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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영화에 나타난 시대성 具見書(평택대 국제관계학부 교수)

장코폴로 2014. 1. 20. 04:37

  일본영화에 나타난 시대성

                       : 메이지유신부터 태평양전쟁까지를 중심으로

 

                                                    具見書(평택대 국제관계학부 교수)

                                                        kskoo@ptuniv.ac.kr

 

Ⅰ. 머리글

  문화는 경제적·정치적·사회적 배경과 타협하거나 반향해서 형성되는 것으로 특히 시대적 특징을 반영한다는 의미에서 시대성을 함축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문화는 강제적으로 규정되거나 의도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한 자유로운 관계에서 시대적 의제를 들춰내어 형성되어 시대성격을 표출시키기도 한다. 이 점에서 본다면, 문화는 예술적 존재뿐 아니라 역사적 흔적이 응집된 것으로 시대성을 가장 잘 함의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로 존재한다. 그런 문화는 다양한 구성요소가 농축된 시대성의 종합체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문화는 사상, 종교, 생활양식, 사회구성, 정치성향, 경제성향, 민족성 등을 함의하고 있고, 음악, 영화, 연극, 문예, 소설 등 다양한 매체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특히 문화를 구성하는 개별요소는 각 시대가 추구하는 배경을 통해서 형성된 파편적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는 각 구성요소의 특징을 함의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총체적 개념으로서 문화가 갖고 있는 시대적 특징과 각 구성요소가 갖고 시대적 특징을 시대성으로 규정한다.      

  시대성은 문화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매체에 의해서 표현되는 까닭에 매체의 성격과 역할기능에 따라 다양하게 표출된다. 따라서 어느 시대의 특성은 매체에 담겨진 각각의 부분적 시대성의 종합으로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매체가 공유하는 시대성이 존재하기도 하는 반면에 매체가 이질적으로 형성하는 개별적 시대성이 나타나기도 한다. 본고에서는 단편적 시대성을 나타낼 위험성이 있지만, 문화를 구성하고 있는 영화를 매개로 해서 메이지부터 태평양전쟁까지의 시대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즉 1868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영화에서 나타난 시대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다양한 문화구성요소 중에서 영화를 중심으로 고찰하는 이유는 영화가 예술로서 존재하는 순수한 본질이외에도 시대적 이념과 사상을 반영해서 전파하는 종합미디어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영화는 기존의 한정된 표현과 전달방법에서 인간의 오감을 통해 총체적으로 실감나게 표현하고 전달하여 매체혁명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지배자에 의해 강력하게 통제를 받아 정부정책을 속도감있게 반영하고, 국민여론을 형성하는 현실적이며 심리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기능을 하였다. 이처럼 일본에서 영화는 가장 민감하게 시대성을 반영하는 매체로 성장하였고 그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이것을 볼 때, 일본영화는 수동적으로 단순하게 시대성을 반영하는 측면도 있지만, 근대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시대성을 반영하여 왔다. 일본은 이 시기에 부국강병을 추진하고 제국주의국가와 경쟁하는 과정에서 영화를 국가형성과 국론통일을 선전하고 구축하는 미디어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국가통제하에서 검열과정을 겪거나 또한 지원을 받은 일본영화는 더더욱 시대성을 반영하는 경향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노에르 바치에 따르면, 당시 일본영화는 해외 영향이

 

차단되어 독자적인 순수한 양식을 완성했다고 보고 있다. 이런 평가가 사실이라면, 당시 일본영화는 내부의 시대성을 더욱 반영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시기 영화인이 취한 행동과 영화의 성격에 대해서 전후 영화계는 충분한 역사적 검토를 회피하고 있다(山田和夫,1997;四方田犬彦,2000). 그것은 전시기의 일본영화가 담고 있는 시대성을 모호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메이지유신부터 태평양전쟁까지의 영화에 나타난 시대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Ⅱ. 영화의 시대적 배경

 

1. 정치적 배경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시작한 시기에는 이미 선발제국이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라고 하는 제국주의의 시대에 들어가 무력으로 세계를 재분할하는 투쟁을 하였다. 대영제국은 1899년 보아전쟁을 통해서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남아프리카를 병합하였다. 미국은 하와이를 병합하고 스페인령 필리핀과 쿠바에서 민족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이것을 구실로 1898년 미서(美西)전쟁을 일으켜 필리핀을 빼앗고 쿠바를 속국으로 하였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서양국가의 침략과 분할에 저항하는 중국인에 의한 의화단봉기가 일어나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러시아, 일본 등이 연합군을 결성하여 진압하고 이권을 챙겼다. 이 시기에 일본은 조선개방을 구실로 불평등조약을 맺어 침략을 시작하였고,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켜 중국으로부터 대만을 약탈하여 중국진출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어서 1905년 러일전쟁, 1910년 한일합방, 1918년 제1차세계대전 참전, 1920년대 세계공황, 1923년 관동대지진 등을 경험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이어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제국주의를 추구하였다.

  일본지식인들은 근대화를 세계무대에 일본의 지위를 확보하려는 국가적이며 국민적 목표로 삼아 강력하게 추진할 것을 주문하였다. 1901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주제하는 「시사신보」는 「국민이 세계적으로 웅비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다」라는 사설을 게재하여 "신세기에 일신하여 세계적 신무대 더욱이 동양을 개관하자, 우리국민은 모두 분발하여 신세계에서 우위를 점할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당시 일본은 후쿠자와의 탈아론을 국시로 국가성장을 추구하였고, 청일전쟁의 승리로 근대화가 신장되었으며, 국민국가의 성립을 위한 문화장치를 본격적으로 만들었다. 1894년 국수주의자인 시가 시게타카(志賀重昻)는 『일본풍경론』을 출판하였다. 이런 현상은 19세기 후반 절대주의적 천황제 하에서 후발자본주의국가로서 세계에 등장한 일본이 제국주의열강 대열에 들어가기 위한 지식인으로서의 의지표명이다.    

  서구영화가 들어온 1890년대는 서양화라는 신문화가 들어오면서 일본화라는 개념이 성립되었다. 문학에서는 오자키 모미지(尾崎紅葉)가 한 시대를 풍미하고 있었고, 그의 제자 이즈미 케이카(泉鏡花)가 데뷰했다. 특히 이즈미는 후에 신파에 많은 원작을 제공하여 일본영화가 멜로드라마의 특징을 띠게 하는데 공헌하였다. 1898년 일본에 온 프랑스 뤼미에르 사의 카메라맨이 촬영한 일본풍경 필름이 공개되어 일본인은 처음으로 자국을 영상으로 보았다.

 

특히 영화라는 새로운 장르가 형성되어 큰 변화가 일어났다. 서구제국주의가 발호하던 시대이었기 때문에 카메라맨은 전장을 돌아다니며 촬영하였고, 전쟁사실을 찍은 영화산업은 전쟁물로서 붐을 일으켰다. 일본에서 전쟁영화는 미국에서 수입되어 시작되었다. 미서전쟁이 시작되자, 외국영화를 수입해 간다(神田)의 긴키칸(錦輝館)에서 상영하고 있던 가와우라(河浦謙一)의 요시사와(吉澤)상점은 미국 스푸아사의 실제사진인 《미서전쟁》을 수입해서 1899년 긴키칸에서 공개하였다. 이것은 미국과 스페인양군의 전투사진이지만 트릭촬영을 한 의도적인 것이었다. 이런 실제전쟁을 통한 트릭촬영으로 형성된 전쟁영화는 대성공하여 전쟁물 붐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무성영화의 특징을 가진 일본영화는 시대극, 현대극, 희곡물, 기록영화 등 다양한 성격을 갖게 되어 시대적 특징을 담아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검열과 선전도구로 인식되었다.        

