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영상의 한류와 한류화
우리영상의 한류와 한류화
The Warmest Cheers' Waves to the Korean Films & Broadcasting Works
/Making Foreign Audiences Mini-Koreans
장석용(영화평론가,한국영화학회 대외정책이사,동국대 대학원 강사)
1. 소통과 차단의 경계에 선 한류
전 장르를 망라한 한국 문화가 지구촌에서 한류를 주도하고 있다. 일류(日流)처럼 경계의 눈초리에서 출발한 한류寒流라는 명칭은 이제 당당히 한류韓流로서 코리안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이 한국물결 Koreanische Welle의 파고는 아시아의 동서남북은 물론이고 미국 본토까지 공략하고 있다. 작년 한류 진원지인 한국 남단 부산 APEC 회의에서도 한복, 요리, 영상 등 한류를 확장시켰다.
아시아의 맏형 중국의 한류에 대한 반향은 결국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97년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방영으로 중국에 본격 소개된 한국영상물은 1억 5천만의 관객을 모으며 한국을 알리는 팜프렛 역할을 충분히 하였다. 98년 HOT의 음반이 출시되었고 2000년에는 HOT와 안재욱의 공연이 있었다.
2006년 현재 우리는 수교한지 14년 만에 <대장금> 방영이후 방송 프로그램 교류로 중국 팬들을 우리 드라마 팬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후 중국 당국에서는 우리 드라마 방송 시간대를 변경해 방영하도록 하는 견제구를 날리고 있다. 아울러 방송과 영상물 등을 통한 중원 통일을 벼르고 있다.
일본의 경우는 어떠한가? 문명국인 고구려, 백제, 신라로부터 고급문화들을 전수받았다. 조선 후기까지 문화 유입의 유일한 창구인 조선은 일본인에게 고급문화 Klassische Kultur의 갈증을 해소케 해주었고, 우리로부터 받은 대륙 문화는 일본인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어 왔다.
국교정상화 40년, 1998년에 우리는 제1차 일본 문화개방을 했다. 2002년 보아는 오리온 차트 1위를 차지했고 2003년에는 NHK는 한․일경제적 효과 2조 3,269조에 달하는 <겨울연가>를 방영했다. NHK는 <겨울연가> 한편으로 450억의 기본 수입을 챙겼다. 2004년 본격적 욘사마 바람이 불더니 이제 일본은 우리의 드라마․영화의 최대 수입국이 되었다.
엄격하게 감추어져 왔던 한국에 대한 통제의 힘은 그들의 문화 원류를 찿는 과장에서 업신여겨도 될 대상이 아니라 그들의 조상이 섬겼던 문화의 뿌리를 간직한 신적 소도를 탐방하는 신비의 땅이 되었다. 그래서 일본인에게 한국은 동경의 대상이고 어머니에 대한 추억과 고향의 향수를 가진 곳이다.
꾸밈없이 솔직한 한국 문화의 힘, <겨울연가>의 성공 요인도 드라마 주인공의 진솔한 감정표현이었다. 한국의 산하처럼 아기자기하고 예술품 같은 곳은 없다. 그곳에서 태어난 문화 역시 동화같이 매력적이다. 우리문화가 우리 주변국을 흡인시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98년 <모델>, 99년 <의가형제>,<별은 내 가슴에>, 03년 <유리구두>, 04년 <노란 손수건>,<겨울연가> 05년 <대장금>의 방영으로 베트남인들이 동경하는 마음의 나라가 한국이 되었다. <별은 내 가슴에>는 2002년 멕시코와 남미에 상륙하기도 하였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한국 대중문화가 유행하는 사회 문화적 현상에서 출발한 한류는 아직도 그 맹위를 떨치고 있다. 90년대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중국, 홍콩, 대만 등 중화권과 인접지역 베트남에서의 한국의 가요, 드라마, 패션, 관광, 영화 등 한국의 대중문화를 향유 소비하는 추세는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 같다.
일본엔 NHK 공중파에서 2005년 10월 8일자로 <대장금>을 방영을 시작했고 , 아직 중국에도 <대장금>의 열풍이 거세다. 이어 아랍과 인도 지역에서도 <겨울연가>는 진행 중 이다.
