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
개회
육정학/본회 홍보이사
인사말씀
대중과 예술의 경계 설정........ 변인식/본회 회장
주제발표 및 질의
사회
김진묵/음악평론가,묵사운드 대표
발제자
문학부문 / 고명철(광운대 국문과)
미술부문 / 고충환(홍익대 회화과)
연극부문 / 김승옥(단국대 연극학과)
무용부문 / 양선희(세종대 무용과)
영화부문 / 장석용(경희대 신문방송학과)
음악부문 / 김종만(음악평론가)
총괄ㆍ기획
육정학 / 경북 외국어대 영화영상과
폐회 및 공지사항
□ 인사말씀
불타는 내장산 자락에 마련한 토론의 장
변 인 식 (본회 회장)
2004년 가을에 「제 25회 예술 평론 세미나」가 베풀어지는 곳은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붉은 단풍이 조화를 이룬 내장산 「알프스 장」입니다.
이 곳을 찾은 회원들이 빨갛게 물든 단풍 아래서 가을 정취를 만끽할 토론의 장을 마련하였습니다. 토론의 주제는 <대중과 예술의 경계>입니다.
태초로부터 인간은 경계선 상에서 망설였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금단의 과실>에 대한 유혹을 받았습니다. 전쟁터의 병사들은 언제나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 <야경(夜景)>에는 늘 빛과 그림자의 경계가 있습니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김범우는 한 때 좌와우의 경계선에서 방황합니다. 포르노그래피를 놓고 「예술이냐 외설이냐」를 따지는 심의의 경계선도 있습니다.
김진묵(음악평론가)님의 사회로 진행될 이번 심포지엄은 발제자인 양선희(무용). 고명철(문학), 고충환(미술), 김승옥(연극), 장석용(영화), 김종만(음악)님, 그리고 객석의 질의자들이 한 데 어우러져 보다 알찬 토론의 장을 마련할 것입니다.
미술 비평가인 허버트 리드는<예술의 의미>라는 저서에서 다섯 가지로 예술 작품을 분석하는 방법론을 제시 했습니다. 그것은「선의 율동, 형태의 집합, 공간, 빛과 그늘, 그리고 색채」입니다. 예술작품이 「대중과 예술의 경계」중 어느 쪽에 있느냐는 잣대는 언제나 평론가의 몫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04년 10월 23일
□ <예술평론가협회> 심포지움 발표 원고
문학장(文學場)의 역학과 문학의 대중성
고 명 철 (광운대, 문학평론)
1. 문학의 제도적 관점과 문학의 대중성
문학인들 사이에 행복한 고민(?)이 엄습할 때가 있다. 어떤 창작 성과가 기대 이상의 대중성을 확보했을 때가 그 경우다. 창작자는 자신의 작품을 많은 독자가 사랑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창작의 보람과 긍지를 가질 것이며, 그 작품을 발간한 출판담당자는 출판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그 출판사의 대중적 인지도를 높임으로써 출판의 이익을 안정적으로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창작자와 출판담당자 모두에게 대중성을 확보하는 과제는 서로의 발전을 도모케 하는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이 대중성을 떠올릴 때마다 늘 따라 다니는 해묵은 고민거리가 있다. 문학의 대중성 확보와 문학의 상업성이 맺는 불편한 관계가 그것이다. 솔직히 말해, 문학인들 사이에는 대중성을 썩 달갑게 여기지 않는 측면이 존재한다. 어딘지 모르게, 대중성을 띠고 있다는 것은 대중의 통속적 문화감각에 편승하여, 이 문화감각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처럼 간주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즉 대중성-통속성-상업성은 서로 들러붙은 채 문학인들의 윤리 감각을 통어(統御)하고 있다. 그런데 대중성-통속성-상업성에 대한 섬세한 판단(미학적 가치를 고려한 비평적 판단) 없이, 무작정 이것에 혐오와 부정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문학의 다가치(多價置) 속성에 대한 몰이해로 빚어진 단순성의 폭력이다.