  일본영화는 1930년대에 접어들어 토기영화로 전환되었다. 당시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이미 근대주의를 실현하고 전쟁주의, 식민지주의, 제국주의 등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시기였다. 특히 대만, 조선 등을 식민지로 하는 제국을 강건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 강력한 민족주의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런 정치적 변화는 영화를 오락이나 예술로 강조하기 보다는 시대성을 반영하는 홍보수단으로 인식되어 강제적으로 통제하였다. 대표적 정치사건이 1931년 만주사변, 1936년 2.26사건이다1). 그리고 일본정부는 1936년 11월 25일 히틀러가 통치하는 독일과 일독방공협정을 체결하였고,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을 계기로 일본군은 중국에 전면전을 개시하였다. 이처럼 국내억압체제를 강화하고 일본군국주의가 발호하는 과정에서 일본영화는 국가정책에 협력하여 선전하는 국책영화의 성격을 띠었다.  

  중일전쟁이 종결되지 못하고 지속되는 가운데 일본은 새로운 국제전략을 구사하였다. 그것은 지금까지 구상해온 대동아공영권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었다. 1940년에는 2차고노에(近衛文 )내각이 성립되어 신체제운동이 내각의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그 내용은 「기본국책요강」으로 공표되었다. 신체제운동는 일본을 맹주로 하는 아시아국제질서인 대동아질서를 만드는데 목적이 있었다. 즉 일중전쟁을 일본에게 유리한 형태로 끝내고, 미국의 경제제재에도 타격을 받지 않도록 아시아를 일본의 경제권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국민에게 사욕을 버리고 공익우선을 원칙으로 하여 국민의 국가에 대한 협력을 끌어내는 것이다. 또한 독재정당에 국민을 참가시키고 의식을 개조하여 정치체제를 전체주의체제로 변혁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군비증강을 위해서 국민을 장기간 검소한 생활에 인내하게 하는 한편 외교적으로 군사력을 배경으로 위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이런 운동으로 정당이 해산되고 의회의 주류파와 비주류파, 육군, 관리 등간의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동년 10월 12일 고노에 수상을 총재로 하는 대정익찬회가 발족되었다. 일본영화계에도 도호(東寶)의 선전지 『도호영화』에 대정익찬회 국민생활지도부장인 기다 소이치로(喜多壯一

 

郞)가 취임하였다. 대정익찬회는 전시하에서 영화계에 국민의 질을 높이는 역할을 요구했고, 그것을 위해서 영화산업에 공익우선의 자세를 요구하여 검열당국과 같은 자세를 취하였다. 이런 정치적 변화는 영화에 반영되어 국책영화로 발전하였다.

 

2. 문화적 배경

  전전의 문화적 배경은 정치적 변화에 따른 문화적 통제 즉 영화통제가 시작되어 영화의 성격을 규정하였다. 일본정부가 행정적 대응으로 영화검열을 시작한 시기는 1911년 10월이었다. 문부성은 「환등 및 활동사진필름심사규정」을 만들어 각부현 경찰부가 직접 검열을 하였고, 1917년 7월에는 도쿄경시청이 「필름검열기준」을 공포하고 8월부터 검열을 시작하였다. 이 필름검열기준은 경시청령으로 제정된 「활동사진검열규칙」에 포함되었고, 다음과 같은 영화장면의 상영을 금지하였다. 즉 국체 및 군주의 존엄을 침해하는 장면, 간통·자유연애 등 국가의 미풍양속에 반하는 장면, 입맞춤(接吻), 침실 등에서 외설적인 관념을 일으키는 장면, 방화·살인·강간 등 범죄의 동기를 제공하는 장면 등이다(山田和夫, 1997). 〈표1〉은 영화검열 및 규제에 대한 현황을 나타낸 것이다.

 

                        〈표1〉 영화검열 및 규제현황

구     분

    영화규제 및 대처방안

            특         징

메이지(1912년)

환등·활동사진필름심사규정

황실터부, 미풍양속위반규제

메이지(1917년)

필름검열기준

국체 및 군주터부, 미풍양속위반, 각종범죄

다이쇼(1920)

문부성추천영화제

영화의 국민영화화 및 국책영화지원

쇼와(1933년)

국책영화수립에 관한 건의안

이와세(岩漱亮)의원이 중의원에 상정

쇼와(1934년)

영화통제위원회

야마모토 타쓰오(山本達男)내무대신 회장됨

쇼와(1935년)

대일본영화협회

1935년 1월 관민합동의 재단법인

쇼와(1939년)

영화법

포괄적 영화검열, 전쟁성과 국체강조

쇼와(1940년)

7·7금령

제작과 상영에 대한 통제

쇼와(1942년)

영화상영의 2계통(紅白)상영제

영화제작은 쇼치쿠, 도호, 다이에이, 배급은 영화배급사로 통합

쇼와(1944년)

결전비상조치요강

국민의 사치생활통제, 영화관 폐쇄

쇼와(1944년)

흥행쇄신실시요령

전쟁에 따른 국민질서, 일본정신문화고양

 

  1920년대에 들어서 영화검열을 적극적으로 하게된 동기는 1921년에 일어난 고베(神戶)의 미쓰비시(三菱)·가와사키(川崎) 양조선소의 노동쟁의였다. 이것은 일본최초 노동운동기록의 대상이 되었다. 노동운동을 진압하기 위해서 경찰대는 칼로 진압하고 군대도 동원하였다. 특히 쇼와기에 들어가기 전야인 1925년 7월 내무성 경호국은 지금까지 부현 별로 해오던 영화검열을 일괄적으로 관리하는 결정을 내렸다. 내무성은 "활동사진이 점차 발달하고 민중오락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한편 교육, 종교, 산업, 위생, 정치 등의 각종선전도구로 사용되어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따라서 영화발달을 저해하는 일없이 유해영화를 검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검열을 중앙에서 일괄적으로 하는 이유"라고 하였다. 이처럼 활동사진이 대

 

중에게 깊이 파고 들어가 있어 사상적 지배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국가가 직접 영화를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1917년 활동사진검열규칙은 황실터부를 제일목적으로 하였다. 더욱이 일본황실뿐 아니라 외국의 황실에 대해서 같은 규정에 의해서 엄격하게 적용하였다. 이렇게 해서 영국영화《ヘンリ8世の私生活》,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자살을 그린 프랑스영화 《うたかたの戀》등이 상영금지되었다. 또한 일본천황과 관련된 영화가 처음으로 검열에 걸렸다. 즉 1925년 기누가사 데이노스케(衣笠貞之助)감독의 《日輸》영화사건이다2). 그리고 1928년 11월 교토에서 쇼와천황의 즉위식전에 대한 촬영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도쿄일일신문, 도쿄아사히신문, 전일본영화업조합, 미 폭스뉴스 등은 '어대례첩사단활동사진부'(御大 諜寫團活動寫眞部)를 조직하여, 촬영필름은 《揮く昭和聖代御大禮の聖儀》라는 제목으로 제작하여 공개했다. 내무성 보호국은 그것을 검열방침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찍은 사진중에 조악한 것으로 판단되어 검열에 걸린 것이 55건이었다. 대례관계 필름에 대한 검열기준과 방침이 이후 천황을 촬영한 뉴스, 기록영화를 검열하는 기준이 되었다. 따라서 일본영화는 국가, 천황, 시대 등을 정면에서 거부하기 보다는 협조하는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발전하였던 것이다3).

