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식 시인의 '휴(休) 서평-조영환(문학평론가)
인간과 시에 대한 궁극의 물음
- 이영식 시인의 『休』에 대한 서평/시인 조 영 환
2012년 6월 중순에 우편으로 우송된 이영식 시인의 세 번째 시집 『休』를 여러 번 읽었다. 침대 베갯머리에 두고 서너 번을 통독했고, 서평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정좌하고 세 번을 정독했다. 그리고 글을 써가면서 몇 번을 더 펼쳐보게 될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열 번이 아니라 수백 번을 정독한들 시 한 편 한 편에 담긴 시인의 공력을 어찌 다 읽었다 하리. 그런데 어쨌든 시집 『休』를 읽고 또 읽을수록 이런 궁극의 물음이 화두처럼 끊이지 않고 피어올랐다.
“이영식 시인님, 당신에게 시란 그토록 소중하고 또 소중한 것입니까? 왜입니까?”
그런데 정말 왜일까? 현재 이 물음을 적고 나니 기실 이 시집에 대해서 다 말한 것만 같은 말할 수 없는 충족감을 느낀다. 그러므로 아주 성급히 말해서, 본래 답이 없는 물음의 궤적을 자문자답의 형식으로 좇게 될 이후의 글들은 어쩌면 사족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니, 엄연히 난필의 사족이 되면 좋겠다.
1. 들어가며
시집 『休』에 들어 있는 68편의 시편들을 관통하는 물음은 세 가지로 대별된다. 첫째는,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은 어떤 공간인가?’ 둘째는, ‘나(우리)는 현실공간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는 존재인가?’ 그리고 셋째는, ‘나는 왜 시를 왜 쓰게 되었는가, 시는 그리고 시인이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것이다. 이 글은 시인이 제시한 세 가지 물음에 대해 역시 시인이 자신의 시편들 속에 마련해 놓은 대답을 실존철학의 사유를 도구로 삼아 더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시인이 던진 세 가지의 물음의 근원이 근본적으로 인간의 존재근거와 존재방식과 관련된 ‘실존의 사유’에 맞닿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2-1, 현실과 존재
시집 『休』에 드러난 시인의 현실인식은 비관적이다. 현실에 대한 암울한 인식은 두 지점으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는 자본에 의해 식민화한 삶, 다른 하나는 존재에 대한 실존적인 성찰이다. ‘쓸개꽃이 피었습니다’, ‘시계 박물관’, ‘못의 천국’, ‘가시나무 춤’, ‘복제늑대’ 등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어느 궁벽한 날의 사냥’, ‘낙타 사파리’, ‘새들의 지도에는’ 등은 후자의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근거를 두 가지의 인식에서 살피겠거니와 우선 ‘가시나무 춤’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보도록 하자.
사내가 회를 치고 있다
아가미와 아랫배 감싸듯 눌러 잡고 회칼을 예각으로 뉘었다
칼끝은 통점을 피해 날렵하고 부드럽게 스민다 살집 깊숙이 파고들어 살점을 떼어 낸다
살림이 거덜 나는 줄도 모른 채 도마 위 마술을 견디고 있는
놀래미, 칼날 지나며 살점 떠낸 자리에 가시나무 한 그루 선명하게 박혀 있다
물고기의 모양을 지켜 주던 내부 구조물이다
사내는 가시 양쪽에 붙었던 살을 모두 떼어낸 뒤에야 아가미에 덮였던 물수건을 걷어낸다 놀래미의 눈동자는 아직 멀뚱하다
제 몸 위에서 한바탕 칼춤이 벌어지고 살점이 몽땅 털린 줄도 모르는 눈치다
형태만 남은 놀래미를 수족관 속에 집어넣는다 가시나무 끝에 매달린 꼬리지느러미가 좌우로 꺾인다 속내 훤한 가시나무 춤! 기포 속에 너울거린다
몇 분 간 춤사위로 휘돌고 나서야 허리가 허전했던지 몸체가 휘뚝거린다 괴목槐木이 되어 서서히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가시나무를 방사放飼할 때부터 손목시계로 시간을 재던 사내가 고무장갑을 다시 당겨 낀다
더 놀라운 춤을 선보이겠다는 듯 회칼을 집요하게 노려본다
「가시나무 춤」 전문
‘눈 감으면 코 베어 가는 세상’은 인간적이었다. 작금의 시대에는 두 눈 부릅뜬 상태에서도 우리는 가진 모든 것을 한순간에 깨끗이 털린다. 누군가가 ‘예각의 칼날’로 마술처럼 감각의 ‘통점을 피’해 우리의 살점을 저미는 것이다. 주관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객관적인 수사로 현실 세계의 섬뜩한 비정함을 묘파한 이 시에서 가장 시선을 오래 잡아끄는 대목은 결말 부분이다.
