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가요와 예술가곡의 경계-김종만
대중가요와 예술가곡의 경계
〔Ⅰ〕서언
“태초에 리듬이 있었다” 라고 갈파한 한스 폰 뷜로 (Hans Von Bülow) 말과 같이 음악은 인류와 가장 오래 함께 살아온 동반자이다. 우리는 규칙적인 심장박동의 맥박 흐름과 각 기관의 순환 속에서 균형 있는 하모니를 이루며 산다. 음악은 인간요람의 자장가로부터 마지막 향두가까지 노래해준다. 이와 같이 음악은 우리 삶의 희노애락의 정서와 필수 정화제인 것이다.
시대 흐름과 문명의 발전에 따라 음악 역시 같이했다. 운율적인 이야기는 시로, 국한된 민요는 세분화되며, 대중가요와 예술가곡으로 나뉘었다.
그런데 예술가곡은 음악 전공 성악인과 중ㆍ노년의 애호가, 그리고 극히 적은 청소년만 듣고 감상할 뿐이다.
그러나 대중가요는 거의 중ㆍ노년층 모두가 통기타시대 이전의 가요를 즐긴다. 또 아래 청ㆍ소년층은 현대 팽배한 상업주의 매스미디어 영향으로 온 몸짓을 다 흔들어대며 읍조리다 울부짓는 랩음악에 심취해 광란의 도가니에 빠져있다.
그러므로 음악분야에서는 현재까지 대중가요와 예술가곡이 걸어온 과정과 쌓아놓은 경계와 앞으로의 개선책을 모색할까 한다.
〔Ⅱ〕 대중가요
대중음악이란 대중이 부르는 대중가요와 기악음악을 통 털어 일컫는 말이다. 이 장에서는 대중가요 즉 유행가를 중심으로 말하겠다.
대중가요의 제일 큰 특성은 시대ㆍ사회ㆍ경제상에 따라 매우 틀리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를 더듬어 볼 것 같으면, 유행가가 전통 민요인 대중가요부터 시작했다. 근대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면 잡가가, 일제 강점기 초기에는 신민요를 대중가요로 꼽았다.
그러나 3ㆍ1운동이후 1920~1930년대 일제 강점기부터는 식민지적인 엔까(演歌)인 뽕짝류 유행가를 치밀히 보급시켰다. 이 유행가는 음악의 3 기본형식을 갖춘 곡이다. 그렇지만 예술가곡에 비교해 짧아, 5분이 넘지 않았다. 또 쉽게 친숙해 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남녀노소의 대중 모두가 불렀던 것이 바로 유행가였다.
특히 라디오 방송과 상업적인 축음기 음반회사는 뽕짝류의 특성을 이용해 대중가요를 확산시켰다.
1920년대 〈황성옛터〉ㆍ〈눈물젖은 두만강〉ㆍ〈타향살이〉 등을 비롯해, 1930년대까지 끊임없이 불려진 윤심덕의 〈사(死)의 찬미〉는 레코드 발전과 판매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30 년대 노래는 조국을 잃은 서러움과 이별 그리고 불행한 실의의 가사로 꽉 차 있었다. 고향을 떠난 실향과 눈물로 얼룩진 신세타령은 애절하기만 했다. 더욱이 이루지 못한 사랑의 죽음은 모든이의 심금을 울리며 풍미했다.
1940년대 일제강점의 최후 압정과 해방이후 분단기인 해방공간에 이르면 〈꿈에 본 내고향〉ㆍ〈고향초〉ㆍ〈가거라 3ㆍ8선〉 등으로 분단의 원한을 노래했다. 또 6ㆍ25로 한맺힌 이별과 실향은 〈굳세어라 금순아〉ㆍ〈이별의 부산정거장〉등으로 부르며 비극을 정화시켰다.
6ㆍ25이후 미군 진주는 미국 본토 팝 음악으로 우리 대중가요에 큰 영향을 끼쳤다.
5ㆍ16이후부터는 가사가 자유롭고 넓어지는 다양성을 보였다. 곡조 또한 밝아졌다. 내 자신에 관한 가사와 사랑과 실연의 상처와 이별을 〈동백아가씨〉ㆍ〈사랑은 눈물의 씨앗〉ㆍ〈떠날때는 말없이〉 등으로 남녀 가수들이 취입해 유행했다.