이제 우리는 좀 더 이 문제에 대해 새롭게 섬세한 접근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문학을 둘러싼 문화예술환경이 급변하고 있는 엄연한 현실에서 종래의 문제틀(the problematics)로서 이 문제를 인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첨단의 시청각 매체들이 급부상함에 따라 문학의 존립 조건과 그 영역은, 이 같은 문화예술환경 변화의 국면을 외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문학은 급변하는 문화예술환경을 직시해야 한다. 문학은 정태화된 화석이 결코 아니다. 문학은 살아 숨쉬는 역사적 실체인바, 제도적 관점에서 문학을 새롭게 인식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나는 이 글에서 문학의 대중성 문제를 제도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이 같은 논의가 그동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논의들의 대부분은 텍스트에 관한 해석에 비중을 두어, 특정의 텍스트가 어떻게 대중성과 통속성을 지니게 되었는지를 분석하고, 그것이 자연스레 상업성을 확보한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논의들이 갖는 성과를 주목하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면, 대중성-통속성-상업성이 텍스트로부터 자연스레 추동된 것 못지 않게 그 텍스트가 놓여 있는 문학장(文學場)의 역학 속에서 의도적으로 밀접한 연동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다. 전자가 저자와 텍스트의 권위에 기반한 대중성-통속성-상업성의 측면이라면, 후자는 문학장의 역학을 배제할 수 없는 대중성-통속성-상업성의 측면이다. 내가 주목하는 바는 후자의 경우다. 특히 후기자본주의로부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에게 이러한 문학장의 역학에 주목하는 것은, 대중성-통속성-상업성에 대해 또 다른 생산적 논의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2. 독서 시장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기획된 대중성
논의의 구체성을 위해 지금, 이곳 우리 문학장의 모습을 살펴보자.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는 작품의 목록 중 단연 눈에 띄는 게 있다면 그것은 삼국지다. 삼국지는 이미 박종화, 김구용, 고우영, 이문열, 황병국, 김홍신, 박봉성, 정소문, 조성기 등의 작가에 의해 씌어진, 스테디셀러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삼국지가 우리의 독서 시장에서 이상 징후를 드러내고 있다.
그동안 삼국지는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하지만 이른바 이문열의 삼국지(1988년 민음사에서 초판 발행 이후 1400만부 이상 판매)가 대중성을 확보하면서 삼국지 시장을 평정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작가 황석영에 의해 씌어진 창비판 삼국지가 작년에 등장하면서 삼국지 시장은 후끈 달아올랐다. 대중 언론들은 앞다투어 이문열의 삼국지와 황석영의 삼국지가 맞부딛치게 되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었다. 실제로 황석영의 삼국지는 작가의 지명도에 힘입어 무서운 속도로 이문열이 독점하고 있었던 삼국지 시장을 위협해 들어갔다. 그러면서 이문열의 삼국지 또한 기존의 문화권력을 더욱 튼튼히 유지하기 위해 황석영의 삼국지에 밀리지 않는 출판 전략을 강구하고 있다.
이처럼 지난 해부터 뜨거워지기 시작한 삼국지 시장의 경쟁은 올해에 더욱 뜨겁다. 여기서 나는 삼국지에 대한 다양한 해석으로 인해 삼국지의 진면목을 독자들에게 읽힌다는 것 자체에 딴지를 걸 의향은 추호도 없다. 논자에 따라서는 이견이 있을 수도 있지만(국내의 한 소장 중문학자는 중국학술전문지인 <중국의 창>에 문학사에서 최악의 점수를 받은 작품이 한국에서 중복 출판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의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삼국지가 동아시아의 고전이라는 데에는 나 역시 이견을 갖지 않는다. 하여 다른 고전도 그렇듯이, 대중들의 문화 교양의 폭과 깊이를 더 하는 데 삼국지가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공감하는 바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고전인 삼국지를 읽히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문제점을 외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 이곳에서 삼국지는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서 가치를 지니는 것 이상의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삼국지는 문화상품으로서, 어떻게 상품으로 잘 포장하여, 자본의 교환가치를 극대화하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다보니 정작 중요한 삼국지 자체의 문학적?