횟집의 사내는 ‘형태만 남은 놀래미’의 ‘가시나무 춤’을 더 오래 선보이기 위해 ‘고무장갑을 다시 당겨 낀’다. 사내의 기능은 단순히 놀래미의 회를 뜨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가시나무 춤’을 연장하는 데 있는 것이다. 즉 ‘칼’을 가진 자가 상대도 모르게 상대가 가진 모든 것을 탈취하는 것은 서막일 뿐, 죽었으나 단지 생물학적으로 잠시 살아 있는 대상이 끔찍하게 죽어가는 과정을 고객이 즐기도록 하는 것이 이른바 ‘메인’인 것이다.
횟집 사내는 ‘자본’의 고용인에 불과하다. 자본의 메커니즘은 주체를 단순하게 도구화한다. 횟집 사내를 인격 주체가 아니라 ‘칼잡이’로 철저하게 도구화하는 것이다. ‘가시나무 춤’을 감상하는 고객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자본이 자기증식을 위해 벌여놓은 끔찍한 ‘살풍경殺風景’을 오히려 값비싼 돈을 내며 즐기는 존재라는 점에서 ‘또 다른 놀래미’에 불과하다. 요컨대 ‘횟집’은, 하버마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본축적의 경제적 메커니즘이 식민화한 생활세계’의 환유이다. 식민화한 세계의 사람들은 ‘누군가 아삭 물어뜯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육된 시간’(‘쓸개꽃이 피었습니다’)의 존재들이다. 그들의 가족은 ‘소통을 꿈꾸지 않’으며(‘시계박물관’), ‘뼈주사 한 번 맞아 본 적이 없이 공만 굴리던 일개미’들(못의 천국’)이다.
시인은 자신이 ‘허명을 쌓기에 급급한 도시의 상투성에 갇’혀 ‘독기는 사라지고 이빨은 무뎌졌’으며 ‘언제부턴가 꼬리를 관리하게 되’었다고 토로한다. 그리고 자신은 ‘늑대 같은 놈이 아니라 늑대’가 되고 싶으니 ‘누가 내 귀싸대기를 후려쳐 달’라고 부르짖는다(‘복제늑대’). 자본이 구획한 세계에서는 자본의 논리에 부합하는 존재, 즉 자본 불리기에 최적의 우성 DNA만 필요하다. 우성의 인자들은 끝없이 복제되고 열성인자는 즉시 도태된다. ‘늑대 같은 존재’은 자본의 카테고리에서 정체성을 상실한 존재이다.
한편, 인간 존재에 대한 시인의 존재론적 성찰이 시집 『休』에 어떤 양상으로 그려지는지 ‘진흙소’를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진흙으로 빚은 소 한 마리 장대비 속에 젖고 있다
가죽 흘러내리고 살점 흘러내리고 뼈 내장이 녹아내린다 맹물 같은 시간 붉디붉게 쓸려 간 뒤 풀밭 위 혼자 남은 빈 코뚜레, 소의 콧김 지우지 못한 듯 굽은 얼개 펴지 못한다 빈 고삐 잡고 하냥 젖을 뿐
아훔(a-hum)*
자, 누가 저 소의 울음을 들었다 할까
* 범어. 입을 벌리고 내는 소리와 다물고 내는 소리, 일체 만법의 시작과 끝.