1970년대 이후 20대 청소년 가수와 젊은층은 이전의 유행가는 ‘흘러간 노래’ 로 간주하며, 통기타의 팝송으로 대변했다. 〈꽃반지 끼고〉ㆍ〈과수원길〉 등이 이 부류의 유행가로, 대중가요가 계층화되며 서로가 틀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젊은층의 혈기와 기질에 걸맞는 외국에서 도입된 빠른 비트의 비틀즈 음악 이라던가 디스코 음악으로 치달아 왔다.
그러나 현재는 청소년의 랩 음악으로 온통 뒤덮었다. 무조의 중얼대는 대사귀 노래. 귀가 멍멍할 정도로 강도 높은 데시벨의 몸체음악 (Body Music). 그 속에서 미친 듯이 흔들어대고 비비꼬면서 엇갈리며 뒤틀리는 몸체춤 (Body Dance). 우연성의 파괴 음과 흡사하며, 빠른 비트의 노래 소리(소음?). 노래 가사내용 또한 찢어진 사랑과 몸체라나. 그것도 모자라 국부만 살짝 가린 초미니의 무지개색 의상은 휘황찬란한 조명발아래서 빙빙 누드쇼처럼 돌아대는데, 마치 에로틱한 광란의 디오니소스 (Bacchus) 축제를 보는듯하다.
무엇이, 누가, 왜 이렇게 만들었나.
주범은 물질만능의 물주인 스폰서이다. 다음은 이러한 프로나 음반을 외면하면 견디기 힘들므로 할애를 해주는 상업주의 운영방식이다. 먹고 살기위해 작곡을 해주는 경음악의 유행가요 작곡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무엇인지를 모르고 부화뇌동하는 젊은층의 문제점이 제일 크다. 그들은 고전의 명작 책과 정서적인 음악보다는 바보상자의 오락프로와 비뚤어진 음악만 즐길 뿐이다. 그들은 벌겋게 달아오른 전구에 돌진해 죽는 줄도 모르는 하루살이 같다.
〔Ⅲ〕 예술가곡
순수가곡 또는 고전가곡을 말한다. 보통 가곡이라 한다. 가곡은 작곡가들이 예술적인 면을 강조ㆍ노력해 만든 작품이다. 가사나 시의 뜻은 음악의 멜로디 (가락)에 반영시켜야 한다. 반주역시 그 분위기를 잘 뒷받침해주어야 한다. 즉 3가지 모두가 조화로운 3위 1체가 되어야 한다.
외국 여러 나라 가운데 독일가곡이 으뜸이다. 왜냐하면 베토벤ㆍ슈베르트ㆍ슈만ㆍ볼프ㆍ시트라우스 등이 많은 명곡을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확고하며 심오한 예술가곡의 세계를 이룩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가곡의 효시는 1920년대 작곡한 홍난파의 〈봉선화, 봉숭화〉 이다. 가사를 보면 4ㆍ4조로 되어있다.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모양이/ 처량하다
이 곡이 가곡의 효시로 꼽힌 까닭은 가사와 난파가 작곡한 가락이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곡상은 낭만이 깃들어 있고, 가사는 애절하기만 하다. 이 봉선화는 3ㆍ1운동이후에 우리나라의 서러움을 사실ㆍ예술적 작품으로 처음 나타냈음으로 매우 뜻 깊은 가곡인 것이다. 일제 강점기말 1942년 김천애가 일본의 신인연주회에서 부른 후부터는 너나없이 폭발적으로 불러, 일본 독재자는 금지곡으로 했을 정도였다.
이 이외에도 현재명ㆍ조두남ㆍ채동선ㆍ김성태ㆍ박태준ㆍ김세형ㆍ이흥열ㆍ김동진등이 많은 우리가곡을 작곡했는데, 곡상이 아름다운 것은 아직까지 많이 부른다.
해방 후에는 월북한 김순남ㆍ안기영ㆍ이건우와 나운영ㆍ김순애ㆍ김대현ㆍ금수현등과 60년대 윤용하ㆍ정회갑ㆍ유신ㆍ장일남ㆍ백병동등에 의해 우리가곡은 많이 작곡되었으며 활성화 되었다.
그렇지만 그 뒤에서 현대에 이르도록 많은 작곡가들이 예술가곡을 작곡했지만, 외국에 비해 덜 정립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문제점을 앉고 있는 것 같다.