문화적 본래의 가치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게 되고, 세련되고 품위 있는 문화상품으로서의 교환가치에만 주목하고 있다. 자기 출판사의 삼국지를 읽어야만 삼국지의 진면목을 체득할 수 있다든가, 그래야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지혜와 덕목을 겸비할 수 있다든가, 진정한 교양인으로서 거듭날 수 있다든가, 하는 등의 온갖 선정적 수식어를 늘어놓으며 독자들의 독서 욕구를 자극한다. 요즘처럼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한 현실을 살고 있는 대중들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문화상품으로서의 삼국지가 갖는 문제점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가뜩이나 영상문화의 활황으로 인해 독서 시장이 침체 상태로 빠져들면서 영세규모의 출판사와 서점이 도산하는 상황을 직시해볼 때, 창비ㆍ민음사ㆍ김영사(작가 장정일의 삼국지 10권으로 출간될 계획) 등 영향력 있는 출판사들이 삼국지를 중심으로 한 독서 시장의 재편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다른 문화상품과 달리 책은 특정한 몇 권이 독점적 지위를 확보한다고 해서 독서 시장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는 없다. 비록 규모가 영세하고 영향력은 없을지라도, 출판사 나름대로의 편집 방향을 유지하면서 출판되는 양질의 책이, 독자들의 선택의 폭을 넓히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독서 시장을 진정으로 살찌울 수 있기 때문이다. 독서 시장이 전반적으로 침체 상태에 있다고, 이를 타개하나기 위해 엄청난 자본을 투자하여 삼국지와 같은 특정한 책을 과도하게 문화상품으로 포장하는 것은, 장기적 안목으로 볼 때 독서 시장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을 수 없다. 오히려 독서 시장의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고착화시킬 여지가 다분하다.
이렇듯이 삼국지가 대중성을 확보하는 문제는 문학장의 구조적 문제와 얼마나 밀접히 관련되고 있는가를 여실히 살펴볼 수 있는 한 사례에 불과할 따름이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또 다른 대표적 사례를 들어보자.
현재 대형서점가와 인터넷 서점에서 대중성을 가장 두드러지게 확보하고 있는 작품은 『다빈치코드』, 『11분』, 『연금술사』 등 외국문학이다. 앞서 논의 대상이 된 삼국지의 경우 비록 중국의 작품이지만, 우리 작가가 삼국지를 재해석하여 우리식 문화상품으로 대중성을 확보한 것이라면, 『다빈치코드』, 『11분』, 『연금술사』 등은 모두 외국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이 큰 차이를 지닌다. 여기서 문제의식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외국문학이 우리의 독서 시장에서 폭발적인 대중성을 띠고 있다는 것 자체에 딴지를 걸 수는 없다. 다만 내가 비판하고 싶은 게 있다면,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이들 외국문학의 대중성은 출판사와 각종 언론 매체의 관계 속에서 우리 독서 시장을 순식간에 잠식해들어갔다는 사실이다. 『다빈치코드』를 출간한 베텔스만 출판사는 다국적 출판경영 아래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 치밀한 마케팅 전략을 세워 우리의 독서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국내에 베텔스만코리아 출판사 경영). 그런가 하면 파울로 코엘료의 『11분』과 『연금술사』를 출간한 문학동네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우리 문학 시장에 빠른 속도로 편입하여, 단시간 안에 메이저 출판사로 무섭게 성장하였다. 이들 출판사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공격적 마케팅 전략을 실천함으로써 독서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수많은 대중들에게 그들이 출간한 책을 읽히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다빈치코드』, 『11분』, 『연금술사』 등의 대중성에서 간과해서 안 될 것은, 이제 대중성은 텍스트에 의해서 자연발생적으로 확보된다는 순진한 생각을 말끔히 지워내야 한다. 지금, 이곳에서 문학의 대중성은 철저히 기획되고, 잘 만들어진, 문화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이 엄연한 문학장의 문화논리를 직시해야 한다. 이렇게 기획된 대중성에 의해 독자는 자신도 모르는 새 문학적 대중의 문화감각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독자는 이렇게 획득된 대중성을 재생산하는 데 적극적 역할을 한다. 파울로 코엘료의 다른 작품들도 독자의 관심을 끌고 있으며, 코엘료의 작품과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다른 외국문학 작품들도 출간 예정 중에 있다고 한다. 이렇게 대중성은 문학장에서 기획되고, 만들어지며, 독자에 의해 재생산되고 있다. 이것이 작금 우리 문학의 대중성의 현주소다.
