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회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대상작
지오르고스 란디모스 감독의 ‘송곳니'(Dogtooth, 2009)
신화와 독재의 국가, 테살로니키 영화제가 있는 곳, 유럽 재정위기의 주범인 국가, 연일 파업이 일어나고, 복지가 천국이었던 나라, 그리스 감독 지오르고스 란디모스는 전국 단관 개봉으로 우리의 시선을 모으고 있는 ‘송곳니'를 블랙코미디 틀에 담아 영화로 보여준다.
엄숙을 털고, 그리이스 신화처럼 전개된 이 우스꽝스런 희극유희는 파멸에 이르는 독재의 광기를 웃음을 유발할 정도로 냉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극한 상황, 송곳니가 빠져야만 집을 벗어날 수 있다는 설정은 ‘고도를 기다리며’, ‘쿼바디스’의 순종과 기원을 모태로 한다.
독자적 두 번째 영화로, 73년생 감독의 영화적 상상력은 신화적 틀을 깨고 ‘나라야마 부시꼬’의 이빨깨기의 대모험을 감행한다. 가족을 위한 행위가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신념, 그 동양적 행위는 그리이스적 해석으로 변형되어 자유를 위한 숭고한 희생으로 비춰진다.
한국까지 와서 ‘영화의 상상력’을 항변하던 루이말 감독의 ‘데미지’가 몰고 왔던 파장을 뛰어넘는 노출, 근친상관까지 상상의 영역을 넓힌 ‘송곳니'는 금기(청소년 관람불가)까지 이른 독재의 심각한 후유증을 이지적 백팔번뇌에 담은 108분의 러닝타임을 갖고 있다.
높은 담장으로 외부와 격리된 도시의 근교 저택의 다섯 명, 한 가족 이야기(부모,세 남매) 가 독재와 자유를 풍자적으로 그린 이 작품은 ‘열린 영화’의 ‘열린 해석’용 이다.
제20회 스톡홀름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그리스 영화. 철저히 외부와 차단하고 독재에 가까운 쇠뇌로 세 남매의 양육과 교육을 도맡은 아버지와 그의 가족이 주 출연진이다. 외부와 접촉으로 자녀들이 세상을 알게되면서 갈등이 빚어진다. 제목인 송곳니는 '송곳니'가 빠져야만 어른이 돼 세상을 나갈 수 있다는 아버지의 부조리한 독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들의 생활을 모조리 통제하는 독재자다. 초췌한 어머니는 아버지의 독재에 조용히 가담하는 힘없는 인간이다. 두 딸과 막내 아들은 어린 시절부터 외부와 완전히 격리되어 살아왔다. 백치같은 그들에게 바깥 세상은 고양이라는 괴물들이 자신들을 노리는 무시무시한 지옥일 따름이다. 그러나 막내 아들의 성욕 해소용으로 아버지가 정기적으로 데려오는 한 여자에 의해 그들만의 세계는 조금씩 망가지기 시작한다.
<송곳니>는 억압적인 정치, 사회, 체제를 비판하는 사회적 부조리극이다. 대사와 음악을 극도로 절제한 채 흘러가던 영화는 고양이를 가위로 학살하거나 자신의 이빨을 돌로 찧는 장면 등 극도로 폭력적인 시퀀스를 터뜨리며 균열의 클라이막스를 마무리짓는다.
두번째 영화 <송곳니>는 미하엘 하네케의 영향력 아래 태동한 문제작이라 할 만 하다.
그리스 감독이라. 떠오르는 이름은 코스타 가브라스와 테오 앙겔로풀로스 정도다. 전자는 사실상 프랑스 감독이고 후자는 익숙한 거장이다.
