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실험과 아버지의 꿈
-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 -
박 유 희(영화평론가/국문학박사)
1. 작가와 텍스트 사이
풍부한 오독(誤讀)을 가능케 하는 텍스트가 있다.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이 바로 그런 텍스트이다. <천년학>에 대해서는 많은 평문이 쏟아졌지만 그 평문들에서는 이 영화를 한편의 영화 <천년학>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로 말해진다. <천년학>에 대한 비평에 동원되는 요소들, 즉 임권택 감독의 필모그래피, 가족사, 인품이나 인간관계, 그리고 한국영화사는 (전후(戰後)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영화에 투신하여 50년 외길을 걸으며 부침(浮沈)이 심한 영화판에서 칠순이 넘어서도 현장에 남아 100번째 영화를 완성한 경이로운 작가)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로서 <천년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요소들과 조응시켜 <천년학>을 읽는 것은 괄호 안에 놓인 긴 수식어가 지닌 과거의 역사성과 99편 영화의 맥락을 지고 가는 것이며, 그 함의가 한정하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로 <천년학>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애초부터 <천년학>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천년학>이라는 한편의 텍스트가 보여주는 서사와 형식을 조망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향후 영화의 방향을 모색하는 데에는 걸림돌이 된다.
그러나 막상 <천년학>에만 집중하려고 할 때 그것이 또한 쉽지 않음을 누구나 알게 된다. 첫 장면부터 <취화선>이 떠오르고, 배우 오정해와 혁필 아저씨가 나오면 <서편제>가 되살아나고,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춘향가> 대목들에서는 자연히 <춘향뎐>이 환기되고, 판소리에 대한 유봉의 집념 앞에서는 <족보>가, 송화와 동호가 예인(藝人)이라기보다는 구도자(求道者)로 보일 때는 <만다라>가 떠오른다. 그리고 4.3항쟁이 송화의 입으로 말해지는 대목에서는 다시 한국현대사가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듯하고, 친절한 자막을 보며 임권택 감독의 성품을 추측하게 되고, 친일파였던 ‘백사노인’의 아름다운 최후 앞에서는 이 장면이 가지는 이데올로기적 함의에 대한 의문이 떠오르며 어느새 전작들을 머릿속에 나열하게 되는 것이다.
<천년학>은 한 가지 원리로 설명할 수 없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연대기적 시간과 인과율을 준수하는가 하면 그 밑에는 그것을 뛰어넘는 완강한 원칙이 흐르고 있다. 어떤 부분에서는 한없이 여유롭고 관대한 반면 어떤 부분에서는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는 듯 조급하다. 전반적으로 유장하고 유려하면서도 때로는 황망하기도 하고 적나라한 삶의 파편이 불현듯 틈입하기도 한다.
그래서 <천년학>을 논하는 것은 곤혹스러운 작업이다. 어떻게 읽어도 그것은 오독이 될 수밖에 없음을 처음부터 알고 가는 길이다. 그래서 <천년학>은 여러 평론가들을 고백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분명히 감동적인 면이 있지만 구조가 요연하게 잡히지 않아 난감하거나, 영화를 보고나서 머릿속에 남는 생각과 감정이 균질하지 않아 선명하게 말하기 힘들 때 평론가가 취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고백이다. 고백의 화법은 거장, 걸작, 혹은 문제적인 텍스트 앞에서 객관적인 비평을 포기하는 일종의 항복 선언이다. 하지만 그것이 독자 앞에 놓일 때에는 오독에 대한 책임을 피해가려는 가장 교묘한 방법이자 오만한 태도가 되기도 한다.
이 글은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출발한다. 오독을 피하려 하면서도 오독을 피하려는 것이 또 다른 오독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고백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경계에 서서, <천년학>을 작가의 정신세계로 귀속되는 작품(作品)으로 볼 것인가, 열린 체계로서의 구조적인 텍스트(text)로 읽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이때 할 수 있는 일은 비평적 거리와 균형감각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되뇌면서 더듬더듬 나아가는 것뿐일 것이다.