3. 비평가에 의해 트렌드화된 본격문학의 대중성
그동안 낯익은 문학적 관습을 염두에 둘 때, 문학의 대중성은 대중문학에 국한된 것으로 생각하기 일쑤다. 하지만 이제 이 문제를 대중문학에 국한시켜 논의하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편향된 시각인지 문학인 스스로 반성하게 된다. 문학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1990년대 이후 본격문학이 대중성을 외면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대중문학인 경우 아예 그 문학적 속성이 노골적으로 통속성을 표방하기 때문에 대중성에 집착하는 데 대해 이렇다할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대중문학과 대척점에 있는 본격문학인 경우 대중성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쟁점이 불거진다.
다시 한번 강조할 것은 문학이 대중성을 확보하는 것 자체를 금기할 수 없다. 문학이 대중과 유리되어서는 안 된다. 대중의 문화감각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중의 문화논리와 문화감각을 일방적으로 수용해서는 곤란하다. 때문에 문학의 대중성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본격문학이 직면한 문학의 대중성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이다.
그런데 그동안 본격문학을 둘러싼 대중성은, 앞서 삼국지와 외국문학의 사례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삼국지와 외국문학이 독서 시장에서 잘 팔리는 마케팅 전략을 적극화함으로써 대중성을 기획하고 있다면, 본격문학의 경우 독자 대중의 문화논리와 문화감각을 매우 적절히 관리하고 있다. 여기에는 본격문학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문학비평가의 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90년대 이후 우리 문학의 주요 화두는 개인의 욕망인바, 창작자뿐만 아니라 비평가 역시 개인의 욕망을 문학적으로 탐구하는 데 매진하였다. 1980년대의 주류 문학이 민족민주운동의 구도 속에서 공동체의 전망을 실현하는 데 역점을 둔 반면, 1990년대 이후 문학은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의 다양한 위상과 욕망에 대해 집요한 탐사를 시작하였다. 근대적 개인의 다양한 욕망을 문학적으로 해부하는 가운데 일궈낸 문학적 성과는 작지 않았다. 하여 1990년대의 삶을 표방하는 걸출한 작가들을 키워내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문제를 지나칠 수 없다. 가령, 신경숙, 윤대녕, 성석제, 전경린, 김영하, 은희경 등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이른바 스타급 작가들이 대중성을 확보하였으나, 그 대중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비평가의 1990년대 문학에 대한 편향된 시각이 개입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 점에 대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1990년대 이후의 소설은 그 전 시대인 1980년대의 소설과 명확히 구별되면서 독자적인 소설 미학을 구축시키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평가를 둘러싼 크고 작은 비평적 해석의 차이는 존재한다. 하지만 90년대 소설 미학의 성과를 옹호하는 비평가의 대부분은, 90년대 소설이 80년대 소설의 미학을 부정?갱신함으로써, 한국 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는 것으로 높이 평가한다. 그들에게 80년대 소설은 은연중 역사적 퇴물로 간주될 뿐, 90년대 소설의 신생을 위해 90년대 이후의 문학 대지에서 가능한 추방되어야 할 귀찮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들은 80년대/90년대의 이분법 속에서 90년대 소설의 인정투쟁을 위해 80년대 소설을 역사적 망각의 늪 속으로 밀어뜨린다. 80년대 소설의 흔적을 90년대 소설에서 말끔히 지워내기를 욕망한다. 다시 말해 80년대 소설은 이렇게 90년대와 급격히 단절된 비평의 게토(ghetto)로 추방당하는 운명을 감수하고 있다. 90년대 소설의 신생을 위해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비평의 방략에 의해 80년대 소설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으며, 90년대 소설의 온갖 새로움은 이른바 욕망의 현상학이란 주제 아래 비평의 보살핌을 받는다.