삼남매는 독재자 아버지에 의해 외부와 완전히 격리되어 살아왔다. 그러나 막내아들의 성욕 해소용으로 아버지가 정기적으로 데려오는 한 여자에 의해 그들만의 세계는 폭력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송곳니>는 억압적인 체제를 비판하는 부조리극이라 할 수 있을게다. 란티모스는 간결함이라는 덕목을 지키기 위해 음악도 완벽하게 제거했다. "음악은 견딜 수 없다. 음악은 장면에 구체적인 감정을 집어넣는다. 음악을 제거하면 신(scene)이 더욱 강력해지고 의미도 많아진다." 그는 하네케보다는 브레송과 카사베츠를 언급하지만 말이다. 다행히 난해하거나 불친절한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굉장히 간결한 스토리텔링으로 주제를 또렷이 전달하는 작품이다.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외부와의 접촉이 단절된 세 남매는 오로지 집 안에서만 시간을 보낸다. 심지어 아버지는 아들의 성적 욕망을 해소시키기 위해 자신의 회사 여직원 크리스티나를 집으로 불러들인다. 게다가 어머니가 직접 녹음한 테이프 메시지가 세 남매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교육인데, 이를테면 ‘바다’를 ‘안락의자’로 가르치는 식이다.
단어의 발음과 뜻이 일치하지 않은 부모의 메시지는 그들의 삶을 종용하고, 조종한다. 세 남매에게 부모는 절대로 복종해야 하는 대상인 셈이다.
<송곳니>는 한정된 공간, 소수의 배우, 최소의 소품만으로도 거대한 담론을 담을 수 있음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지도자들과 거대 미디어가 어떻게 진실로부터 국민들을 고립시키면서 단편적인 지식만을 주입시키는가에 대한 비평이며, 그 억압의 체제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라는 지오르고스 란디모스 감독의 말처럼, <송곳니>는 독재에 대한 통렬한 우화이자, 미디어의 오만함을 헤집은 풍자다.
<송곳니> 역시 독재자의 독선을 맹렬하게 비판한다. 독재자는 아버지다. 큰딸은 크리스티나가 준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세상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고, 자신들의 삶에 회의를 품기 시작하면서 담장 밖 세상을 동경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왕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험을 감행한다.
영화 속에서 아버지는 세 남매에게 송곳니가 빠져야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데, 주지하다시피 송곳니는 늙어 죽기 전에는 절대 빠지지 않는다. 지오르고스 란디모스 감독은 그래서 파격적이고 통쾌한 방식으로 세 남매에게 강요된 ‘송곳니의 부조리’를 역설적으로 돌파했다.
공동체라는 미명 아래 자행되는 전체주의의 통제가 인간 세상을 어떻게 왜곡시키고 사람 자체를 망가트릴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재 방식에 대한 통찰이 훨씬 강렬하다. 오히려 각 캐릭터의 심리 변화를 포착하는 데 집요한 느낌을 준다.
극중 인물이 웃을 때 함께 웃기보다는 그 속의 심리를 따져보게 된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집착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통해 세상에 은밀하게 존재하는 전체주의의 음험한 욕망을 폭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공장을 운영하며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남자(크리스토스 스테르기오글루)는 그 집에서 2녀 1남의 자식을 세상과 완전히 격리시킨 채 양육한다. 남자의 아내(미셀 발리) 역시 그 집에만 틀어박혀 남편을 도와 자식들을 통제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성적인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회사 여직원을 집으로 불러들여 성관계를 갖게 한다. 이는 전체주의 체제에서의 독재자들이 가끔씩 은전처럼 베푸는 회유와 보상책을 의미한다. 이러한 당근이 있는가 하면, 아들과 딸들이 외부 세계에 관심을 표현하면 가상의 적을 만들어 공포감을 조성한다.
그게 통하지 않으면 가차없는 폭력으로 자식들을 다룬다. 성과 폭력의 수위가 스너프(snuff) 필름처럼 높지만, 그것으로 인해 성적 자극을 받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관객은 드물 것이다. 아마 대부분 아릿한 슬픔을 맛보게 될 것이다.
특히 한국 관객들은 부모의 결혼 기념일 파티에서 기타를 치고 기묘한 춤을 추는 자식들의 모습에서 북쪽의 아동들을 떠올릴지 모르겠다. 극적 반전이 있는 이 영화의 마지막 대목은 탈북자의 필사적 노력을 연상시키기도 한다.(장석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