  토키영화시대로 전환된 시기에 일본은 침략전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이런 정치적 변화는 영화통제정책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예를 들면, 『활동사진필름검열연보』(1931년 6월, 이하 연보라함)에 의하면, "검열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1929년은 기억할만한 해이다. 종래 비교적 온건무난했던 필름내용이 급변하여 사회사조에 영향을 주는 내용에 사회주의적 색채를 가진 것이 나타났고, 성적 흥분을 자극하는 노골적이며 도발적인 장면을 찍은 것도 있고, 남녀간의 연애를 골자로 하는 영화가 유행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사회주의적 사회관을 가진 필름 중에는 도쿠카와 시대뿐 아니라 현사회제도를 비판하는 것이 있고, 사회주의적 사회건설을 풍자하는 선전물도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1932년 『연보』는 시대가 변한 것을 보여준다. 즉 풍속상 장애가 되는 영화가 공안상 장애가 되는 영화보다 많아졌다. 이것은 경향영화와 사회주의를 강조하는 영화에 대한 검열과 탄압이 강화되어 소위 이데올로기 영화가 자취를 감췄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일본영화의 경향은 이데올로기영화와 에로틱영화를 우려하는 가운데, 1931년 만주사변, 1932년 상해사변, 1933년 국제

 

연맹탈퇴 등 국가적 대사건이 일어나 전국에서 국가비상시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시대적 국가비상사태는 영화계에도 영향을 줘 군사영화, 비상시 국민의 각오를 고양시키는 애국영화 등의 제작을 촉진시켰고 그런 영화에 관객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천황제정부의 침략전쟁, 군국주의 고양, 사상탄압 등을 추진한 결과였다(山田和夫,1997; 古川隆久, 2003).

  1933년 8월에는 이와세(岩漱亮)의원이 중의원에서 「국책영화수립에 관한 건의안」을 제출해 가결되어 영화에 대한 통제도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이어서 1934년 4월 야마모토 타쓰오(山本達男)내무대신을 회장으로 하는 '영화통제위원회'가 발족하여, 외국영화의 수입제한, 우수영화제작장려, 교화영화강제상영, 영화검열행정으로 영화산업의 지도통제 및 보호장려 등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1935년 1월에는 관민합동의 재단법인 '대일본영화협회'가 탄생하여 영화통제의 촉진과 업계의 수용태세를 정비하였다. 이 협회는 기관을 내무성 경보국내에 두고 문예춘추사를 통해서 기관지 『일본영화』를 발행하였으며, 1939년 10월 영화법시행을 위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1930년대 중반 일본영화는 본격적으로 암흑시대에 들어갔다. 특히 1939년 「영화법」제정으로 철저한 영화통제가 이루어 졌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1939년 2월 20일 영화를 사랑한 프로레탈리아 작가 고바야시(小林多喜二)가 거리에서 체포되어 치쿠지경찰서에서 사살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일본영화사상 최초의 전투적인 영화운동체인 프로키노가 정부의 명령으로 해체되었다.

  1939년 4월 1일 공포되고 10월 1일부터 시행된 「영화법」은 일본의 문화입법으로 영화산업을 국가통제하에 두려는 의도가 있는 악법이다. 영화법안은 1939년 3월 9일 중의원에서 심의가 시작되었고, 영화법은 영화법시행령과 영화법시행규칙으로 구성되었다4). 영화인 가운데 이와사키 아키라(岩崎昶)와 같이 그것에 항의하여 투옥된 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기득권의 보호, 신흥경쟁자의 배제 등을 목적으로 찬성했다. 좌익이었던 기무라(木村莊十二)까지도 저질영화를 선별하는 제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따라서 영화는 완전히 국가관리하에 들어갔다. 이어서 1940년 내무성과 문부성의 담당관은 6월부터 영화검열의 강화를 검토하기 시작했고, 7월 7일 「7·7금령」을 실시하여 제작과 상영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검열의 구체적 내용은, 각본의 사전검열을 강화하고 필요한 경우 반복적으로 개정을 명하며, 건전한 국민오락영화로 적극성이 있는 테마를 요구하며, 희극배우와 만재(漫才)의 출연은 현재 제한

 

하고 있지 않지만 문제가 있으면 제한할 것 등을 규정하였다. 또한 소시민영화, 개인의 행복만을 그리는 것, 부호의 생활을 그리는 것, 여성의 끽연, 카페에서 음주장면, 외국에 물든 언어, 경박한 동작 등을 일체 금하였다. 내무성의 와다나베(渡 捨男)는 「7·7금령」의 의도를 단순한 오락 즉 보고 웃고 즐기는 오락을 장시간 보고 있는 것은 사치이기 때문에 허용할 수 없는 일이며, 업자가 반성하지 않으면 영화폐쇄도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런 것은 전시체제하에서 오락도 국가적 유용성이 없으면 존속불가능하며,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현실에서 일본국민에게 동아시아 지도자로서 자각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국민인 관객이나 제작자에게 영화를 통한 의식개혁을 요구하였다5).

  1941년 연합군측이 ABCD포위망으로 일본에 경제제재를 가하자, 지금까지 미국으로부터 수입해온 이스토만 필름이 부족하였다. 신흥세력이었던 도호는 항공촬영을 하는 등 기술적으로 발전하여 군부의 기록영화 요청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고, 전쟁중에 전쟁영화를 빈번하게 제작하는 한편 시장을 개척하여 성장하였다. 그 결과 1942년 신흥키네마 책사인 나가다(永田雅一)는 기업합병을 통해 대영(大日本映畵)을 설립하여 닛카쓰는 흡수되었다. 이런 가운데 영화인은 군속으로 남방점령지의 선전영화제작에 파견되기도 하고, 만주영화에 합류했다6). 1942년에는 영화상영에 대한 2계통(紅白)상영제가 실시되어 영화계는 대폭적으로 개편되었다. 영화제작은 쇼치쿠, 도호, 다이에이 등이 담당하고, 배급은 1942년 2월 설립된 사단법인 영화배급사로 통합하였다. 그리고 당시 전국 2,000여개 상영관 가운데 반수가 홍백2계통으로 재편성되었다. 또한 1942년 내무성은 각도도부현 경찰부장에게 통첩을 내려 국민영화보급회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문부성은 영화를 과외학습의 과제로 지정한 것을 계기로 단체관람을 쉽게 하기 위해 보급회를 만들었다. 최초의 보급회는 도쿄에 설치되어 시내 국민학교 4학년이상이 관람하도록 하였다. 1943년말 35도도부현에 보급회가 설치되어 6개 작품이 지정되어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1943년 8월 국민사기앙양과 생산력 증진을 위해 광산, 농어촌 등에 이동상영을 추진하기 위해 일본이동영사연맹이 설치되어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 후 도도부현의 지부에 해당되는 지방영사연맹이 설치되었지만 각지부의 회장도 각도도부현의 지사나 내정부장, 또는 경찰부장이 담당하였다. 그리고 1943년 제2차영화잡지통합이 이루어지고 1944년 1월부터 영화업계

 

용 『일본영화』, 평론가용 『영화평론』, 일반용 『신영화』 등 3잡지로 통합되었다. 정부는 전세가 악화되는 가운데 국민생활을 통제하기 위해서 영화통제도 강화하였다. 1944년 2월 25일 「결전비상조치요강」에서 고급향락을 정지시키고, 영화관을 포함한 대도시 번화가의 대규모극장을 1년간 폐쇄하였고, 도쿄의 일본극장은 폐쇄되어 풍선폭탄의 제조공장으로 전용되었다. 1944년 3월 내무성은 「흥행쇄신실시요령」을 통해서  문화영화의 강제상영을 철폐하였지만, 일본정신문화를 고양하는 것, 간소강경하고 명랑활달한 것, 전쟁수행을 위해 국민생활의 새로운 질서건설을 촉진시키는 것, 전쟁하에서 국민생활에 유리하게 하는 것이나 불건전한 것 제외 등의 조치를 내렸다.  