그런데 내가 저간의 90년대 소설에 관한 비평을 지켜보면서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90년대 소설의 새로운 미학에 주목하고 있는 이러한 현상 때문이 아니다. 변화된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서사를 찾아야 하는 것은 작가의 소명이며, 그렇게 모색된 서사에 대한 비평을 하는 것은 비평가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다. 문제는 비평가가 지난 연대의 서사적 가치를 폄하 내지 부정하는 비평의 논리로써 서사의 새로운 징후를 보이고 있는 작가와 작품에 대해 기대 이상의 비평적 관심을 쏟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새로운 서사에 대한 일종의 비평적 편견이 가로놓여 있다. 새로운 서사, 즉 서사의 갱신은 과거의 서사의 흔적을 간직해서는 안 된다는, 새것 콤플렉스의 병리적 증후가 잠복되어 있다.(「비평이여, 문학의 대지에 발을 굳건히 디뎌랴」, 『리토피아』 2004년 여름호, 13-14쪽)
말하자면 1990년대의 서사적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비평의 과잉 욕망이, 1990년대 문학을 트렌드화시키고, 그 트렌드가 독자의 심미적 감각에 스며들어, 본격문학을 찾는 독자들의 대중성을 형성해낸다. 대중성과 유행이 별개의 문제가 아니듯, 이렇게 형성된 1990년대 본격문학의 대중성에서 참신하고 전복적인 서사를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전대(前代)에 비해 많은 작가들이 출현하였고, 다양한 소재와 주제들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가 뒤따르고 있으나, 정작 한 시대의 독자들을 아뜩하게 만드는, 심미적 충격을 던져주는, 미적 전율을 안겨다주는 작품을 자신있게 꼬집을 수 없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본격문학사에서 탁월한 작품들이란, 동시대의 독자로부터 대중성을 확보하되, 그 대중성은 창작자와 독자 모두에게 철학적ㆍ심미적ㆍ사회적 충격을 던져준 작품들이었다. 그러한 작품에 대해 일급의 비평가는 사심없는 비평적 판단으로써 창작자와 독자 사이에서 매개 역할을 해주었던 셈이다. 하여 비평가는 특정 출판사와 특정 창작자의 작품에 대한 거간꾼으로서 대중성을 트렌드화하는 것 자체를 부정한다.
4. 독자를 소외시키지 않는 대중성
지금까지 논의를 통해 문학의 대중성 문제를 문학장의 역학 속에서 살펴보고자 하였다. 문학이 대중성을 멀리해서는 안 된다. 앞서 간략히 살펴보았지만, 문학장에서 이미 문학은 대중성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문제는 대중성 확보의 유무 문제가 아니라, 어떠한 대중성을 확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글의 서두에서 문학은 살아 숨쉬는 역사적 실체로서 제도적 관점에서 문학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고정불변의 딱딱한 제도가 언제까지나 고착화될 수는 없다. 그러한 제도는 인간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문학 역시 예외가 아니다. 문학의 대중성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시대를 초월한 문학의 대중성은 설득력이 결여될 뿐만 아니라 존재하지도 않는다. 문학의
대중성은 문학이란 제도와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대중의 문화논리와 문화감각을 형성한다.
이 같은 문제틀에서 내가 정작 경계하는 게 있다. 문학장의 역학에서 과도하게 지배력을 갖고 있는 출판사의 마케팅 전략에 의해 기획되고 있는 대중성, 본격문학의 미학적 가치를 선점하여 동시대의 문학적 트렌드화를 가속화시키는, 비평가에 의해 상징조작되고 있는 대중성 등이 그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대중성은 문학장에서 독자를 소외시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겉으로는 독자를 사랑하고, 창작자와 독자를 매개하는 차원에서 대중성을 고려한다고 표방하지만, 엄밀히 말해 독자의 자발적 대중성은 비평가와 출판사의 역할과 관계 속에서 추방되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독자의 자발적 대중성을 끌어내어 극대화하는 것, 하여 문학장에서 당당히 그 고유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문학장을 역동적으로 구조화하는 것 등이야말로 문학인들이 더 이상 문학의 대중성에 대한 행복한 고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터이다.