예술가곡은 작곡자는 물론 연주자인 성악가와 반주자까지도 작사된 시성의 특성을 알아야 한다. 시를 먼저 읽어 보면서 다양하고 미묘한 내용이나 단어 하나 하나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자ㆍ모음을 따져 보아야 한다. 다음 장단과 억양의 높고 낮음 그리고 프레이징을 알아야 한다. 제일 먼저 작곡자는 부단한 노력으로 여러 가사와 시를 음미하면서 그 시가 품고 있는 향기로운 시성과 뉴앙스를 찾아 낸 후 작곡해야 한다. 미리 작곡된 곡으로 이미 내놓은 싯귀에 맞춘다면, 그것은 기성복을 입히는 것 보다 못하다. 곡은 곡대로 가사는 가사대로 걸맞지 않은 우격다짐의 발을 구두에 맞추는 경우와 흡사하다. 만약에 가사가 ‘조조 가마타고’ 가 ‘조조가 마(馬)를 타고’ 라는 오류의 전달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악가는 작사ㆍ작곡자 의도는 물론, 정확한 딕션과 끊고 쉬며 우연한 프레이징으로 올바르게 전달하는 중요한 발표자이다.
반주자 역시 아래에서 부창부수 격으로 일심동체가 되어 연주해야만 올바른 예술가곡의 가치를 빛나게 할 것이다.
〔Ⅳ〕 결론
현대는 시끄러운 폭주족의 질주 뒤 매연으로 거리를 메운듯하다. 빠른 발전의 부산물로 주위환경 소음과 공해로 꽉차있다. 이러한 오염은 우리를 헤어날 수 없는 늪 속으로 끌고 간다. 더욱이나 국내외 대중음악마저 광풍의 소음으로 몰아친다면 우리 삶의 리듬을 잃어 균형이 깨질 뿐만 아니라 마음의 병마저 얻게 된다. 이러한 때 일수록 음악은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우리의 맑은 심성을 다스리며 밝은 삶을 인도할 시기인 것 같다.
허기야 물질만능의 상업주의들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돈을 벌기를 위해서는 나이 먹은 대중에게도 뭉텅이로 주었을 것이고, 젊은층의 대중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도 많은 스폰서 비를 써야 될 현실이기 때문이다. 돈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매스컴은 청소년 대중의 입맛에 딱 들어맞는 프로만 골똘히 연구ㆍ방영해 “끝내준다”며 극찬을 받는다. 이에 질세라 음반 등의 매스미디어들도 대중 쪽으로 기울어져 가고만 있다. 미친놈 널뛰듯 하는 형님 노조에 질세라, 광풍의 허리케인 노도와 같이 외국가수 연주장에 밀려오는 젊은 랩 매니어 앞에는 속수무책 일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우리는 절망하거나 방치해서는 않된다. 지금이라도 먼저의 문민정부가 들어서 문화정책을 문맹정책으로 바꾸어 놓았지만 고칠 필요가 있다. 돈만을 위한 상업주의를 억제하고, 매스미디어의 각성 또한 절감한다. 더욱이 대학가에도 이제는 실용음악과라든지 재즈과가 있으므로 올바른 교육을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작곡자 역시 이러한 점을 고려해 건전한 방향으로 작곡해 주었으면 한다.
순수 음악 예술계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전공인과 애호가가 적으니, 성ㆍ기악의 연주회장은 꽉 찰 수 없다. 특히 우리 예술가곡은 서양기법에 서양창법으로 부르지만, 가사는 우리 고유의 넋이 배인 작품이다. 그러므로 위에 적은 취약점을 보강해 예술성 깊은 명작을 계속 발표해야 한다. 또 우리 5음계 선율에 신경을 써 고유 한국가곡 예술을 드높이도록 노력해야 된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전화의 대기음악과 모바일 폰의 음악 그리고 전철 환승역 안내음악은 클래식 음악을 대중화시켰다. 재즈 가수가 클레식곡으로 유행ㆍ보급시킨 곡들도 꽤 많다. 위에 적은 윤심덕의〈사의찬미〉는 원래 이바노비치의 왈츠 곡 〈다뉴브강의 잔 물결〉 이다. 그렇지만 대중들이 열광하며 불러 유행가화 시켰다.
예술가곡이 저 피안의 예술세계에서 머무는 것 보다는, 대중과 호흡할 경계를 풀고 친숙해야만 한다. 오히려 대중음악과 함께 손잡으며 선도하여 정서순화에 앞장 서야 한다. 바로 지금이 그 호기인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 음악이 희망찬 앞날은 바라보며 나아갈 것이다.
*글쓴 시점/ 김종만(음악평론가ㆍ본회부회장ㆍ한국고서연구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