한류는 김휴종의 ‘한류 스타파워, 가치와 재고찰’에서 지적되듯 ‘한류는 아시아 국가들이 공유하고 있는 인본주의, 가족주의 등 철학적 개념에서부터 아시아인으로서의 얼굴모습, 피부색, 체격조건, 겸손함 등이 망라된 개념인 아시아적 가치와 글로벌 가치의 황금 비율적 융합에 의한 성공’으로 비춰지고 있다.
드라마를 포함한 한국의 영상물들은 섬세한 화면구성과 화려한 배경, 낭만적 스토리로 볼거리를 제공하며 같은 동양권이지만 세련되고 수려한 외모의 배우들이 많아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밖에 웃음유발 요소, 제스처, 미의식, 가족의 유대감 등이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도 꼭 같지만은 않다는 점이 나라마다 다른 이유에서 좋아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한류의 스승, 영화는 오래전부터 아시아에서 그 영역을 지키며 얼굴을 익히고 있었지만, 방송매체의 파급효과는 영화의 고답함을 일거에 깨는 파격이다. 아시아는 한국의 문화상품에 매료되고 열광하고 빠져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만과 교만이라는 단어를 배우면 안 된다.
이미 수입가가 높아진 우리의 방송물들과 영상물들은 수입기피 대상이 되고 있다. 일회성이 아닌 장기적 안목에서 우리 영상물들을 관리하여야 할 것이다. 일본이 문방구에서 저가로 십수 년에 걸쳐 우리 어린이들을 공략했던 것처럼 한류 브랜드 상품 수출에도 인내의 덕목을 접목시켜야 한다.
우리의 솔직함과 순수함이 강점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영상매체의 성장은 영화의 성장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우리가 겪어왔던 우리영화사와 이슈에 걸친 과거와 현재를 돌아 볼 필요가 있다.
2. 한류의 자양분 영화, 과거와 현재 리포트
1919년부터 해방까지 참혹한 일제시대에 걸쳐있는 150여 편의 영화들의 초라한 제작편수와 1919년 Kinodrama 김도산의 『의리적 구토』로 발아가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대장정은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해방정국의 우리영화는 광복영화라고 불려지는 애국심 고취의 영화들 몇 편이 주류를 이루다가 다시 6․25 동란기를 맞아 16mm 필름으로 명목을 잇는 고달픈 시련의 길을 걸어왔다. 이후 미군정하의 영화들은 전후 독일처럼 길 잃은 양들에게 먹이를 주고 정신적 안식처와 위안을 주는 역할을 해왔다.
해방 후, 자본과 기자재, 연기자가 턱없이 부족한 어려운 여건 하에서 영화 전성기를 일군 감독군은 유현목, 신상옥, 김기영에 의하여 이루어져 왔다. 그들의 열정과 땀이 오늘에야 결실을 이루고 있다. 후배들의 수상이 그것이다. 선배들의 가난과 열정은 이제 후배들의 돈과 여유로 환치되었다.
군사정권하의 한국영화는 정권 유지의 홍보, 혹은 가혹한 검열 하에서 정권의 시녀 역을 톡톡히 하였다. 검열에 따른 침체기가 이어지다가 70년대 TV의 영향으로 초토화된 한국영화는 저예산 의무제작으로 관객의 외면을 받았고, 이를 타파하는 수단으로 호스티스물이라라 부려지는 저급 멜로드라마와 국적 불명의 액션물들로 흥행을 하겠다는 제작자들이 많았다.
또 한편의 제작 집단은 군사정권이 한국의 반공영화 양산을 고양시키는 길목에서 편승하여 외화수입권을 겨냥하여 재산축적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60년대 영화전성기의 3감독들은 각각 전통사극, 문예물, 인간의 본능과 여성심리 묘사물 등으로 영역을 구축하고 있었다.
사회 현실 고발영화 작품들은 찿아 보기가 힘들었다. 유현목의 『오발탄』은 상영불가라는 서리를 맞았고, 이후 제작자나 감독들은 당국의 눈치 보기로 영화를 제작 연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여건 하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은 천편일률적 일 수밖에 없었고, 관객들의 한국영화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했다.