2. 만나기 위한 삶, 이별하기 위한 만남
<천년학>은 어린 시절을 선학동에서 함께 보낸 용택(류성룡 분)과 동호(조재현 분)가 중년이 되어 만나 밤새 술을 마시며 지난 세월을 풀어내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야기하는 시간은 하룻밤인 데 비해 이야기 속 시간은 동호가 선학동에 처음 닿은 1956년부터 그가 선학동을 다시 찾은 1980년대 중후반까지 약 30년 세월에 이른다. 그들의 이야기의 중심에 놓이는 것은 송화(오정해 분)라는 한 여인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송화와의 인연을 말하며 밤새워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모두 송화를 연모했기 때문이다. 송화, 동호, 용택은 선학동에서 사춘기를 함께 보냈으며, 그들이 뿔뿔이 헤어진 뒤 동호는 송화를 세 번 더 만나고 용택은 송화를 두 번 더 만난다. 그리고 마지막에 동호와 용택은 그 자리에 현존하지 않는 송화를 본다. 그 만남을 통해 드러나는 사랑의 성격은 이 영화의 골간을 이룬다.
여기에서 용택은 실제적이고 통속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용택은 송화의 고운 태와 절절한 노랫소리에 반하여 그녀를 짝사랑한다. 그의 사랑은 생선가시가 목에 걸린 송화를 업고 뛰며 자신의 등에서 미끄러지던 “몽글몽글하고 따뜻한 가슴팍”을 사무치게 욕망하는 것이다. 그는 송화를 평생 곁에 두고 싶어서 청혼을 했었고 동호 앞에서도 그녀를 품고 싶던 욕망을 감추지 않는다. 동호에게 같이 소변을 보자며 동호의 것을 슬쩍 보는 그의 순간적인 눈길은 그의 욕망을 드러낸다. 그만큼 그의 사랑은 실질적이다. 여기에 용택이 한쪽 다리를 전다는 설정은 그가 지닌 운명적 슬픔을 상징하며, 그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깊은 한을 지녔지만 그것을 노래로 승화시킬 줄 아는 여인 송화를 연민하고 동경하는 것에 대한 개연성을 확보하여 보편적 공감을 일구어낸다.
하지만 동호의 송화에 대한 사랑은 행동의 인과율이나 서사적 개연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송화를 찾아 헤매지만 매번 곧 떠난다. 그는 송화를 위해 북을 배우고 송화를 위해 집을 짓지만 어느 것 하나 송화를 위해 써먹지 못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못한다’는 표현보다 ‘안 한다’는 표현이 더 걸맞을 듯하다.
동호가 가출한 지 8년 만에 강진의 유봉 묘소 앞에서 송화를 만났을 때 두 사람은 모두 홀몸이었지만 동호는 송화를 떠난다. 그리고 동호는 그것을 평생 후회했다고 용택에게 말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남매로 자란 인륜의 벽을 깨기에는 두 사람이 아직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유봉의 묘소 앞이었다는 것은 이러한 해명에 설득력을 더한다. 두 번째 만났을 때 동호는 단심(오승은 분)과 살고 있었고 아이까지 낳아 기르고 있었다. 아이를 “고아 만들지 말고 잘 키우라”는 송화의 결연한 당부 앞에 붙박인 채 동호는 백사노인의 자가용을 타고 표표히 사라지는 송화를 바라본다. 그런데 여기에서 동호가 단심과 아들 때문에 송화를 붙잡지 못했다고 볼 수는 없다. 동호는 단심이 낳은 아들이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단심과 살면서도 송화를 찾아 헤매느라 단심에게는 충실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만남에 가면 이러한 동호의 태도가 보다 확연히 드러난다. 송화가 삶에 지쳐 고향에 돌아가 ‘이어도 타령’을 부르며 연명하고 있을 때 동호가 그녀를 찾아간다. 그들은 팔짱을 끼고 제주도 땅을 함께 걷고 송화는 제주도의 거센 바람 앞에서 동호의 어깨 뒤로 숨고 동호는 둔덕을 오르내릴 때 송화를 안는다. 이때 송화는 동호에게 자신의 친부모에 대한 얘기와 자신이 제주도를 떠나게 된 사연을 들려준다. 여기에서 송화가 동호와 남매로 맺어지기 이전의 세월을 꺼내놓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세월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는 연인으로 비치며, 남매가 아닌 남남의 인연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송화는 용눈이오름에 앉아 “갈까부다 갈까부다 님을 따라 갈까부다”라고 애절하게 노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호는 중동으로 떠난다. 그는 자신이 떠나는 이유에 대해 송화가 “소리 공부를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집을 지어주기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기다리라는 당부나 어디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남기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떠나는 것은 동호의 선택이라는 것이 보다 분명해진다. 정신없이 찾아 헤매다가 막상 만나면 곧 떠나고, 그리고 다시 그녀와의 만남을 위해 살아가는 것, 이것이 동호의 사랑인 것이다.