「진흙소」 전문
‘진흙소’가 운다. 누가 빚었는지도 모르는 채 시종始終이 없는 시간의 광야에 내팽개쳐진 진흙소. 진흙의 조형물은 장대비에 속수무책이다. 진흙의 가죽과 살점, 내장이 마치 염산에 닿은 듯 하릴없이 녹아내린다. 진흙소가 운다. ‘아훔’하고 운다. ‘아(a)’에서 ‘훔(hum)’까지 운다. 진흙소의 찰나의 생이 ‘아훔(a-hum)’ 단말마斷末摩의 울음에 응축된다. 바람에 곧 스러질 콧김만이 빈 코뚜레에 잠시 머물러 존재의 증거를 제시할 뿐, 아무도 장대비가 퍼붓는 들판에 소라는 존재가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이 시에서 의미심장한 부분은 3연과 4연이다. 3연의 ‘아훔(a-hum)’은 범어를 기상천외하게 우리말 소울음의 의성어로 차용한 말이다. 우리의 귀에 젖은 단순한 ‘음메’라는 말과 달리 ‘아훔’은 ‘소울음’에 한정된 기의의 진폭을 거칠게 흔든다. ‘일체 만법의 시작과 끝’이라는 범어의 의미를 더하면서 한계상황에 놓인 존재의 비극성을 증폭시킨다. 그리고 4연의 ‘자, 누가 저 소의 울음을 들었다 할까’라는, 혼잣말처럼 파문처럼 의식의 심층으로 퍼지는 완벽한 결구는 우리를 존재론적인 성찰로 이끈다.
‘진흙소’는 그 자체로서는 완전히 우연하게 아무런 근거도 없이 시간의 벌판에 존재한다. ‘진흙소’가 인간 존재의 암유임이 무리 없이 받아들여진다면, ‘진흙소’가 처한 시공간은 다른 인간존재와 마찬가지로 화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런데 그 ‘또 다른 진흙소’가 돌연 자신의 비극적인 시공간에서 이탈한다. 그리고 그 상황을 타인의 그것인 양 무심하게 대상화한다.
장대비 속의 ‘진흙소’와 그 것을 바라보는 ‘또 다른 진흙소’. 그러나 이 둘은 실상은 둘이면서 하나인 ‘불이不二’의 존재이다. ‘또 다른 진흙소’는 ‘진흙소’의 ‘의식의 존재’이다. ‘진흙소’가 무의미하고 우연적인 존재라면, ‘또 다른 진흙소’는 그 우연성에 의미를 부여하고 근거를 제공하는 존재이다. 전자가 그 자신에 대해 존재하는 것에 비해, 후자는 오히려 스스로 자기 자신을 갖고 있지 않은 존재이다. 시종이 없는 광야에서 시종이 없는 장대비에 녹아내리는 ‘진흙소’를 바라보는 ‘또 다른 진흙소’, 그는 자유라는 숙명을 지고 있는 대자 존재요, 이 시의 화자요, 곧 시인인 것이다.
‘인간-인간세계’에 대한 시인의 존재론적인 성찰은 시집 『休』의 여러 시편들에서 다양한 이미지를 통해 드러난다. 예컨대, ‘구더기-똥물이나 썩은 시체’(‘어느 궁벽한 날의 사냥’), ‘낙타-모래 바다’(‘낙타사파리’), ‘새-허공’(‘새들의 지도에는’)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진흙소’와 진흙소를 바라보는 ‘또 다른 진흙소’의 관계처럼, ‘구더기’는 그냥 구더기가 아니라 ‘지상의 가장 낮고 궁벽한 곳’에서 ‘오체투지’하여 시를 쓰는 존재이고, ‘낙타’ 또한 아라비아 대상隊商의 운송수단이 아니라 ‘알라에게도 목을 꺾지 않는 도도한 존재’로서, ‘인간이 세워 놓은 아흔아홉 신궁神宮 너머’에 있는 ‘카멜의 누각’ ‘높은 정신’을 향해 긴 눈썹을 여는 존재이다. ‘새’도 마찬가지이다. ‘새’는 단순히 무한한 허공의 한 점 유한한 존재가 아니라, ‘비상의 극점’을 향해 ‘터질 듯한 심장으로 또 한 세계를 세우려 뼛속까지 텅텅 비우’고 영원히 현재를 날고 있는 존재이다.
인간과 인간세계에 대한 시인의 비관적인 인식이 급전急轉하는 지점에 시詩가 있다. 시는 시인의 의식의 공간이자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시공간이다. ‘또 다른 진흙소’, ‘시를 쓰는 구더기’, ‘도도한 낙타’, ‘영원히 현재를 나는 새’, 이들은 곧 대자 존재로서의 시인의 다른 얼굴이다.
2-2, 즉자 존재에서 대자 존재로
‘사랑’이라는 기표는 유사有史 이래 너무도 많은 거짓사랑의 기의를 담아낸 결과로 볼품없이 찌그러지고 낡아서 해져 버렸다.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의 진정을 담지擔持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영식 시인의 『休』를 읽고 사랑이라는 기표의 유효 기간을 당분간 다시 연장하는 데 선뜻 동의하게 된다.