미국/독일/프랑스 문화원에서 상영되었던 영화들은 젊은이들의 숨통을 트게 해주었다.을 중심으로 한 외국들 이었다. 이들 영화를 보면서 영화 버퍼buffer들은 영화를 새로운 창을 만들어 그들만의 시선을 갖게 되었다.
프랑스 문화원의 씨네클럽과 독일문화원의 동서영화클럽은 대학생과 영화 애호가들의 영화토론장이 되었다. 프랑스 문화원은 안병섭, 정용탁 선생 등이 주축이 되었고, 독일문화원은 나를 비롯한, 전양준, 강한섭, 정성일 등이 있었다.
70년대 신기한 영화들이 있으면 미군부대나 외인아파트의 영화 소장가 들과 같이 영화를 보던 아날로그적 낭만시대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비디오는 감히 상상도 못하던 때였다. 지루했던 70년대가 지나고, 3김 시대의 어수선함은 현실의 억압적인 욕구불만에 대해 다양한 목소리를 내던 때였다.
이장호의 『바람불어 좋은 날』 배창호의 『꼬방동네 사람들』은 닫힌 현실에서 열린 영화를 지향하는 커다란 신호탄이 되었고,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영화 감독들은 외국영화들을 접할 기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그만큼 ‘우물안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했다.
닫힌 영역에서 열린 영역으로의 과감한 방향전환은 88 올림픽이 계기가 되었다. 영화에서 금기되었던 공산권 영화를 접한 우리 관객들은 비교적 덤덤했다. 기우를 깬 것이었다. 직배 반대투쟁에도 불구하고 미국영화 직배(‘88)는 강행되었다. 한국영화가 비로서 데미안의 알을 깨고 나온 것이다.
한국영화는 외형적으로 잔잔한 움직임이었지만 그 내부는 경천지동의 세포분열을 가속화 시키고 있었다. 한국소형영화작가협회 등이 교육해온 홈 비디오적 가벼움에서부터 『닫힌 교문을 열며』,『광주항쟁』,『상계동 올림픽』과 같은 작품이 영화관객의 저변확대를 자동적으로 유도하게 되었고, 영화단체들은 이제 분명한 칼라를 갖게 되었다.
우리영화가 세계에 알려지고 제대로 평가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이었다. 한국이 가입하고 최초로 우리대표가 파견되어 목소리를 낸 사건은 영화적으로 커다란 사건이었다.
때는 1994년 10월 27일부터 9박 10일 동안 당시 한국본부 사무국장인 본인이 Derec Malcom데렉 말콤 회장과 Klaus Eder 클라우스 이더 사무총장을 이태리 Saint Vincent생 빙 생에서 만나고 우리 영화의 현황을 브리핑 하였다. 이미 이더 씨와는 남산 영화진흥공사에서의 2시간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고, 면식이 있는 사이여서 반가움은 더욱 더했다.
이듬해 나의 도움으로 후배 전양준이 Manheim만하임/Heidelberg하이델베르크 심사위원에 파견되었고, 그 노하우는 부산국제영화제를 탄생시켰다. 1회 영화제(‘96)는 어설픈 것 이었지만 영화 애호가와 종사자들에게 새로운 영화들의 등장은 분명 엄청난 충격과 자극이었다.
영화진흥기금이 신설되어(‘97) 영화제작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정부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제작비의 일부분인 3억원 정도가 저리로 융자되었고, 남양주 종합촬영소 완공(‘97)은 세트 제작의 어려움을 해소하는 해결책의 일부분이 되었다. 본격적 영화진흥법 제정(‘98)이 실현되고, 4대 국제영화제 수상작 중심으로 일본영화가 수입을 개시했다.(‘98 10월)
99년 2월 13일 개봉된 강제규 감독의『쉬리』는 전국 620만 동원으로 이전의 최다관객 동원 숫자를 단숨에 넘겨버렸다. 『쉬리』는 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영화 중흥기의 화려한 서막을 올린 작품으로『타이타닉』의 기록을 깨며 한국형 블럭버스터의 가능성을 증명해주었고, 한국영화의 시스템적 붐업에도 크게 기여한 영화이다.
1999년 9월 10일 일본영화 2차 개봉이 시작되었으나 이후 일본영화에 대한 폭발적 반응은 없었다.