3. 한(恨)으로서의 사랑, 구도(求道)로서의 예술
동호와 송화의 사랑이 서사의 중심을 이루고 용택의 송화에 대한 사랑이 서사의 한 축을 담당한다면 또 다른 축에는 유봉의 사랑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용택의 사랑은 동호의 사랑에 대해 일종의 대척점을 이루지만 유봉의 사랑은 동호가 송화를 사랑하는 틀이 된다. 동호는 평생 그 틀을 깨지 못한다.
어린 시절 용택과 동호가 싸웠을 때 유봉은 송화와 동호를 야단치며 두 가지를 말한다. ‘송화와 동호는 남남이 아니라는 것’과 ‘소리꾼이 제대로 되려면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당부는 동호에게 내면화되어 그의 삶과 사랑을 지배한다. 동호는 평생 송화를 ‘누나’ 이외의 다른 호칭으로 부르지 못하고, 유봉이 그랬던 것처럼 남의 자식인 줄 알면서도 단심이 낳은 아이를 기른다.
그리고 절에 머물 때 유봉은 소리와 북의 관계에 대해 가르친다. ‘소리에는 길이 있고, 북은 소리의 길에 쳐주는 것이며, 그래서 북장단은 소리의 눈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는 동호와 송화의 운명적 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송화의 삶에는 동호 자체가 북장단과 같다. 동호는 송화를 만날 때마다 그녀에게 깊은 슬픔을 심어준다. 송화는 ‘태평양 극단’이 온다는 소문에 정처(定處)를 버리고 황망히 떠나고 동호와 헤어지고 나면 다시 떠돌게 된다. 송화와 동호가 이러한 인연을 이어가는 것은 서로의 한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것이고 오히려 만남을 통해 한을 쌓음으로써 그 한에서 우러나오는 더 큰 소리를 성취하기 위함이다. 원작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한 덩어리를 지니고 그것을 소중스럽게 아끼면서 그 한 덩어리를 조금씩 갈아 마시면서 살아가는 위인”들이고 “그런 사람들한테는 그 한이라는 것이 되레 한세상 살아가는 힘이 되고 양식이 되는 폭”이다. 여기에서는 사랑 자체가 삶이 되고 그 삶 자체가 예술이 된다.
그런데 그 사랑과 삶과 예술의 기저에 흐르는 강고한 아버지의 원칙은 그 사랑과 삶과 예술을 숭고한 것으로 만든다. 송화와 동호의 삶은 끼와 열정을 주체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신산스럽게 살아가는 예인(藝人)이라기보다는 의식적으로 한을 쌓아나가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으려한다는 점에서 구도자(求道者)에 가깝다.
이 영화에는 <서편제>를 상기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는 흥미로운 설정이 있다. 송화가 눈이 멀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대하자마자 집을 찾은 동호는 오래전에 유봉과 송화가 떠났다는 것을 알고는 낙담하여 낙산거사(안병경 분)를 찾아간다. 낙산거사는 유봉이 송화에게 한을 심어주려고 일부러 송화의 눈을 멀게 했다는 소문이 있지만 그것은 아닐 게라고 동호에게 말한다. 그리고 유봉이 직접 “지 딸년 눈 베려 놓을라고 일부러 그러는 애비가 어딨겄어?”라고 말하는 장면까지 낙산거사의 플래시백으로 제시된다. 이에 대해 동호는 그건 아저씨가 모르는 말씀이라며 유봉이 송화를 여자로 곁에 두고 싶어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낙산거사의 말을 반박한다. 그리고 이것은 유봉의 무덤 앞에서 송화가 “난 아버지가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한 적 없어. 아버지는 당신의 이루지 못한 꿈을 우리에게나 이루고자 온갖 방편을 마다 않으신 그런 분이셔.”라는 말을 통해 다시 반박된다.