  이런 가운데 태평양전쟁의 동결로 영화관도 1주일간 휴업에 들어갔다. 재개 후에는 영화공사가 배외적인 작품과 전투장면을 포함한 작품, 문화영화나 뉴스영화 등의 상영을 금지하였다. 1945년 9월 18일 내무성과 정보국의 영화규제를 폐지하고, 9월 23일 점령군 총사령부 민간정보교육국은 영화계의 수뇌를 초청하여 최고사령관 명으로 영화계의 민주화를 지시하였다. 그 내용은 군국주의배제, 자유주의 장려, 일본이 장래 세계평화의 위협이 되지 않는 상황을 만드는 것 등 3대점령방침에 기여하는 영화제작을 장려하고 봉건적 내용을 담은 시대극의 제작을 사실상 금지하였다. 이렇게 해서 전전에는 전통적 내용을 담은 민족영화와 국책영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영화의 자유제작과 상영을 금지하였지만, 전후에는 반대로 영화정책이 전환되어 새로운 패러다임의 영화개척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그 동안 잠재되어 있던 영화제작이 폭발하여 영화붐을 조성하게 되었다.  

 

Ⅲ. 영화에서 나타난 시대성의 특징

 

1. 메이지부터 만주사변전까지의 영화  

  일본영화는 방화(邦畵)라고 하며 역사는 매우 길다. 1896년 에디슨이 만든 키네토스코프가 수입되어 일본영화의 서막이 열렸다. 초기영화가 본격적으로 근대주의와 연결된 시기는 1900년대이다. 당시 일본은 부국강병정책을 통한 근대화를 촉진시키는 한편, 서구열강과 대립하는 가운데 급속한 근대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근대적 성격을 가진 영화를 노골적으로 이용하였다. 따라서 일본인은 이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문화를 통해서 식민지주의와 민족주의를 무의식으로 배우게 되었다7). 당시 영화로는 전쟁현장을 촬영한 것으로 1900년 개봉된 요시사와(吉澤商店)의 《북청사변활동사진》과 1904-5년 《일러전쟁활동사진》, 군동원을 하여 감상하게 한 요코다(橫田永之助)의 《전시활동사진회》 등이 있다(山田和夫, 1997).

  1903년 요시사와상점은 아사쿠사(淺草)에 최초의 상설영화전문관인 아사쿠사 덴기칸(電氣館)을 설치했다. 전문영화관은 전쟁영화의 붐으로 급속하게 발전하였고 1905년에는 영화관객이 증가하여 증측하였다. 이것은 아사쿠사가 일본의 대중적인 근대 문화의 중심지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04년 일러전쟁이 발발하자, 요시사와상점은 중국대륙의 전장을 돌아다니면서 전쟁의 모습을 촬영한 전쟁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상영하여 대인기를 얻었다. 이것을 계기로 영화는 신기한 것을 보이는 것이나 오락으로부터 탈피하고, 전의향상이나 군국주의를 선전하는 매체로 인식되는 한편 근대주의를 전파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오카쿠라(岡倉天心)는 『日本の覺醒』을 발표하여 일본을 문명론의 대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영화는 국민국가에 봉사하는 문화장치로서 그 정체성과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일본은 영화를 통해서 일본의 각성을 촉진시켰을 뿐아니라 식민지와 지배지역에 대한 근대화의 선전매체로 이용하였다8).

  그리고 다이쇼기에 들어서는 시대극과 더불어 근대화 서구사회에서 벌어지는 내용의 사회극 또는 현대극이 유행하여 정신적·물질적·제도적 근대화를 강조하였다. 그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표2〉 근대성을 강조한 현대극영화의 현황

영화사

감독

작품명

영화사

감독

작품명

천연사

歸山敎山

生の輝き(1918)

大正活映

栗原喜三郞

アマチュア俱樂部(1920년)

닛카쓰

田中榮三

京屋襟店(1921년)

닛카쓰

田中榮三

紙人形春の き(1926년)

쇼치쿠

野村芳亭

カラボタン(1926)

닛카쓰

阿部豊

陸の人魚(1926년)

닛카쓰

阿部ジャック

足にさわった女(1926)

쇼치쿠

牛原虛彦

受難華(1926년)

쇼치쿠

五所平之助

からくり娘

쇼치쿠

島津保次郞

海の勇者(1927년)

쇼치쿠

五所平之助

村の花嫁(1928년)

쇼치쿠

牛原虛彦

彼と東京(1928년)

닛카쓰

溝口健二

日本橋(1929년)

닛카쓰

內田吐夢

生ける人形(1929년)

마키노

瀧龍英輔

パイプの三吉(1929년)

닛카쓰

村田實

摩天樓(1929년)

제국

志波西果

旋風時代(1930년)

쇼치쿠

小津安二郞

お孃さん(1930년)

쇼치쿠

淸水宏

人生の風車(1931년)

닛카쓰

田坂具隆

心の日月(1931년)

자료: 日本無聲映畵篇, 2003,  * 천연사: 천역색활동주식회사

   

  또한 천황주의와 군국주의를 반대하는 이념으로 등장한 것이 사회주의였다. 특히 좌익사상가들은 영화를 사회주의를 전파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그것은 프로레탈리아영화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기초한 경향영화 또는 이념영화라고 할 수 있다9). 1920년대 후

 

반 일본지식층은 공산주의의 붐에 휩싸였다. 소련이나 독일보다도 먼저 마르크스-엥겔스 전집이 간행되었고, 도쿄의 번화가 카페에는 좌익의 물결이 흐르고 있었다. 1928년 전일본무산자예술연맹(NAPF)이 결성되었고, 변화에 힘입어 일본프로레탈리아영화(NCPF)가 조직되었다. 사사키 겐주(佐佐元十)와 이와사키 아키라(岩崎昶)가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근로자 날의 행진과 노동쟁의의 장면을 촬영하였고, 완성된 필름을 갖고 전국을 순회하였다. 1932년에는 국가의 탄압으로 비공개된 후에도 지하에서 상영을 계속하였다. 이것은 프로키노(일본프로레탈리아영화)라고 하며 일본에서 인디즈의 초기현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무라다(村田實)는 고이시(小石川)박물관 인쇄소 노동자들에게 극연구를 지도했다. 회원중의 한사람인 도쿠나가(德永直)는 프로레탈리아 문학자가 되어 동인쇄소의 노동쟁의를 묘사한 『太陽のない街』를 썼다. 이런 노동쟁의에 대한 지원으로 일본에서 처음으로 프로레탈리아 연극 《トランク劇場》이 나왔고, 그것의 영화판이 프로키노 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프로키노영화는 시대극으로 이토(伊藤大輔)의 《斬人斬馬劍》(1929), 고이시(小石榮)의 《挑戰》(1930), 후루가이(古海卓二)의 《日光の円藏》, 쓰지( 吉朗)의 《率張劍法》과 《維新暗流史第一彈》 등이다. 백성의 반란을 취급한 《挑戰》은 노동쟁의나 스크라이크가 활발해지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현대극으로는 우치타(內田吐夢)의 《生ける人形》(1929), 미조구치(溝口健二)의 《東京行進曲》(1929)등이 있다. 그리고 기무라(木村莊十二)의 《河向の靑春》을 끝으로 경향영화는 사라졌다. 미조구치는 상층민과 하층민을 대조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특히 더욱 성공한 이념영화는 스즈키 시게요시(鈴木重吉)의 《何が彼女をそうさせたか》(1930)이다. 즉 고아원의 소녀가 서커스단에 팔려 그곳에서 경험한 남자의 색정, 부르주아의 위선, 프로레탈리아의 참상을 구체적으로 폭로하고 여자감호원에 수용된다. 그녀는 여자감호원에서도 위선을 있다는 것을 느끼자 방화를 하여 연행된다. 이것은 전통적인 시대질서를 전복하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적 근대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다.  