2000년 9월 9일『JSA,공동경비구역』 개봉으로 남북의 이념 구분과 민족에 대한 서로 껴안기가 명제로 떠올랐다. 01년 3월 31일 『친구』가 개봉되어 국내에서는 엄청난 관객을 모았으나 대만에서는 수모를 당할 정도의 관객을 모았다.
90년대 초, 몇 작품씩 패키지로 팔리던 임권택 감독의 작품은 마침내 02년『취화선』으로 깐느 영화제 미장센(감독상)상을 공동이나마 수상했다. 세계3대 영화제에서 첫 수상이 된 셈이다. 02년 5월 1일 영화검열법이 완전 폐지되었다. 03년 12월 24일 『실미도』개봉,11,081,000명의 관객 동원으로 천만관객시대를 열었다. 04년 2월 5일 『태극기 휘날리며』가 개봉되어,11,746,135명의 관객을 동원, 연 이은 천만 관객을 모았다.
2004년 일본만화가 원작인『올드 보이』는 57회 깐느영화제 심사위원 상을 수상함으로써 한국영화는 그레이드 업 되었다. 2005년에는 『웰컴 투 동막골』(스크린수 114)이 8,008,622명의 관객을 동원 흥행1위를 차지하였고, 2위에 『말아톤』(스크린수 73)이 5,148,022명,3위에 『가문의 위기』(스크린수 101) 5,635,266명,4위에 『친절한 금자씨』(스크린수 127)가 3,650,000명,5위에 『공공의 적2』(스크린수 95)로 3,911,356명을 동원하였다.
2006년 상반기를 달구었던 『왕의 남자』는 1,146만 명, 『투사부일체』가 610만 명을 동원하였고,『괴물』이 2006년 8월말까지 관객집계로 1297만 명을 동원 관객동원으로는 역대 1위를 차지하였다.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이 30여개에 달하는 국내외 최다상 수상의 기록을 갖고 있지만 이에 못지 않게 한국의 빠조리니 김기덕은『 섬』, 『나쁜 남자』,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사마리아』, 『빈 집』 등으로 98년 제 1회 호주 누사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월드 시네마상, 99년 제6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99년 제21회 판타스 포르토 국제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99년 브뤼셀판타스틱국제영화제 경쟁부문 대상, 03년 제56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청년비평가상 1등상,03년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청년비평가상 1등상, 04년 베를린영화제(사마리아), 베니스 영화제(빈집) 감독상을 수상했다.
2005년에도 53회 산 세바스찬 영화제에서 김기덕의 『빈집』이 국제비평가연맹 대상, 58회 깐느영화제 홍상수의 『극장전』각본상 노미네이트, 62회 베니스영화제 박찬욱의 『친절한 금자씨』 노미네이트, 필라델피아영화제에서 배창호 감독의 『길』이 최우수작품상 수상이 되었으나 시네아스트들의 두드러진 후작이 없어서 아쉬었다.
2006년 제55회 베를린영화제에서는 임권택 감독에게 명예황금곰상을 수상하고, 특별회고전을 개최하여 임감독과 한국영화에 대한 경의를 표하였다.
자갈치 시장은 에너제틱한 코리안 들을 보여주는 곳이고, 이미 세계 10대 국제영화제의 주빈국이 된 부산국제영화제는 역동적 한국영화들을 계속 생산하도록 주문하고 있다. 한국영화의 힘, 즉 한류를 가능케하는 힘은 지속적 연구에 있다. 정체하면 도퇴한다. 언제나 경쟁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세계3대영화제에서 수상의 경험이 있게 된 나라 코리아, 그러나 감독상들은 받았지만 아직 최우수 작품상을 받지 못한 나라이다. 국제영화제의 수상 이면에는 원로영화인들, 선배들이 닦아 놓은 피땀으로 쌓아온 노력의 결실이 아닐까 생각한다.
검열의 완화와 민주화를 위해 희생된 숱한 영화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영화들은 자유의 바람을 맡고 있다. 스크린 쿼터 투쟁으로 오늘의 극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영화는 제3세계에 생산 공장을 갖추고 있지만 그 활동영역을 전 세계로 확장시키고 있다.
헐리우드의 제작시스템을 자연스레 배웠지만 우리만이 해낼 수 있는 노하우를 갖고 있다. 한류를 가동시키는 원자로를 갖고 있는 셈이다.