말해지지 않는 게 좋은 것들이 있다. 동호가 아버지의 욕망을 폭로하는 것은 그러한 것에 해당한다. 필자는 전에 『임권택, 민족영화 만들기』에 실린 <서편제>에 대한 논문에서 “송화가 시력을 잃은 데서부터 결혼한 성인 여성의 복장을 하고 나타날 때까지의 연속적인 네 장면”을 ‘근친상간적 강간 시퀀스’로 읽어내는 대목을 읽으면서 서구 문화사회학 이론의 틀로 임권택 영화를 분석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서편제>에서 송화의 눈을 멀게 한 것이 송화를 득음시키고자 하는 유봉의 의도적인 행위였다는 것은 확연히 드러난다. 물론 유봉의 행위 배면에는 홀아비로서의 외로움과 욕망이 스며있을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하지만 <서편제>에 드러나는 유봉과 송화의 성격으로 볼 때, 그리고 이야기의 맥락이나 분위기로 볼 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과도하다. 그것이 불가능하거나 말도 안 되는 소리여서가 아니라 그렇게 육체적인 문제로 표현하는 순간 그 표현 자체가 다중적 욕망에 대한 풍부한 해석의 여지를 거세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오독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년학>에서는 그러한 의혹이 동호의 입을 통해 표면에 드러난다. 물론 이것은 반박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것을 말하고 반박하는 과정은 지나치게 명시적이다. 어린 송화를 가운데 두고 왼편에는 유봉이, 오른편에는 동호가 누워있는 장면에서 송화는 동호와는 발가락을 접촉하면서 얼굴은 유봉과 마주보고 다정하게 ‘새타령’을 부른다. 그리고 이 장면은 후일 송화가 백사노인의 품에 안겨 ‘새타령’을 부르는 장면과 겹친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호를 통해 유봉의 진실에 대해 다시 질문하고 낙산거사와 송화를 통해 그 답변을 얻는 과정은 왜 필요했을까? 아버지의 도덕성과 합리성을 한 치도 훼손하지 않으려는 간절한 욕망일까?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마지막 장면까지 기다려야 한다.
4. 부분창의 정조(情操)와 더늠으로서의 영화
<천년학>의 본령은 인과율로 빚어진 서사의 연속적인 흐름에 있지 않다. 영상과 소리가 어우러져 장면 별로 이루어내는 정조(情操)에 있다. 노래가 나오는 각 장면에서는 인물의 심경이 노래를 통해 풀려나오고 그것이 영상으로 시각화된다.
예컨대 동호와 송화가 어렸을 때 유봉과 함께 선학동을 찾아가는 길에 세 사람은 노송 아래에서 ‘광대가’를 흥겹게 노래한다. 그 정경의 아름다움과 흥겨움이 광대의 고달픈 인생살이를 역설적으로 암시하여 그들의 운명을 더 서글프게 보이게 한다. 유봉 일가가 절에 묵을 때 송화와 동호가 풍경(風磬)을 따다가 장단을 치며 춘향이 광한루에 등장하는 대목을 부르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두 사람이 진정 행복해 보이는 대목이며, 이 대목은 훗날 동호가 송화를 위해 집을 짓고 처마에 풍경을 다는 장면과 연결되어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쉬움을 더한다. 유봉은 죽기 전에 “이산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더라”로 이어지는 ‘사철가’만 부르다 떠난다. 유봉이 낙조에 물든 바닷가에 앉아 ‘사철가’를 부르는 장면은 인생의 허망함을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지금까지 열거한 이 장면들은 물론 서사의 앞뒤 맥락 안에 놓일 때에 보다 분명한 의미와 감동을 자아내지만, 설사 맥락을 모르고 본다 해도 그 자체로 풍부한 정서를 환기시킨다. 그런 점에서 이 장면들은 나름대로 자기충족적인 독자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그 무엇보다도 그 장면 자체로 충분한 장면, 그것은 많은 이들이 <천년학>에서 최고 명장면으로 뽑는 백사노인(장민호 분)의 임종 장면이다. 이 장면은 유봉의 낙조 장면에 이어 인생의 허망함을 보다 압도적으로 구현한다. 친일 행각으로 재산을 모으고 말년에 송화를 소실로 들여 그녀의 노래를 낙으로 삼았던 백사노인은 벚꽃이 무상하게 흩날리는 가운데 송화의 ‘흥타령’을 들으며 운명한다.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 너도나도 꿈속이요/ 이것저것이 꿈이로다/ 꿈 깨이니 또 꿈이요/ 깨인 꿈도 꿈이로다/ 꿈에 나서 꿈에 살고/ 꿈에 죽어가는 인생/ 부질없다 깨려는 꿈/ 꿈은 꾸어서 무엇을 할거나”라는 ‘육자배기 흥타령’은 <만다라>에서 지산의 입을 통해 설파되었던 ‘내가 남이고 남이 나이며, 육체가 마음이고 마음이 곧 육체이며, 해탈은 또 다른 윤회의 시작’이라는 어법을 환기시킨다. 이러한 순환논법 안에서는 광대도 친일파도 잠시 머물렀다 사라지는 한 점일 뿐이다. 한 시절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바람에 흩어져 가뭇없이 사라지는 꽃잎들이 화면을 뒤덮으며 자아내는 탐미적 허무는 인생의 덧없음뿐 아니라 언어의 무력함까지 일깨운다.