그해 겨울, 뚝딱
육송 판자가 망치질 몇 번 당하고는
식탁이 되었다 나무라는 태생적 가계를 버리고
밥상이 되었다 식은 밥 덩이와
간장 종지가 섬처럼 떠 있는, 식탁은
나무가 아니라 밥상이다 소나무가
몇 개의 못을 받아 삼키고 이름을 버리듯
쥐꼬리만 한 월급 받아 쥐고는 꼬깃
꼬깃 접어 두었던 내 안의 꿈들을 살랐다
여보가 되고 아빠가 되어
간 쓸개를 내놓았다 내 몸이 뻗정다리가 되어
겨우 버티는 식탁, 식탁이 삐걱거린다고
나무로 숲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
곧장 불구덩이에 던져질 뿐이다
속이 텅텅 비어 더 내어 줄 것 없고
삭아 내릴 일만 남았다며 꿈을 접었을 때
금 가고 이 빠진 자리가 스멀거렸다
싹이 돋았다, 빌어먹을!
시가 왔다 밥 한 덩이 바꿔 먹을 수 없는
시, 남들은 사시 눈 뜨고 보지만
이제 비로소 내 묵은 일기장을 펼쳐 쓴다
그 겨울의 식탁이 꽃 피웠노라
「그 겨울의 식탁」 전문
‘그해 겨울’ 뚝딱 망치질 몇 번에 식탁이 되어버린 소나무. 삶의 ‘겨울’이어서, ‘삶이 겨울’이어서 나무는 ‘몇 개의 못을 받아 삼키’고 하릴없이 식탁이 되었고, 또 하릴없이 이를 감수하지만 자신이 나무였던 것을 잊은 적이 없다. 결코 나무가 되겠다는 꿈을 잊은 적이 없다. 식탁이 다시 나무가 되기까지, 상대 존재인 ‘여보’나 ‘아빠’가 절대 존재인 ‘나’를 회복하기까지 몇 년이 걸렸을까.
그러나 이 시에는 흘러간 세월에 대한 후회는 가뭇없고 초록 숨결만이 새록새록 하다. ‘속이 텅텅 비’고 ‘삭아 내릴 일만 남’은 ‘뻗정다리’ 식탁의 균열, ‘금 가고 이 빠진 자리’, 거기 젖니처럼 돋아난 ‘시’의 달뜬 숨결. 이 시의 어디에도 ‘사랑’이라는 말이 없고, 또 연서라는 말도 없건만 시에 대한 시인의 저린 사랑이 느껴진다.
그런데 ‘식탁’과 ‘나무’의 존재론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한 발짝만 더 들어가 보도록 하자. 싸르트르 식으로 말해서 ‘식탁’은 ‘즉자卽自 존재’, 즉 ‘그 자신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상태’이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나 들판에 있는 돌처럼 자신의 존재 근거를 자신의 내부에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이에 비해 ‘나무’는 ‘대자對自 존재’이다. 즉, ‘즉자(卽自)의 직접 상태에서 발전한 제2의 단계로서, 의식적 존재자가 자기 안에 갖는 독립적인 다른 하나의 자아’를 일컫는다.
인간은 ‘식탁’이 아니라 ‘나무’를 지향한다. 왜냐하면 실존적으로 말해서, 인간은 ‘피투성被投性’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누구나 원해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 근거를 자기 속에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무근거성’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유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른바 ‘텅 빈 실존’이다. 이때의 자유는 ‘억압’의 대립개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 존재가 숙명처럼 안게 되는 ‘필연’의 개념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화자가 ‘식탁이 아니라 나무로 살겠’다고 말할 때, 그것은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인 인식에 근거한 진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이 시는 즉자 존재로 함묵했던 ‘나’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의 비망록備忘錄이다.
2-3, 타자
시집 『休』에서 시인이 구축한 세계 속에 등장하는 화자인 ‘나’ 이외의 인간존재, 즉 타자는 화자의 날카로운 관찰을 거쳐 의식 속에서 걸러진 ‘오브제’로서의 존재이다. 그 존재들은 시 속에서 현실세계에서처럼 생생하게 살아 있는 자신의 삶의 양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화자에 의해 관찰된 일면을 통해 시적 의미를 구축하는 데 우선적으로 기여한다. 이는 어떤 면에서 시인이 자신의 직접경험의 바깥에 있어서 그 삶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 타자에 대해 무모하게 감정을 이입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시적진술을 수행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관찰’이라는 제한된 시선에도 불구하고 『休』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삶의 보편적인 리얼리티를 획득하는 것은 그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냉철한 시각과 대상에 대한 끈덕진 존재론적 성찰 때문이다.