 

2. 만주사변부터 중일전쟁까지의 영화

  토키영화가 등장한 시기는 일본이 전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토키영화가 발전한 1930년대 일본은 국책영화, 반전영화, 비전쟁영화 등이 형성되어 발전한 시기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국가 의도에 부응하는 국책영화가 영화계의 주류가 되었다는 점이다. 문화적 근대주의는 1931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는 만주사변을 일으킨 가운데 국민에게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영화가 등장하여 문화적 민족주의로 승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등은 일본영화가 특별한 성격 즉 영화에 있어서 민족주의를 촉진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만주사변전후영화는 전쟁현장을 기록한 뉴스영화와 독일 및 일본의 합작영화로 나타났다. 일본에서는 1930년 만주사변에 관한 뉴스영화가 제작되었다. 사변뉴스영화는 1930년 7월 14일부터 상영되기 시작해서 비상시국에 대한 일반국민의 관심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북지나 사변을 소재로 한 극영화로 최초로 개봉된 닛카쓰 제작의 《國境の風雲》(1930년 )은 예상외로 좋은 평판을 얻어 북지나사변에 대한 현장뉴스가 계속해서 상영되었다. 이후

 

연말까지 사변에 관한 영화가 15편이나 개봉되었다. 뉴스영화봄으로 극영화관이 뉴스영화관으로 전환되었고 지방에서도 뉴스영화관이 생겼다. 그러나 1930년 12월 13일 남경(南京)몰락이후 국민의 전황에 대한 관심은 일단락되었다. 이후 태평양전쟁개시까지는 1938년 10월 일시적으로 인기가 있던 것을 제외하고 극영화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특히 1930년대 민족주의를 강조한 영화는 미조구치(溝口健二)의 《滿蒙建國の黎明》(1932), 스즈키(鈴木重吉)의 《東洋平和の道》(1938년) 등이 있다.

  그리고 합작영화를 제작한 감독은 독일의 아놀드 팡쿠와 일본의 이다미 만사쿠(伊丹万作)이다. 1930년대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이 각자의 전쟁을 하고 있는 시기였다. 독일의 산악영화감독 팡쿠는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의 산악풍경을 중심으로 촬영했다. 이때 공동감독으로 선택된 감독이 이다미 감독이었다. 그들은 1937년 같은 이야기를 두 개의 입장에서 영화화하였다. 팡쿠는 《サムライ娘》, 이다미는 《新しき土》등을 만들었다. 팡쿠는 대성공하였지만 이다미는 실패하였다. 팡쿠가 히로인으로 선택한 배우는 하라 세쓰코(原節子)였다. 그녀는 오리엔탈리스트로서 전형적인 일본여성으로 출현하였다. 한편 이다미의 《新しき土》는 문화적 민족주의의 성격이 강한 영화였다. 일본의 한 청년이 독일유학을 끝내고 독일여성 약혼자를 데리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학이전 사교를 해왔던 일본여성의 아름다움과 총명함에 끌려 독일여성을 버린다. 일본인 커플은 결혼을 하고 만주국으로 향하고 일본병사의 보호를 받으며 '새 토지'를 개척하는데 정열을 쏟는다는 이야기이다.

  1937년 중일전쟁기에 활약한 감독이 구마가이 히사도라(熊谷久虎)이다. 그는 《蒼氓》(1937년)에서 브라질 도항직전의 일본인 이민수용소 실태를 묘사하고 국가를 버리는 이야기를 주제로 하였다. 1938년 일본영화는 기록영화가 활개를 치고 있었고, 문부성이 추천하는 국책영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시대극을 중심으로 한 영화가 제작되어 전통성과 정체성을 부추기는 역할을 하였다. 다사카 토모타카(田坂具隆)는 《五人の斥候兵》(1938년)에서 전장을 배경으로 날카로운 인간관찰을 표현하였다. 즉 중국전선에서 부하에게 존경을 받는 일본군의 대장이 있었다. 척후병들은 적장시찰을 하기 위해 출발했지만, 그 가운데 한 사람이 귀환하지 않았다. 걱정이 된 부대는 전원이 밤새 기다려 최후에 그가 돌아오자 새로운 전장으로 이동해 간다는 이야기다. 또한 그는 《土と兵隊》에서 연일 행군하는 가운데 낙오자가 속출하고 죽어가면서도 전진하는 일본병을 묘사했다. 그는 고통을 감내하고 자기를 희생하는 무명의 일본인 초상을 그렸다. 이런 도덕주의는 일본의 파시즘이 함의하고 있는 특유한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도호의 국책영화 만들기가 시작되었다. 도호는 《世紀の合唱》(1938년), 《牧場物語》(1938년) 등 국책영화를 작하였다. 《世紀の合唱》은 전년도 내각정보부가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선전을 위해 가사와 곡을 공모한 관제 대중용의 국책음악의 하나이다. 그것은 「軍艦行進曲」을 작곡한 전 해군군악대장 세도쿠치 도키치(漱戶口藤吉)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세도구치가 「愛國行進曲」 작곡에 공모한 동기는 전시하의 일본에 히틀러 정권하의 독일이나 뭇솔리니 정권하의 이탈리아에서 처럼 국민을 자극하는 음악이 필요하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극중의 「軍艦行進曲」에서 나치즈당이나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의 당가를 내보내는 등 극중음악의 일부를 해군군악대가 연주하게 하여 국민교화, 전의함양 등을

 

촉진시켰다. 그리고 《牧場物語》는 전장에서 귀환한 부상병이 악인에게 빼앗길 뻔한 전우의 목장을 지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일본문화중앙연맹이 신일본주의를 선전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1939년 일본영화는 중일전쟁이 한창 진행되는 가운데 문부성 추천작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이시기의 영화감독은 대부분의 국가나 전쟁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하고 국책에 조응하는 민족주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이 점에서 국책영화를 만든 감독은 민족주의자로 분류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자인 이마이 타다시(今井正)는 《われらの敎官》(1939년)에서 중일전쟁 초기에 용맹을 떨쳤던 육군장교의 인간미를 그렸다. 특히 《路傍の石》는 상경후 고이치(吾一) 소년의 생활과 성장과정, 자아확립을 다룬 것으로 원작의 후반부분이 없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자기의 다리로 걸어봐"라는 구마모토방언으로 말하고 거리로 달려나가는 모습으로 끝난다. 당시 오사카 아사히신문에 "고이치씨처럼 강하고 현명하게"라는 표제어가 나올 정도였다. 또한 "일본의 아버지는, 어머니는, 자식은 한사람도 남김없이 이 영화를 보고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는 강한 의지를 갖길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 시기의 영화는 문화적 민족주의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3. 중일전쟁후부터 태평양전쟁종결까지의 영화

   중일전쟁후 1940년대에는 민족주의를 초월해서 제국주의를 강조하는 국책영화가 지배하던 시기로 특히 일본국내뿐 아니라 만주등과 같은 식민지에서도 영화가 제작된 특징이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시기의 영화는 문화제국주의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1940년대에 들어서 구마가이는 국책영화를 본격적으로 만들어 초국가주의의 신비사상단체의 두목으로 일본에서도 희귀한 반유대주의를 주창했다. 그는 《上海陸戰隊》(1939년), 《指導物語》(1941년) 등에서 군국주의를 예찬하였다. 국책영화에 참가한 감독중에는 1930년대 초기 좌익운동에 참가하거나 경향영화에 참가한 인물이 적지 않았다. 다사카(田坂具隆), 이마이(今井正), 야마모토(山本薩夫) 등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전후에 돌변하여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좌익진영에서 활약하였다.