끝으로 거듭 힘주어 말하고 싶다. 문학의 대중성을 적극적으로 확보하되, 문제는 문학장에서 어떠한 대중성을 확보해야 하는가에 대해 문학인들의 지혜가 요구된다. (끝)
□ 대중과 예술의 경계
현대미술의 키워드들
고 충 환 (홍익대, 미술평론)
현대미술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와 해체론에 의해서 생겨난 개념의 재편성에 그 젖줄을 대고 있다. 이는 서로 무관하고 이질적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대립적이기조차 한 것들이 서로 만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세계 자체와 그 세계를 명명하는 개념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간극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개념으로써 세계를 재편하는 것으로 현상한다. 이때의 개념은 세계로부터 소외된 주관의 소산도 아니고, 또한 세계를 해명하는 객관의 산물만도 아니다. 오히려 주관엔 이미 그 속에 객관이 내포돼 있으며, 객관 또한 이미 그 속에 주관이 포함돼 있는 것이다. 이처럼 주관과 객관, 주체와 세계, 개념과 세계는 서로 맞물려 있다. 따라서 모든 과학적 사실, 실증적 사실은 나와 만날 때에만 비로소 그 존재와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이렇듯 사실이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획득되는 것이다. 세계는 일단 내 속으로 불려 들어온 이후에 재차 내뱉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내뱉어진 세계, 개념으로 덧칠된 세계는 그러므로 더 이상 순수하지가 않다. 공감할 수는 있어도, 공유할 수는 없는 세계인 것이다.
세계와 대지.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을 세계와 대지와의 관계 속에서 찾는다.
예술이란 바로 작품에다가 진리를 세우는 일로서, 이때 세계는 진리가 드러나게 하는 반면, 대지는 진리가 드러나지 않게 숨긴다. 여기서 진리 자체는 숨겨져 있을 때 진리인 것이며, 그것이 외부로 드러날 때에는 이미 진리가 아닌 것이다. 또한 숨겨져 있는 진리는 그것이 진리임을 알아차리기가 어렵고, 외적으로 드러난 진리는 진리의 주검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문제는 드러내기와 숨기기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조율에 있다. 숨김으로써 진리를 내장하는 한편, 드러냄으로써 그것이 진리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작품에 내장된 진리는 최소한의 암시, 상기, 단서의 형태로만 나타난다. 그리고 예술은 이러한 진리를 매개로 해서 세계와 대지, 은폐와 비은폐, 드러내기와 숨기기, 그리기와 지우기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비롯되는 긴장과 관련이 깊으며, 그 긴장을 통해서 예술작품 고유의 진리를 발견하는 행위이다. 중요한 것은 그 진리가 어떤 고정된 물질적 실체이기보다는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의 상호작용성, 운동성, 역동성 자체로부터 암시되고 상기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정적인 실체이기보다는 현재진행형의 동적인 실체에 가깝다. 이러한 세계와 대지와의 관계는 예술의 본질을 들여다보게 한다.
놀이.
놀이는 그 자체 지켜야 할 룰 즉 약속을 내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의 약속은 어디까지나 더 잘 즐기기 위한 자발적인 장치로서, 그 자체가 개인을 억압하는 계기일 수는 없다. 나아가 놀이가 존재하는 의미는 오히려 이러한 룰을 깨는 데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사회에 그어진 온갖 금들, 금기와 터부들,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는 유형무형의 계기들을 거스르고 비트는 것에서 비롯되는 쾌(快)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예술과 놀이가 만나는 접점도 여기에 있다. 예술은 예술을 더 잘 놀기 위해서 예술 내부에 그어진 금들, 문법들, 규범들을 기꺼이 넘어선다. 비록 그 놀이가 새로운 금과 문법 그리고 규범을 낳기도 하고, 때로는 그 놀이가 예술을 해체시킬 지경에까지 이르게도 하지만 예술은 결코 놀이를 멈추지 않는다.
예술이 곧 놀이이고, 놀이가 곧 예술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르게는 예술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예술이라는 말과도 같다. 놀이가 예술과 삶을 만나게 하는 것이다. 놀이는 삶에서 자기목적성을 벗어난 부분들, 잉여와 여분에 해당하는 성분들, 무의식적 욕망들, 진정 삶에 의미를 주는 것들에 접맥돼 있다. 그리고 삶의 이 부분이 예술과 통한다. 놀이는 예술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정체성.