- 술잔이 몇 순배 돌자, 여자가 느닷없이 집들이 이야기를 꺼낸다
나 꽃집 셋방살이 끝났데이 인자 진짜로 내 집이고 내가 주인인 기라 그 동안 열세 살 내 연초록 나이부터 문깐방에 꽃집 체리 놓고 사십여 년 꼬박꼬박 달세 므니라꼬 요통, 하복통으로 고생께나 했다 아이가 아마 지금까증 백만 생이도 더 되는 장미꽃, 다발로 갇다 바쳤을 끼라 우짜다 쬐매 늦거나 한 달만 걸러 뛰보래이 좌불안석이 따로 없는 기라 나 이젠 당귀 잉모초도 그만 묵을 끼다 달력 위에 기리 넣던 주기 계산도 생리대도 다 소용 없것제 그래, 빚이면서 빛이었던 내 몸속 달뜬 소용돌이 잠재우고 인자 자유인 기라 그랑께 오늘 이 술은 달품 팔 일 없이 참말로 내가 호령하는 대청마루로 입주한 내 몸의 집들이 아이가 마, 잔이 넘치도록 꾹꾹 눌러 따라 보거래이
꽃의 집이었던, 여자는 향낭을 털어 내고도 다시 만월로 뜨고 있었다
「만월, 집들이」전문
세계에 갑자기 내던져진 존재인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고독하다. 따라서 홀로인 개인은 타자와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타자는 소위 양날의 칼이다. ‘나’는 타자 덕분에 외로움을 덜 수 있지만, 또 타자에 의해 대상화한다. 싸르트르가 ‘대타 존재’로 명명한 타자는 나를 존재시키고 나를 나이게 하는 필수불가결한 존재이다. 나는 타자에 의해 객관화한 나를 자각하고, 타자가 내게 부여한 만큼의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타자의 시선 앞에서 나는 주체성을 상실하고 하나의 객체로 대상화한다.
이 시의 ‘여자’는 ‘꽃’의 암유인 ‘여성성’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이다. 자신의 몸에 덧댄 ‘꽃집’에 주인 행세를 하기는커녕, 임차인賃借人의 눈치를 살피며 무려 40여 년간이나 셋방살이를 해 온 것이다. 그런데 그 여성성은 여자가 주체적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타자가 부여한 것이다. 이는 ‘달거리가 조금 늦거나 한 달만 걸러’도 전전긍긍하는 여자의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이를테면, 여자는 달거리가 조금이라도 불규칙하면 지순한 여성성이 훼손당한다는, 타자가 주입한 가치에 오랜 세월 종속됐던 것이다.
‘내 몸 속 달뜬 소용돌이’도, 라캉의 표현처럼 ‘여자’의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이다. ‘여자’가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자발적으로 말하는 것 같지만, 무의식의 측면에서 보면 그것도 타자의 진술로써 구성된 것이다. 여성이 그 존재 자체로서가 아니라 ‘향낭’이 있어야만 진정한 여성이라는 가치론적 인식은 여성을 도구화한다.
이 시에서 시인은 ‘여자’의 발화를 통해 여성은 향낭을 지키는 데 삶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여자가 향낭을 털어내고 나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진 것처럼 타자에 의해 ‘나’에게 고착된 가치를 덜어냄으로써 주체와 객체의 전도된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2-4, 시인
대자 존재인 시인은 끊임없이 자신을 벗어나려고 스스로를 자신의 밖으로 ‘기투企投’하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다. 이때의 자유는 ‘자기의 근원이 된다’는 뜻의 ‘自由’가 아니라 ‘근거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무無’인 대자 존재, 즉 속이 텅 빈 대자 존재로서의 시인은 자신의 빈속을 채우기 위해 어떤 대상이 필요하며 그것이 없이는 자신도 존재할 수가 없다.