  도쿄발성(東京發聲)에서 도요타 시로(豊田四郞)가 제작하고 도호가 배급한 극영화 《大日向村》(1940년)가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1937년부터 1939년에 걸처 분촌이민(마을의 일부를 만주에 이주하는 형태의 이민)을 실시한 나가노현(長野縣) 오히나니무라(大日向村)의 실화에 기초해서 화다 쓰도우(和田 ) 집필한 소설을 극화한 것이다. 내용은 이민희망자의 연인으로 병 때문에 마을을 떠날 수 없는 여인이 애인이 가볍게 이민을 떠날 수 있도록 자살하는 충격적인 영화이다. 이 영화는 오히나니무라영화화 위원회가 결성되어 만들어졌는데 그 위원회는 만주이민협회, 농림성경제갱생부, 척무성, 육군성, 문부성, 만주국, 남만주철도 도쿄지점, 만주척식공사, 도쿄발성, 도호, 전진좌(前進座) 등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일본정부는 1939년 12월 23일 「만주개척정책기본요강」을 결정하고 만주국의 식민지화를 진척시키는 계획하에 종래 불량한 일본인을 만주로 이민시키려는 정책을 강조한 영화였다. 이 영화 제작은 국가의 이민정책과 관련되어 제작된 것으로, 농업정책이 척식정책상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졌다는 이유로 문부성 추천을 받았고 이후 이민정책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일본문화중앙연맹이 주최하는 영화대회가 열렸다. 일본문화중앙연맹은 우수한 예술작품을 창출하고, 국내뿐 아니라 민족과 국경을 넘어 현대일본예술을 세계에 선양하고 민족봉축의 진의를 알리기 위해 기원 2600년봉축기념예능제를 1940년에 연다는 것을 발표하였다. 참가한 영화사는 5개영화사와 도호산하의 제작 전문회사 도쿄발성(東京發聲)이 참가의향을 밝혔지만, 쇼치쿠와 도쿄발성는 중도에 사퇴하고, 닛카쓰, 도호, 신코(新興), 다이도(大都) 등이 참가작품을 제작하였다. 닛카쓰는 시대극 《歷史》, 신코는 현대극《太平洋行進曲》, 해군성군사보급부의 후원을 받은 도호는 현대극 《海軍爆擊隊》, 다이도는 현대극 《祖國》등 4편이었다. 이중에서 《太平洋行進曲》을 제외하고 모두 검열수수료 면제를 받아 국책영화가 되었다. 또한 이들 3편은 예술성을 높이 평가받아 문부성추천영화가 되었다.

  이 가운데 《歷史》는 3부작으로 4시간을 넘는 대작이었다. 원작은 제3회 신조문학상을 받은 사카키  야마준( 山潤)의 소설로, 보신전쟁(戊辰戰爭;1867-69)부터 서남전쟁(1877)까지의 메이지유신기에 동북지방의 소번의 번사와 가족이 역사의 흐름속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다. 감독은 《土》를 제작한 우치다 토무(內田吐夢), 주연은 고스기 이사무(小衫勇)이다. 제작기간은 6개월, 비용은 총 50만엔 정도 들였다. 문부성 추천작품으로 된 이유는 특히 기백이 있는 기획과 진솔한 제작태도가 시대극영화로서 일신하는 면이 있다는 평가때문이었다.  《歷史》는 우수작 영화부분에서 1위가 되어 상금 1만엔을 획득하였지만 심사위원 36명중 12명이 기권하였다. 이 영화는 흥행에서 대실패하였다.

  그리고 1941년 육군의 후원으로 제작된 《馬》는 동북지방의 농촌을 무대로 한 대작으로 예술적 가치와 군마(軍馬)육성의 노고를 그린 애국사상의 보급에 의의를 가진 것으로 문부성추천을 받은 영화였다. 이것도 역시 흥행이 부진하였다. 정부는 질 높은 국책영화를 제작하고 활성화하기 위해서 각본 모집과 제작회사의 제작위촉과 같은 방법을 동원하였다. 이 결과 약 100편의 각본이 공모하여 최우수상인 정보국총재상은 없었고, 우수상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靜かなり』등 3편이었다. 당시 구로사와는 도호의 조감독으로 야마모토 기지로(山本喜次郞) 하에서 《馬》등의 제작에 관여했다. 위촉영화는 도호제작의 《川中島合戰》과 흥아제작의 《元綠忠臣藏》등이 있었다. 그 이외에도 국책영화로서 쇼치쿠의 《父ありき》(42년 4월 1일), 닛카쓰의 《將軍と參謀と兵》, 신코(新興)의《大村益次郞》 등이 있었다. 또한 도호제작의 《八十八年目の太陽》은 군함건조를 소재로 해서 시국의 중대성과 그것에 대응하는 종업원의 마음을 가르치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 문부성 추천작품이 되었지만 역시 흥행에서는 참패하였다.

  특히 문화적 제국주의는 진주만공격기를 기점으로 확대되었다. 미국영화의 수입이 중단되자 일본영화는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근대주의시각을 버리고 전통적인 가치관에 귀착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금욕적인 예도(藝道)수업이나 무사도의 세계관을 긍정하는 영화가 등장하였다. 이 시기야말로 일본영화가 헐리우드의 양식으로부터 해방된 절정기였다. 많은 감독들은 전쟁에 협력했고, 전쟁을 주제로 한 영화를 만들어 일본병사나 전시하의 서민의 전의를 고양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대부분 일본인에게 전쟁은 위협적인 타자와의 대결이 아니라 고행을 매체로 공동체에 귀속의식을 확인하기 위한 행위로 무의식적으로 주입되었다. 당시 영화인들은 전쟁을 비창미(悲愴美)로 강조하여 병사들에 대한 감사와 공감대를 형성하도록

 

하며 국책에 협력하도록 유도하였다.