햄릿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라고 절규한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어떻게 이 인간적인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가 라고 절규한다. 사르트르는 인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현기증과 구토를 느낀다. 카뮈는 자신조차도 낯설어하는 이방인에다가 자신을 비유한다. 하이데거는 자기의지와는 상관없이 세계에 일방적으로 내던져진 존재에다가 자신을 비유한다. 말라르메는 너무 많이 읽어서 너덜너덜해진 책에다가 자신을 비유한다. 그리고 마침내 랭보는 자신이 공공연한 타자임을 인정한다. 이 모든 물음과 인식들 속에는 정체성이 내재돼 있다. 그리고 정체성은 다국적 문화, 이주, 이민, 국제결혼이 보편화되면서 더 일반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런가하면 가상현실 속의 가상적 커뮤니티들은 국가와 민족의 물질적인 경계에 속한 개인의 정체성을 빠르게 변질시키고 해체시킨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페르소나(퍼셔널리티)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정체성 논의는 결국 예술이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 접맥돼 있음을 말해준다.
시간.
시간에다가 물질적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시간을 가시화 하는 것, 시간과 더불어 시간을 체험하는 것, 시간 속에서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 시간을 가로질러 그 흐름에 역행하는 것,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역류시키는 것, 시간을 휘저어 일종의 감각적 패닉 상태를 불러오는 것, 시간을 늘리고 줄이고 압축시키는 것, 시간을 비틀어 왜곡시키는 것, 시간을 고체와 액체 그리고 기체로서 결정화하는 것, 어떠한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형태의 매개도 없이 시간을 그 자체로서 체험하는 것, 모든 결정된 감각적이고 개념적인 시간의 틀로부터 빠져 나오는 것, 시간을 분절시키고 분쇄시키고 해체시키는 것, 시간의 부정을 통해서 시간을 긍정하는 것, 시간의 지양을 통해서 시간을 지향하는 것, 시간에 구멍을 내고 주름을 만드는 것, 시간을 매개로 하여 정신분열증과 편집증 그리고 과대망상증적 징후를 실험하는 것, 시간을 욕망이 자기를 실천하는 도구로 만드는 것은 가능한가.
시간은 공간에 연속돼 있고, 공간은 개인의 실존에 연속돼 있다. 엄밀하게는 그 시간은 그 공간에 연속돼 있고, 그 공간은 그 개인에 연속돼 있다. 이처럼 그 개인에 연속된 그 시간과 그 공간은 공감할 수는 있어도 공유할 수는 없는 독특하고 이질적인 다른 시간이며 다른 공간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실존적 시간, 개인의 실존적 공간은 자가 증식하는 박테리아와 리좀의 형태로 나타난다. 시간은 전통적으로 공간예술로 여겨지던 미술의 지평을 시간예술에로까지 증대시켜준다.
캐릭터.
흔히 문학과 연극 그리고 영화에서는 작품을 창작하는데 있어서 캐릭터 중심인가 아니면 플롯 중심인가에 따라 작품의 성격이 결정된다. 여기서 캐릭터 중심은 주로 작가주의 성향이 강한 작품으로 나타나고, 플롯 중심은 작품 전체를 끌어가는 구조와 스토리텔링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캐릭터가 중심인 작품에서는 상상력에 바탕을 둔 서사가, 그리고 플롯이 중심인 작품에서는 현실에 바탕을 둔 서사가 주요 동력이 된다. 따라서 캐릭터는 플롯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징적이고 암시적인 성향이 강하다. 말하자면, 캐릭터는 동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반영하고 재현하고 대변한다. 당대적인 문제의식과 시대정신을 상징하고 암시한다. 그리고 감각적 현실이 간과하고 있는 행간 읽기를, 억압적 현실이 은폐하고 있는 이면 읽기를 요구한다. 이 독서 과정에서는 심지어 무의식의 읽기마저 요구된다.
캐릭터는 일련의 이러한 서사예술은 물론이고, 상품의 전략 속에도, 광고의 욕망 속에도, 그리고 나아가서는 스타쉽의 열광 속에도 있다. 물신주의가 팽배한 자본주의 시대에서의 캐릭터는 소비자의
욕망을 파고드는 심리적인 기제가 되고 있고, 따라서 캐릭터에게는 문화의 얼굴을 한 자본의 욕망을 퍼트리는 첨병의 역할이 주어진다. 이처럼 하나의 캐릭터에는 당대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사회학적인 여러 이질적인 맥락들이 교차한다. 미술 역시 예외는 아닌데, 미술에서의 캐릭터는 특히 모더니즘 이후 서사논의와 욕망이론으로부터 그 당위성을 얻고 있다. 캐릭터는 현대미술에 나타난 여타의 물화된 인격체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스트리트 퍼니처.