쉽게 말해서 잔머리, 좋게 말해서 기획력, 그러나 마케팅에 이르는 과정은 아직 미숙하다. 일본에서 부는 한국영화 붐은 어느 측면에서 일본의 기획력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아쉽다. 외국 공중파에서 분 한국영상물의 점진적 바람이 코리안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시점이다.
작년 프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에서 한국이 주빈국이 된 것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우리의 작품이 충분히 국제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우리 영상물이 국제적이 될 수 잇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우수 외국영화는 우리영화의 토양을 살찌게 하는 교과서였다. 관객의 힘도 우리 것을 국제화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으며, 프린트 제한 벌 수 폐지(‘94)와 복합 상영관 수의 증가는 스크린 수의 비약적 팽창을 가져 왔으며, 동방에 떠오른 영화제전은 우리 관객의 수준을 높이는 기여하였고, 엄청나게 수입된 영화제용 영화들은 한국영화의 빈곤한 상상력을 풍요롭게 채워주는 역할을 하였다.
영화제는 우리영화를 홍보하는 시장이다. 생존경쟁에 선 우리영화는 국제시장에 우리영화들을 출품해도 손색이 없게 노력하는 감독들과 영화 제작진들에 의해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다. 감독들의 무덤이었던 극장의 횡포나 제작자들의 요구에서 벗어나 있지만 감독들의 생활고는 아직 해결할 수 없는 실정이다. 비약적 발전을 한 한국영화는 IMF가 준 교훈으로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으며, 10년간 한국영화는 이미 산업으로 발전해 있다.
한국은 연간 극영화 80여 편을 생산하는 영화 산업국이다. IMF의 파고는 1998년 43편 제작이라는 비극적 수치를 기록 했다. 2004년엔 82편 생산, 74편을 개봉, 외국영화는 285편 수입에 194편이 개봉, 도합 268편의 국내외 영화가 개봉되었다. 2005년엔 87편을 생산, 83편을 개봉했고, 외국영화는 232편 수입, 213편이 개봉되어 한국 내에서 296편의 국내외 영화가 개봉되었다.
20세기 마지막을 장식한 1999년『쉬리』의 대박이후 2000년 59편, 2001년 65편, 2002년 78편, 2003년 80편, 2004년 82편, 2005년 87편을 제작하여 영화제작에 대한 관심사와 산업으로서의 영화의 위상을 실감나게 하여주었다. 제작비와 마케팅 비용을 합친 2005년 한국영화 편당 제작비는 39억9천만 원으로 2000년의 21억5천만 보다 두 배 정도 늘어났다.
편당 제작비는 2001년 25억5천만 원, 2002년 37억2천만 원, 2003년 41억6천만 원, 2004년 41억6천만 원으로 해마다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2005년에 편당 제작비가 50억 원 이상 투입된 영화는 2004년 15편보다 14% 증가한 21편이었다.
대작 영화중 『태극기 휘날리며』는 208억, 『태풍』175억, 『청연』129억 , 『역도산』106억, 『형사』102억원, 『웰컴투동막골』95억이 들었다. 연간 총제작비도 1천268억 원(2000년), 1천657억 원(2001년), 2천901억 원(2002년), 3천328억 원(2003년), 3천411억 원(2004년), 3천471억 원(2005년) 등으로 해마다 늘었다.
우리영화의 수출로 꾸준히 늘고 있다. 2004년 한국영화의 해외 수출은 5,828만 4,600달러(약 600억원)를 기록했다.10년 전인 1995년의 20만 8,679달러(약 2억 1,000만원)에 비해 무려 280배 가까이 폭등한 액수이다. 일본은 2004년 40여편의 한국영화를 수입 상영하였으며, 특히 그동안 『쉬리』,『공동경비구역 JSA』,『엽기적인 그녀』는 흥행에 성공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2000년 수출편수 38편에 평균수출가 110,289달러 총수출액 7,053,745 달러에서 2005년 수출편수 202편에 평균수출가 376,211달러 총수출액 75,994,580 달러로 늘어났다.
우리영화는 미국 대중영화의 한계가 허망하듯 대중영화의 장점을 충분히 살리면서 질적으로 도약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3.외국에서의 우리영화에 대한 시선
영화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진입한 한국영화를 보는 시각이 남다르다. 일찍이 인도와 일본에 애정을 보내던 시각의 일부분이 대만, 중국에 이어 중동으로 이동되더니 이제 코리아로 와 있다.