  1942년 정월 태평양전쟁개전으로 인기가 있는 영화는 뉴스영화였다. 정월개봉된 《日本ニュ-ス》제82호는 진주만공격을 찍은 필름을 처음 공개한 것으로 도쿄, 오사카 등의 영화관에서 인기를 누렸고, 여성과 어린이관객도 많았다. 특히 적을 경계하는 선전영화인 요시무라(吉田公三郞)의 《間諜未だ死せず》(1942년)는 적을 악당으로 묘사하였다. 또한 황군의 영상을 통해서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는 도덕적인 메시지를 중시하였다. 그리고 2계통상영제하에서 대히트를 한 것이 극영화가 아니라 일본영화사 제작의 장편기록영화 《マレ戰記》(1942년)이다. 이 영화는 태평양전쟁의 서전인 싱가포르몰락까지의 마레반도에서 일본육군부대의 행동을 추적한 것으로 육군성이 후원하고 국민의 사기를 앙양할 수 있다는 이유로 문부성이 추천한 전형적인 국책영화이다. 이것은 통상의 극장공개영화와 비교해보면, 이례적으로 대규모선전을 정부가 하였다. 히트를 친 것은 정부의 조직적인 동원과 홍보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의 속편격인 《ビルマ戰記》가 만들어졌다. 이어서 1942년 해군은 전쟁의 승리를 국민에게 알려 전의를 공양시키기 위해서 해군항공대의 진주만공격과 마레 해전에서 영국함대에 대한 공격을 극영화하기 위해서 도호에 제작의뢰하였다. 그 결과 1942년 12월 3일 개봉하고 해군성후원, 문부성추천, 정보국선정국민필견영회로 지정된 것이 《ハワイ·マレ沖海戰》이다. 야마모토(山本嘉次郞)는 이 영화에서 소년병의 훈련을 현실적으로 묘사했다. 특수촬영감독은 쓰부라야(円谷英二)로 여기에서는 일본군의 진주만공격으로 전멸하는 미국태평양함대를 재현하여 보여주었다. 특히 이 영화가 계기가 되어 해군항공병에 지원한 청년들도 생겼다.

  1943년 미군의 대공격으로 일본군은 남태평양 가달카날섬에서 철수하여 전세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이 시기에 특기할 만한 작품은 이나가키(稻垣浩)감독의 《日本ニュス》제177호였다. 그것은 「결전」과 「학도진출」을 강조하였다. 결전은 미군촬영의 남태평양해전(1942년)의 기록필름이다. 이것은 일본이 검열로 제한한 현대전의 가혹한 실상을 기록한 것이다. 학도진출은 비오는 신궁경기장에서 학도의 출진장행회(出陣壯行會)에서 보듯이 전장에서 벌어지는 청춘의 장송곡과 같은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결전」은 자기 선배들이 펜을 버리고 전장에 들어가는 것을 보여주어 소년들을 전쟁에 동원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어 소년항공병지원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마이 타다시는 1943년 일본의 무장경관대와 한국의 항일독립군의 전투를 그린 《望樓の決死隊》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항일독립군의 습격 신을 미국 서부극을 그대로 흉내내었다. 그러나 식민지지배를 정당화한 군국주의 영화라로서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사회파인 이마이로서는 결코 유쾌한 작품은 아니었다. 그는 군국주의 마지막 작품으로 《憤怒の海》를 만들었고 여기에서 해군의 조선소 함대 건조 장교를 주인공으로 하는 선전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에서는 일반인에게 군사비밀이었던 전함 야마토모습을 라스트 신에서 공개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진주만공격 2주년 기념으로 쇼치쿠의 작품 《海軍》도 진주만공격때 해군특수잠항정의 승무원들을 그려 전의를 부추긴 국책영화였다. 이처럼 중일전쟁부터 1945년까지 전시기의 일본영화는 인종차별, 전쟁고양, 애국주의, 식민지통합 등을 강조하는 문화적 제국주의의 성격이 강한 특징이 있다.

 

 

Ⅳ. 맺는 글

  메이지부터 태평양전쟁까지의 일본영화는 문화적 근대주의, 문화적 민족주의, 문화적 제국주의 등의 시대성을 갖고 전개되었다. 이런 국가지향적인 영화에 대해 정면으로 부정하고 비판하는 영화가 등장하였다. 이 영화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기초한 반민족주의적 성격을 띤 영화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국가지향적 성향과 반국가지향적 성향이라는 경계를 동시에 밝으며 살아가는 영화감독과 영화들이 나타났다. 이런 제3시점은 시대성에 살면서도 모순 속에서 연명하는 특징이 있지만, 동시에 시대성을 둘러싼 지식인의 갈등과 모순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대표적인 영화감독이 가메이(龜井文夫, 1908-87)이다. 그는 레닌그라드 영화학교에서 공부하고 문부성이 기획한 1937년 《支那事變》에서 전쟁에 협력하는 자세를 보였다. 이것은 일본이 왜 중국을 공격해야만 했는가를 군국주의 일본의 입장에서 해설하는 선동영화였다. 그러나 그 다음 그는 《上海》(1938년)에서 국가주의 앙양 대신에 반전적 함의를 풍부하게 표현하였다. 그는 일본군의 행진을 보고 있는 민중을 촬영했고, 민주의 긴장한 눈을 통해서 군사침략뿐 아니라 촬영자체가 갖는 정치성, 폭력성 등을 제시하였다. 이 영화에 대해 군부는 전의고양을 해야 할 때 이런 영화를 만들어 크게 분노하였다. 또한 《戰ふ兵隊》(1938년)에서 전선 병사의 피폐해진 표정을 포착하는 한편 전쟁의 무모함을 그렸다. 이 영화는 상영중지가 되었고 그는 감독자격을 박탈당했고 치안유지법용의자로 체포되어 일년간형무소에서 살았다.  

  또한 이시모토(石本總吉)감독의 《雪國》(1939년), 미즈키(水木莊也)감독의 《ある保姆の記錄》(1941년), 이연과학영화작품으로 시타무라(下村兼史)감독의 《或日の干潟》(1940년)등은 가메이 감독과 함께 전시하에 양심과 재능을 발휘한 기록영화이며 동시에 과학영화의 수작들이다. 《雪國》은 북극의 대설지역에서 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어느 영화가는 두터운 설국에 사는 것이 일본파시즘의 두께를 말해주는 것은 아닌가 하고 평가하였다. 《ある保姆の記錄》은 일하는 부모의 아이를 통해서 전시하의 생활을 고찰하였고, 과학영화인 《或日の干潟》는 패색이 짙으면서도 전쟁을 지속하는 지배층에 저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위에서 제시한 가메이, 이시모토, 미즈키, 시타무라 등 영화지식인들은 근대주의와 사회주의, 민족주의와 반민족주의, 전쟁주의와 반전쟁주의, 세계평화주의와 제국주의 등과 같은 시대성의 경계에 서서 활약한 애국자인 동시에 매국노, 패배자인 동시에 승리자 라는 경계인으로 살아온 특징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메이지부터 태평양전쟁까지의 일본영화에 나타난 시대성은 제1시점으로 근대주의, 일본민족주의, 제국주의 등이 한편에서 주도하는 가운데 정면에서 그것을 거부하는 제2시점인 사회주의, 반민족주의, 반제국주의 등이 존재하였고, 특히 서로 상반된 시대성에 살면서 타협과 절충, 동조와 거부, 체념과 신념 등으로 생겨난 제3시점인 경계주의가 존재하였다. 이 시기의 시대성은 모순을 내포하면서 공존하는 특이한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모순적 시대성에 대한 반성은 전후 일본영화의 자유성과 창조성을 촉발시키는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川本三郞, 1999, 『映畵の昭和雜貨店』, 小學館

小松弘, 1995, 『光の誕生 リュミエル』, 朝日新聞社

內藤誠, 2001, 『昭和映畵史ノト』, 平凡社新書

佐藤忠男編 1985-8, 『講座 日本映畵』全八卷, 岩波書店

櫻本富雄, 1993, 『大東亞戰爭と日本映畵』, 靑木書店

杉林隆, 2003, 『昭和戰時期の日本映畵』, 鳥影社

田中純一郞, 1980, 『日本映畵發達史』全5冊, 中央公論社

東京新聞編集局編, 2001, 『映畵監督50人』, 東京新聞出版局

日本無聲映畵篇, 2003, 『よみかえる幻の名作』, マツダ映畵社

古川隆久, 2003, 『戰時下の日本映畵』, 吉川弘文館

山田和夫, 1997, 『日本映畵101年:未來への挑戰』, 新日本出版社

四方田犬彦, 2000, 『日本映畵史100年』, 集英社新書

Rene Predal, 1994, Histoire du Cinenma, 김희균역, 1999, 『세계영화10년사』, 이론과 실천

 