고래들이 떼 지어 바닷가 백사장에 널브러졌다 수십 마리 난쟁이밍크고래가 머리를 육지로 향한 채 착하게 숨을 놓았다
고래야 그 옛날 땅 위에 마지막 발자국 남기고 바다로 간 최초의 고래야 너는 어느 궁벽한 곳 난쟁이로 살다가 바다로 뛰어들었니
나는 너의 일탈과 무모함을 사랑한다 가당찮은 혁명을 사랑한다
땅을 벗어던지는 순간 몸속에 출렁거렸던 것은 공포가 아니라 상상 한 상자, 난바다 떠돌다가 그 간절함이 신성(神聖)에 닿아 지느러미를 얻었다지
심해 산호초 사이 헤엄치며 먹이를 구하지만 폐호흡을 고집하는 고래는 끝내 물고기가 아니다
콧구멍을 정수리로 밀어 올려붙여 허공을 숨 쉬고 햇빛과 바람과 흙내가 피돌기하는 너는 대지의 유전자를 품었으니
구백 킬로 밖 음파의 진동까지도 느낀다는 고래야 소리로 보는 너의 시안(詩眼)을 사랑한다 새끼에게 젖을 짜 먹이는 포유를 사랑한다
난쟁이고래, 너는 백설공주와 일곱 장난꾼들의 집이 궁금해 주검까지 육지로 밀고 와 건들바람에 풍장을 치르는 게로구나
「최초의 고래에게 부치다」 부분
‘궁벽한 곳의 난쟁이’는 한계상황에 놓인 즉자 존재이다. 그는 자신을 벗기 위해 바다로 투신한다. 즉 현재의 한계상황을 초월하여 ‘바다’라는 미래로 자기를 내던진다. 화자는 이를 ‘난쟁이의 일탈’이라고 규정하고, ‘나는 너의 일탈과 무모함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나도 현재의 한계 상황을 무모하게 일탈하려는 욕구를 가진 존재이다’가 된다. ‘난쟁이’가 ‘난쟁이밍크고래’가 되는 것에 즉자 존재인 ‘나’가 대자 존재인 ‘시인’이 되는 것이 덧씌워진 것이다.
‘난쟁이’는 지상의 한계상황을 벗어던지는 순간 몸속에서 출렁거리던 공포가 상상력으로 바뀌는 것을 감지한다. 자신이 한계상황을 벗어나도록 한 동인動因이 상상력임을 느끼고, 또 그것이 ‘바다’에서의 존재방식이 될 것임을 예감한다. 미상불, ‘난바다’를 떠돌던 ‘난쟁이’는 상상의 간절함이 ‘신성’에 닿아 종내終乃 지느러미를 얻’게 되지 않는가. ‘난쟁이밍크고래’가 ‘시인’의 알레고리임을 인지할 때, 그리고 시인이 끊임없이 자기 동일성을 붕괴해 존립하는 대자 존재임을 환기할 때 ‘바다’는 시인에게 빈속을 채워줄 어떤 세계이다. ‘난쟁이’의 몸속에 출렁거리던 것이 ‘상상’인 것을 떠올려보면, 시인의 ‘바다’는 ‘상상’이 출렁거리는 오브제들의 바다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대자 존재로서의 시인은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이다. 존재자가 ‘존재하는 사물’을 지칭한다면, 존재는 ‘존재자’라는 사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하나의 움직임 또는 작용이다. 이 시에는 시인의 존재근거와 존재방식, 그리고 종말이 나타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시인의 존재근거는 ‘무’이고, 존재방식은 ‘상상’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종말은? 바닷가에서 ‘머리를 육지로 향한 채 착하게 숨을 놓’은 난쟁이밍크고래의 시체, 그것은 그저 사물이지 않은가.
‘난쟁이밍크고래’라는 존재는 어디에 있는가? 다시 묻는다면, 시인이 죽고 난 뒤에 시인은 어디에 있는가? 시인은 이 역설적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주검까지 육지로 밀고 올라 와 건들바람에 풍장을 치르는 난쟁이밍크고래’에 감추어 두고 있다. 자신의 시체를 풍장 시키는 자신, 즉 난쟁이밍크고래에 객체와 주체가 혼재하는 상황을 통해서 시인의 종말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대자 존재인 시인의 종말은 시인의 존재근거처럼 ‘무’이다. 자신의 주검을 육지로 밀고 올라 온 난쟁이밍크고래, 시인에게 죽음이란 없다. 오브제의 바다에서 또 하나의 오브제로 존재할 뿐이다.