판소리가 완창보다는 부분창으로 연행되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이와 같이 각 장면이 나름대로 독자성을 지니는 형식은 판소리의 연행 형식을 닮아 있다. 사람들은 판소리의 이야기를 몰라서 판소리를 듣는 게 아니다. 그 내용은 이미 잘 알고 있지만 각 대목의 감흥을 새삼 맛보기 위해서 판소리를 듣곤 한다. 특히 명창들은 자신의 장기가 되는 대목을 더늠으로 발전시켜 판소리의 구조와 법제를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천년학>에서 드러나는 장면의 독자성은 명창들의 더늠에 비견될 만하다. 임권택 감독은 전통의 소리 형식을 영화에 대입하여 각 대목을 흉내 낼 수 없는 장면으로 조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년학>을 보고나면 이야기나 대사 등 다른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몇몇 장면이 뇌리에 강하게 남는다.
이러한 시도는 <천년학>에서 처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미 <서편제>와 <춘향뎐>에서 시도된 바 있다. <서편제>의 진도아리랑 장면이나 <춘향뎐>에서 방자가 광한루에 나온 이 도령의 심부름으로 춘향을 찾아가는 장면은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다. <천년학>에서는 <서편제>나 <춘향뎐>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판소리뿐만 아니라 시조와 민요를 다양하게 끌어들이면서 보다 확장된 영역에서 영상과 소리의 유기적인 접목을 시도한다. 이는 서구의 영화문법에서 벗어나 한국의 전통연희형식을 영화에 차용하여 한국영화의 독자적 형식을 개발하려는 야심찬 실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임권택 더늠이 보여주는 고상함과 유려함은 판소리나 민요가 가지는 일탈적이고 균질하지 않은 매력들을 상당 부분 배제하는 것도 사실이다.
5. 에필로그
이제 <천년학>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 말할 때가 되었다.
용택과 동호가 밤새 술을 마시고 난 아침 용택은 유봉이 남긴 북을 동호에게 건네준다. 그러고 나서 뒷간에서 볼일을 본 용택은 변소 문을 나서려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 앞에서 다시 변소로 들어간다. 그리고 문 너머로 바라본다. 동호가 북을 잡고 소복을 입은 송화가 그 앞에 앉아 ‘박석틔’를 부르는 광경을…. 곧이어 포구에 물이 차고 그 물위에 학산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 두 마리의 학이 유유히 날아오른다.
이 장면에서 시선의 주체는 누구인가? 물론 그 시선은 용택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포구에 물이 차고 학이 날아오를 때 그것을 내려다보고 학을 쫓아 올라가는 시선이 용택만의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 시선 안에서는 송화를 사랑했던 세 남자의 마음이 어우러진다. 송화를 위해 북을 배웠지만 결국 그녀와 한 번도 맞춰볼 수 없었던 동호의 한, 평생 송화를 가슴에 품고 동경하는 용택의 욕망, 그리고 자신의 북을 남기며 끝까지 동호를 포기하지 않았던 유봉의 집념이.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시선을 통어하는 것은 자신의 무덤까지도 “명창을 발복할 자리”로 택한 유봉의 맺힌 꿈이다.
그 꿈이 맺힌 한을 넘어 두 마리의 학으로 날아오른다. 동호는 유봉이 남긴 북을 끌어안음으로써 이미 내면화하고 있으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유봉의 집념에 기꺼이 순응한다. 이를 통해 동호에 의해 의심되었던 유봉의 혐의는 무화되고 송화가 동호에게 역설했던 유봉의 정당성이 그의 예술의 꿈과 더불어 학과 같은 고도(高度)를 확보한다. 그 ‘정당한 예술에의 꿈’ 안에는 지극한 예술의 경지에 이르려는 갈망과 너절한 삶의 현장까지 포용하고자 하는 바람이 공존한다. 거기에서는 뒷간의 더러움과 실패한 인생의 초라함과 못 이룬 사랑의 안타까움까지 포용되어 용눈이오름같이 “하늘과 땅이 편하게 어울리는” 경지를 향한다. 이것은 또한 백사노인의 최후처럼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같아지는 경지와 맞물리며 노장의 정신적 넓이와 고도, 그리고 궁극적인 염원을 은유한다.
그것을 더 이상 언어로 형용한다는 것은 너무나 곤혹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