 

인적사항

성명 : 구견서(Koo Kyeon-Seo)

소속 : 평택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

주소 : 경기도 평택시 용이동 111번지

저서 : 『현대일본사회론』(1999), 『현대일본문화론』(2000),

      『현대일본사회의 이해』(2001), 『일본지식인의 사상』(2001),

      『일본민족주의사』(2004), 『일본문화총서』(2003;공저)

영어제목 : The Spirit of the Age of Japanese Movies

           ; From the Meiji Revolution to the Pacific War    

 


1) 2.26사건은 육군제1사단의 청년장교가 수천명의 병사를 동원하여 원로와 중신을 습격하여 사이토(齊藤實)내대신, 다카하시(高橋是淸)대장성대신 등을 사살한 사건이다. 그들은 천황친정의 군국주의 국가를 위한 '쇼와유신'(昭和維新)을 주장하였지만 29일 진압되었다. 이후 군상층부는 사건을 이용해서 일본의 군국주의화, 대외침략과 국내억압체제를 강화하였다.

2) 야마타이국(邪馬台國)논쟁에서 유명한 여왕 히미코(卑彌呼)를 주인공으로 한 내용이 시작된 시점에서 내무성검열에 결렸다. 그 내용은 "히미코가 일본황실선조중의 한 존재라고 볼 염려" 때문에 원작에 있는 '군장, 주, 왕비'등의 용어를 빼고, 가쓰벤의 대본과 영화선전물을 검열하고 영화내용도 전면적으로 삭제되었다.

3) 일본에서 영화에 대한 규제는 영화검열이라는 형태로 출발했다. 영화검열이전인 1920년대부터는 「문부성추천영화제」가 시행되어 교육적 견지에서 제작과 상영을 지원하였다. 이후에는 국내외적 정치상황에 맞춰 영화검열이 강화되었다. 특히 국내행정일반을 담당했던 내무성은 1925년부터 전국의 경찰을 통괄하는 경보국(警保局)을 통해서 국내에서 상영하는 모든 영화에 대해 검열을 시작하였다. 아마추어영화를 제외하고 풍속과 정치라는 두 측면에서 검열하여 상영금지 아니면 삭제의 조치를 취하였다. 당시 검열통계는 비공개되었지만 『활동사진필름검열연보』(1939년이후에는 『영화검열시보』)에서 알 수 있다. 검열내용은 양화와 방화를 망라해서 천황족에 대한 모독표현, 학살장면, 성교장면, 성인의 전나장면, 키스신 등이었다.

4) 내용은 영화사업(제작, 배급, 흥행)의 정부허가제, 종업원의 등록제, 외국영화의 수입제한, 우수영화의 보호 및 장려, 문부성인정 문화영화의 영화관 강제상영, 촬영전 대본의 사전검열, 문부성인정영화 상영시제외하고 6살부터 14살까지 영화관출입금지 등이다. 따라서 1939년에 제정된 영화법은 제작과 배급을 허가제로 하여 종전의 검열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또한 감독과 배우는 모두 면허등록제가 되었고, 작품은 시나리오 단계에서 검열받아야 했다. 영화제작과 상영에 관한 제한에 대한 내무성 검열기준은 황실과 일본국가의 모독, 청치적 혼란을 조장하는 사상고취, 공익저해, 공공질서풍속저해 등과 같은 종래의 기준 위에, 국어를 혼란시킬 우려가 있는 경우, 제작기술의 조잡함 등이 추가되었다. 특히 1939년 영화법 영화불합격규정29조는 황실의 존엄을 모독 또는 제국위신을 해할 염려가 있는 것, 조헌(朝憲)문란의 사상을 고취할 염려가 있는 것, 정치, 군사, 외교, 경제 등과 다른영역의 공익상 지장이될염려가 있는 것, 선량한 풍속을 깨고 국민도의를 훼손할 염려가 있는 것, 국어의 순수성을 현저하게 해할 염려가 있는 것, 제작기술이 현저하게 졸속인 것, 기타 국민문화의 진전을 저해할 염려가 있는 것 등을 규정하였다(山田和夫, 1997).

5) 이 시기에 영화신체제가 형성되었다. 제작면에서 내무성은 제작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제작편수를 제한하고 흥행형태의 변경을 요구했다. 이런 조치는 영화업계의 재편을 가져와, 극동(極東)은 대호(大寶)영화로 개칭하여 우메다 다카라쓰카극장의 산하로 들어갔고, 전승(全勝)은 쇼치쿠에 매수되어 1941년 흥아(興亞)영화로 개칭하였다. 또한 뉴스영화도 1940년에 설립된 사단법인 일본뉴스영화사제작의 일본뉴스로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영화필름이 배급제로 전환되고, 영화가 대중오락에서 국민문화재로 전환되어 영화잡지도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내무성지도로 1940년말에 『일본영화』, 『영화교육』이 남았고, 1941년 1월에는 11개지가 통합되어 약 205개가 소멸되었다.

6) 오즈(小津安二郞)는 묵묵히 군역을 담당하고 싱가포르에서 일본군이 접수한 영화관에서 웰즈의 《市民ケン》를 보고 일본패배를 확신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미조구치는 외지에 파견되었지만, 장교대우를 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면서도 국가주의에 맞는 영화를 제작하는데 부심하였다. 야마나카는 중국에서 병사하고, 이다미 만사쿠(伊丹万作)는 결핵으로 병상에 있으면서 「戰時中止ヲ望ム」라는 문장을 썼다. 아베(何部豊)는 남방에서, 우치다(內田吐夢)는 만주로 향했다. 이마이(今井正)과 도요타(豊田四郞)는 조선에서 국책영화를 촬영했다.

7) 프랑스의 뤼미에르 사의 카메라맨이 일본에 와 영화를 전파하였듯이 일본인은 20세기 초기 대만, 싱가포르 등에 영사기를 전파하여 영화라는 존재를 알렸다. 중국인은 1905년 최초로 북경에서 영화를 촬영하였고, 조선은 1923년, 대만은 1925년 영화를 만들었다. 따라서 영화는 예술이나 오락을 포함하고 있지만 문명사적 관점에서 보면, 근대화의 상징이라는 측면이 있다.

8) 그리고 1908년 조선의 영친왕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의해 인질로 일본에 건너갔다. 이토는 영친왕이 극진히 대접받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가와우라 겐이치(河浦謙一)에게 의뢰해서 영친왕이 사냥을 하며 즐기며 잘 대우받고 있는 장면을 촬영하여 필름을 조선에 보내는 선전용 기록영화를 만들게 하였다. 또한 일본에서는 이토와 고종이 함께 여행하는 《한국일주》라는 기록영화가 만들어져 1908년 상영되기도 하였다.

9) 일본내에서 전쟁활동사진이 공개되는 한편 구미로부터 일러전쟁영화가 수입되어 전쟁영화의 붐이 조성되었다. 이런 전쟁영화의 등장은 반전·반군국주의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고도쿠(幸德秋水)와 사카이(堺利彦)의 「평민신문」은 반전 및 반군국주의의 논의를 개진하였다. 또한 가타야마(片山潛)는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제2차인터내셔널대회'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푸레하노프와 악수하는 등 프로레탈리아 국제주의운동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압도적인 배외주의적 애국주의가 열광하여 빛을 보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