3. 나가며
아기 울음보가 터졌다
저 신생의 울음 자루에서 만발한
꽃, 자궁 빠져나올 때부터
폭죽 터트리듯 토해 내는 참 질긴 끈이지
고치실처럼 꿈틀꿈틀 뽑혀 나와 제 몸을 감는 끈
지층에 묻힌 화석처럼 속속 불려 나오는 끈
울음보다 부지런한 끈도 없을 거야
오직, 울음보 하나로
탁한 정신을 헹구어 주는 뜨겁고도 애틋한 끈
질문보다는 답이 앞서는 끈
사상이나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수레바퀴를 돌리는
가열한 울음 띠는 대대로 종족의 뿌리를 잇는 힘이지
감아 던지면 새벽별 몇 개 뚝딱 따 올 것 같네
낡고 병든 울음 띠가 이승의 그림자를 벗는 날
마지막 숨 놓으면서도 들러리 세워 울음 끈을 돌리지
풍화되지 않는 매운바람 같은 끈
울음은 울음을 낳는다
그 끈 덥석 받아 물고 세상에 정수리를 내밀 때
패기 찬 울음 깃발이 창궐했다지
응아응아-
아, 이 낡고 상투적인 생의 기교
태아의 목울대 친친 휘감고 힘을 키웠을 거야
외줄 울음보로 매달린 어린것을 어르다가
그 질긴 바코드를 짚어보네
금물을 입히기보다는 잿물에 빨아 널고픈
울음이라는, 오래된 미래 한 토막
「울음의 바코드」 전문
시집 『休』에서 시인이 바라보는 인간은 암울하고 비극적인 존재이다. 이는 실존철학자들이 인간을 보는 관점과 맥락을 같이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신 앞에 선 단독자’라고 말했고, 하이데거는 실존의 근원에 ‘불안’이 있다고 보았으며, 싸르트르는 인간이 ‘무’와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시인은 이 시에서 인간의 존재근거와 존재방식을 ‘울음’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신생의 시점부터 임종의 때까지 울음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존철학자들이 정의한바, 인간은 비합리적이고 부조리와 우연성에 가득한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시지포스처럼 운명의 무거운 바위를 쉬지 않고 언덕 위로 밀어 올리는 존재이기도 한 것처럼, 이 시의 인간도 울음으로 울음을 질기게 밀어가는 존재이다. 그리하여 ‘풍화되지 않는 매운바람 같은’ ‘울음이 또 울음을 낳’는 것이다.
시집 『休』 한 권 전체를 ‘세계-내-존재’인 인간과 시를 존재론적으로 탐구한 서사시라고 가정할 때 이 시는 ‘결結’에 해당한다. 시집의 대다수의 시들에서 화자는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대상에 대한 감정 노출을 극히 억제하고 관찰이나 달관, 해학으로 일관한다. 그런데 이 시에 이르러서는 마치 오래 참아왔던 울음을 터트리는 것처럼 가면을 벗어던진 맨 얼굴로 감정을 분출한다. 인간존재에 대해 무슨 사무치는 애정이라도 있었던가. ‘오직 울음보 하나로 탁한 정신을 헹구어 주’는 울음이 우리를 그 안에 들어앉힌다.
1. 탈출, -일상의 삶은 갈고리에 걸려 비루먹던 나날들
- 일탈돼지부속집 p. 20 아줌씨 갈매기살이나 쌔려 묵고 바다로 날아가 불까?
-낙타사파리 p. 17. 낙타사파리를 떠나자...일상의 갈고리에 걸려 비루먹던 나날들 뚝, 떼어 던지고 사막으로 가자...한 잎 베어 물고 싶은 날고기 같은 하늘 아래 / 사막의 시간은 산 채로 씹힐 것이다. / 날것, 그대로의 나를 만날 것이다.
- 쓸개꽃이 피었습니다 p. 15 “아시는지, 쓸개 다 빼 주고도 사지 못할 이 낯선 비린내를 마른 빵에 필 곰팡이 꽃처럼 누군가 아삭 물어뜯어 주기 기다리고 있는 사육된 시간을......