영화사상 유례없는 천만 관객돌파가 자주 이루어지고 있고, 한국 영화는 국제영화제에서 당당히 얼굴을 내밀고 있다.
1989년 로카로노 영화제에서 황금표범상은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한국의 심오한 불교 철학에 바탕에 둔 수려한 작품으로 세계인들, 특히 서구 평론가들을 당혹케 만든 충격적 작품이었다.
그의 작품이 연속적이 못한 것처럼 한국영화가 앞으로 제대로 대접을 받으려면 지속적 시네아스트의 활동이 필요하다. 상업적 시각으로는 현재의 난관을 타개할 수 없으며 이와 더불어 외국의 시선도 따가울 것이며 세계영화계의 흐름을 주도하는 작가도 탄생하지 못할 것이다.
부산에서 타 오르는 영화 봉화는 부천, 전주, 광주로 이어지고 먼 산악에 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영화제는 자국 영화 생산품과 비례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류의 물결을 만들어야지 외국영화를 수입해 영화제의 명성을 쌓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앞으로의 영화제들이 충격적인 뉴스로 비춰지지 않도록 지금 영화제들을 점점하고 제작 준비 중인 영화들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의 조언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우리영화를 세계영화로 만들 것인가? 『레이』의 재즈리듬은 전 세계에 퍼져 뿌리를 내리고 있고 빔 벤더스의 『부에나 비스타 소시얼 클럽』 쿠바 리듬은 아직 귓전에 생생하다. 우리영상의 생존법은 의미있는 우리 철학의 존재, 미학적 감각, 아름다운 미장센, 박진감있는 전개와 재미있는 스토리가 있어야한다. 다양한 장르로 영역을 확대해야 하고, 재능있는 배우들을 본격 육성해야 한다.
우리는 헐리우드 스타일을 이용해 아시아적으로 풀어내는 힘을 갖춘 나라이다. 헐리우드 스타일을 잘 이용하여야 한다. 마케팅 전문가들도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우리나라 영화의 첫 국제영화상 수상은 1961년 제11회 베를린 국제영화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대진 감독의 『마부』가 첫 수상(Sonderpreis, 특별상)의 영예를 안았다.
실제적으로 경쟁부문에서 수상한 경력을 따져보면 1984년 제20회 시카고 국제영화제에 출품된 『여인잔혹사(이두용 감독)』가 최우수촬영상을 탄 것이 첫 수상이다. 세계 3대 영화제의 첫 수상은 『씨받이(임권택 감독)』에서 최우수여우주연상을 받은 강수연의 1987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였다.
우리영화의 국제영화제 수상내역을 살펴보면 외국이 우리영화에 관심을 둔 작품들을 알 수 있다.
1961 제11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마부(강대진 감독)>-국제영화제 최초 ‘특별상’ 수상
1984 제20회 시카고 국제영화제 <여인잔혹사(이두용 감독)>-최우수촬영상
1984 제21회 시카고 국제영화제 <땡볕(하명중 감독)>-최우수촬영상
1986 제22회 시카고 국제영화제 <길소뜸(임권택 감독)>-게츠 세계평화메달상
1987 제44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씨받이(임권택 감독)>-최우수여우주연상
1988 제 2회 동경 국제영화제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이장호 감독)>-국제비평가협회상
1989 제16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아제아제 바라아제(임권택 감독)>-최우수작품상 및 국제 비평가협회상 등 4개부문 특별상
1989 제42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배용균 감독)>-최우수작품상
1990 제12회 낭뜨 3대륙영화제 <그들도 우리처럼(박광수 감독)>-심사위원특별상, 최우수여우주연상(심혜진)
1991 제15회 몬트리올 세계영화제 <은마는 오지않는다(장길수 감독)>-최우수여우주연상(이혜숙), 최우수각본상
1992 제16회 몬트리올 세계영화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감독)>-우수제작자상
1992 제 5회 동경 국제영화제 <하얀전쟁(정지영 감독)>-최우수작품상/최우수감독상
1993 제18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살어리랏다(윤삼육 감독)>-최우수남우주연상(이덕화)
