다. 이 폭발 직전의 침묵이란 혁명 전야의 고요함이 될 것이며, 우리의 눈을 개안하고 천지가 개벽하는 시의 씨앗들을 내장한 것이다.
나를 건드리지마.
내가 입을 열면 세상이 발칵 뒤집혀서가 아니다.
누군가 나를 건드리면 내가 폭발하고 마는 부비추랩이거든.
나를 건드리면 내 몸 안에서는 시가 마구 쏟아져 나와.
그 알몸의 시들이 다시 새끼들를 마구 쳐대어
방심하다가는 그놈의 시들에 내가 압사당하거나
나의 진을 다 빼앗기어 시들시들 내가 죽을 수도 있거든.
그래서 나는 아직 시가 되지 못하는 말들을 가득 껴안고서
잔뜩 웅크려 부치고 있는, 폭발 직전의 고요가 더 좋아.
설령 세상에 시 한 편을 내놓지 못한다 할지라도
아직도 시가 되지 못하는 말들을 가득 품고서
잔뜩 웅크려 부치고 있는, 폭발 직전의 침묵으로 머물고 싶어.
나를 건드리지마.
내가 입을 열면 세상이 발칵 뒤집혀서가 아니다. -「나를 건드리지 마」전문
되짚으면 보면, 그가 약 7일간 썼다는 이 시집은 바로 침묵으로 일관하고자 하는 그를 건드리고 밟은 것이다. 무엇이 그를 건드렸고 밟아서 꿈틀대게 하여 그에게 내장된 부비추랩을 폭발하게 하였을까? 이 시집은 그 폭발로 마구 쏟아져 나온 시들로 가득하여 118편의 시를 약 7일만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쓴 것이다. 시편들을 쏟아내게 된 폭발의 원인이 뭔가 수상하다. 다만 ‘70년대 모국의 민주화를 위해 폭압적인 기구에 탄압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청춘을 바치고 신념을 견지했던 재일한국인 서승의 옥중 글처럼 필자도 황량한 사막이나 광야 같은 풍경 속에서도, 밝고 강한 햇살이 이 세상에 가져다줄 새 생명을 기원하면서” 글을 마칠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