거리의 가구라는 말이다. 상식적으로 가구는 실내 환경의 전유물처럼 여겨진다. 인테리어와 인퍼니처 개념이 그것이다. 여기서 스트리트 퍼니처는 소위 아웃테리어와 아웃퍼니처 개념을 실천함으로써 가구의 범주를 실내 환경으로부터 실외 환경 곧 거리 바깥으로까지 확장한 것이다. 일상을 그 자체 잠재적인 예술의 한 계기이자 장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작게는 도시의 미관을 위해 설치하는 환경 조형물에서부터 크게는 도시 계획까지 아우른다. 이를테면 형형색색의 간판들, 지면에서 공간 위로 돌출된 육교와 다리와 고가도로, 지하철 출입구 지붕 장식(차양)과 환기구, 건물 옥상에 설치된 환풍기와 노랗고 파란 물탱크들, 그리고 나아가 모델하우스와 재건축 아파트 등 도시의 인공적인 풍경을 이루거나 도시의 인위적인 스카이라인 등을 광범위하게 포함한다. 이 가운데 특히 모델하우스와 재건축 아파트는 잠정적으로만 존재하는 제 3의 사회와 장소를 의미하는 헤테로토피아 개념에 그 맥이 닿아 있고, 그 자체가 장소 특정적 개념과 함께 소위 도시 사회학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이기도 하다.
스트리트 퍼니처는 그 자체 하나의 결정적인 장르이기보다는 기존의 전형적인 장르들의 경계를 넘나드는 탈장르적 개념이고, 학제간(學制間) 개념이다. 사이와 경계 위에서 제3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점에선 현재진행형의 개념이다. 굳이 말하자면, 도시계획과 사회공학 그리고 디자인이 하나의 경계를 축으로 해서 서로 맞닿아 있는 어떤 지점을 암시한다. 이는 스트리트 퍼니처가 야생의 자연환경 대신 인공적인 도시환경에, 그 중에서도 특히 거리와 가로 그리고 광장의 개념에 맞닿아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디자인은 파인 아트와는 구분되는 생활미술 혹은 응용미술이라는 좁은 의미로서보다는, 예술가의 사념과 관념 그리고 아이디어를 의미하던 본래의 더 폭 넓은 개념으로 이해된다. 이로써 스트리트 퍼니처 개념은 순수미술과 삶의 현장성과의 경계를 허물어서 진정한 생활미술, 삶의 미술을 실현한다는 강력한 실천논리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스트리트퍼니처는 현대미술에 나타난 여타의 환경조형 작업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공원.
공원은 온통 콘크리트와 아스팔트가 점령한 회색의 도시 속에 인공적으로 조성된 자연의 한 자락이며, 그 도시에 일말의 산소를 공급하는 허파이며, 비록 잠정적으로나마 일상 속의 이해관계로부터 떠나온 사람들이 휴식을 취할 요량으로 모여드는 쉼터이다. 쉼터라고는 하지만 진정한 휴식을 위한 사적 공간도 아니면서(모든 사적 공간은 프라이버시를 전제로 한다), 그렇다고 일상 속의 이해관계에 맞물린 공적 공간도 아니다. 공원은 이러한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이 서로 면해 있는 공간의 특이한 위상을 말해준다. 또한 광장과도 그 맥을 같이 하는 공원에는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 자체로써 삶의 축소판을 보여준다. 공원이 그려 보이는 이러한 삶의 풍경은 도시공학의 샘플링을 위한 구실을 제공하며, 이는 그대로 현대인의 삶에 있어서 공원이 특별한 장소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임을 말해준다.
그런가하면 최근에 공원은 노숙자의 삶의 터전(집)이라는 새로운 기능을 부여받고 있기도 하다. 공원은 예컨대 재건축 프로젝트처럼 현대미술에 나타난 장소 특정성 작업을 이해할 수 있는 적절한 샘플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