1993 제1회 상해 국제영화제 <서편제(임권택 감독)>-최우수감독상,최우수여우주연상(오정해)
1994 제44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화엄경(장선우 감독)>-알프레드바우어상(영화예술창안상)
1994 제16회 낭뜨 3대륙국제영화제 <장미빛 인생(김홍준 감독)>-최우수여우주연상(최명길)
1994 제42회 산세바스찬국제영화제 <헐리우드키드의생애 (정지영 감독)>-국제비평가협회상
1996 제20회 몬트리올 국제영화제 <학생부군신위(박철수 감독)>-최우수예술공헌상
1997 제12회 타쉬켄트 국제영화제 <학생부군신위>-Grand Prix
1998 제11회 동경 국제영화제 <아름다운 시절(이광모 감독)>-Tokyo Gold Prize
1999 제52회깐느국제영화제 <소풍(송일곤 감독)>-단편경쟁부문 심사위원상수상
1999 제12회동경국제영화제 <송어(박종원 감독)>-심사위원특별상수상
2000 제35회 카를로비바리국제영화제 <박하사탕(이창동 감독)>-심사위원특별상
2000 제13회 동경국제영화제 <오!수정(홍상수 감독)>-심사위원특별상
2000년 이탈리아 우디네이 아시아영화제 최우수 관객상 <정(배창호 감독),폐막작>
2000 제1회 프랑스 베노데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최우수 관객상 <정>
2001 제54회 로카르노국제영화제 <나비(문승욱 감독)>-최우수여우주연상(김호정)
2001 제14회 동경 국제영화제 <봄날은 간다(허진호 감독)>-최우수 예술공헌상
2002 제55회 칸느국제영화제 <취화선(임권택 감독)>-최우수감독상
2002 제26회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마리이야기(이성강 감독)>-장편 경쟁부문 대상(그랑프리)
2002 제59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오아시스(이창동 감독)>-감독상, 젊은 연기자상(문소리)
2003 제25회 모스크바영화제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감독상
2003 51회 산 세바스찬 영화제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은조개상,신인 감독상
2003 51회 산 세바스찬 영화제 김기덕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관객상,로카르노영화제 황금표범상
2004 57회 깐느영화제 박찬욱의『올드보이』 심사위원상 수상
2004 53회 베를린영화제(사마리아)와, 61회 베니스 영화제(빈집)에서 감독상 김기덕 수상
2005 53회 산 세바스찬 영화제 김기덕의『빈집』국제비평가연맹 대상
2005년 58회 깐느영화제 홍상수의 『극장전』각본상 노미네이트
2005년 62회 베니스영화제 박찬욱의 『친절한 금자씨』 노미네이트
2005년 필라델피아영화제에서 배창호 감독의 『길』최우수작품상 수상
2006년 제55회 베를린영화제 임권택 감독 명예황금곰상, 특별회고전 개최
이제 한국영화는 미국이나 일본의 메이저 회사들에게 리메이크 판권까지 팔고 있다. 2001년 『조폭마누라』(95만 달러), 2002년 『달마야 놀자』(30만 달러),『엽기적인 그녀』(75만 달러),『시월애』(50만 달러),『가문의 영광』(50만 달러), 2003년 『광복절 특사』(50만 달러),『장화,홍련』(100만 달러+100만달러),『선생 김봉두』(65만 달러),2004년 『폰』(제작비의 2%),『령』(50만 달러),『인형사』(130만 달러), 『올드보이』,『8월의 크리스마스』,『공동경비구역 JSA』,『조용한 가족』등이 팔려나갔다.
헐리우드 마저 빈약한 아이디어를 한국에서 찾으려 하고 있다.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의 일정한 부분이 한국에서 생산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의 결과인가? 결국 지옥 같다던 교육의 결과가 우리의 위상을 세우는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궁무진한 장르나 소재의 확장은 다양한 과목을 소비해내는 우리의 교육의 공헌이고, 다양한 연기자들의 등장도 교육의 기여이다. 아직 교육은 허기에 져 있다. 진정한 한류화는 체계적인 인간을 만드는 교육에서 출발한다.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심오한 테제이인 ‘한류의 비밀’은 교육에 있다.
글쓴시점(200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