- 최초의 고래에게 부치다, p 35. 그 옛날 땅 위에 마지막 발자국 남기고 바다로 간 최초의 고래야 너는 어느 궁벽한 곳 난쟁이로 살다가 바다로 뛰어들었니 // 나는 너의 일탈과 무모함을 사랑한다 가당찮은 혁명을 사랑한다 // 땅을 벗어던지는 순간 몸속에 출렁거렸던 것은 공포가 아니라 상상 한 상자, 난마다 떠돌다가 그 간절함이 신성神聖에 닿아 지느러미를 얻었다지
2. 결핍
- 휴, p. 18 고무장박 벗은 과수댁 담배 한 개비 꺼내 문다......“씨부럴 것들 / 요로코롬 개좆같이 생겨 워쩌자는 겨// 개불 허리 톡톡 쳐서 일으켜 세우는 /과수댁의 굴 껍질 같은 // 休
2. 비루먹은 날들 속에서
- 시계박물관, p. 25. 텅 빈 집......내장은 서서히 녹슬고 / 시간의 뼈다귀는 미라가 되어 간다
- 징, p. 34. 놋쇠가 불에 익었다가 다시 방짜로 펴질 때까지 볶이고 망치에 맞은 매‘ 그러나 ’나들며 바라보다가 지치고 비틀거릴 때 슬며시 두드려 깨워보곤 하는데 켜켜이 삼킨 울음 안에 나를 들어앉힌 저 풍장의 깊은 내공‘
- ‘나’는 똥물 속에서 오체투지 하는 구더기, 구더기의 환유인 시, 시인
- 침묵의 재구성, p. 22. 맡은 바 정물로 앉아 버티는 것이다/ 구르거나 되바라지지 않고 / 각자 내면을 바닥까지 들여다보는 일
- 진흙소, p. 24. 진흙으로 빚은 소 한 마리가 장대비 속에 젖고 있다 / 가죽 흘러내리고 살점 흘러내리고 뼈 내장이 녹아내린다 맹물 같은 시간 붉디붉게 쓸려 간 뒤 풀밭 위 혼자 남은 빈 코뚜레, 소의 콧김 지우지 못한 듯 굽은 얼개 펴지 못한다 빈 고삐 잡고 하냥 젖을 뿐 // 아훔(a-hum- 범어. 입을 벌리고 내는 소리와 다물고 내는 소리, 일체 만법의 시작과 끝) // 자, 누가 저 소의 울음을 들었다 할까
3. 탈출의 모색과 성찰
- 아포리아 사막을 건너다. p 44. 삶이라는 외통 골목은 늘 가면을 쓰고 / Aporia를 춤추게 한다 // 나의 시가 그러하다 / 은유의 옷 휘감아 두르고 / 아포리아 사막을 건너려 하지만 / 길라잡이가 되지 못하는 별 / 나도 속고 시도 속고 / 신기루 허상 속으로 떨어지고 마는 / 겉 발효된 언어의 술지게미여 / 시를 읽고 취하는 건 늘 / 모순의 혹을 굳기름처럼 떠메고 사는 / 낙타, 시인뿐이다
4. 시인이 인식하는 밥
꽃으로 시작하다 p. 52. 밥을 얻기 위해 한 삽의 무엇도 해 본 적 없는 / 조그마한 입에 밥은 목적이 아니다, 놀이다! / 하나의 동선으로 이어지는 저 지극함 / 내 풍진 묻은 손으로는 따라할 수 없는 / 장난감 나라 먼 축제처럼 보인다......희망처럼 씹었지만 비굴이 되기도 하는 밥
5. 시인이 인식한 세계
- 아버지의 숲은 과거형이다 p. 56
핵가족 시대 ‘아버지의 희자는 간단히 폐기 처분 되었다 // 이제, 아버지의 산에는 큰 바위 얼굴이 없다 / 서슬 퍼렇게 눈빛 부딪치던 포수도 맹수도 없다 / 다 뜯어 먹힌 구두로 탑골공원을 맴돌거나 / 원시적 고랑을 파는 뒷방 늙은이로 돌려 앉혔다......오늘도 몇 느럭의 슬픔이 유기되어 있는가 / 아들, 딸 주소를 혀 밑에 끝내 숨긴 채 / 무연고 치매 노인이 되어 격리 수용되는가......
- 오전 10시에야 깨어나는 p. 62
가위바위보! // 날개 펼쳐 ‘보’만 내는 어린 나비에게 ‘가위’를 ‘바위’를 가르친다 가위는 보자기를 자르고 바위는 가위를 부수는 거라......저 여린 날개 사이에 우리는 머지않아 푸른 지폐를 찔러 주겠지 후라이드치킨과 버거킹을 쥐어 주고 자본의 왕국에 시녀가 되는 법을 가르쳐 주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