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의 연극

오늘의 서울연극

장코폴로 2011. 3. 20. 11:13

TTIS

2011.03.18

ISSN 2093-9140

오늘의 서울연극

Today's Theater In Seoul
제6 호
                       2011. 3.18

본 잡지에 실린 내용은 서울연극협회나 연극기록실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발행처: 서울연극협회, 연극기록실
발행인: 박장렬
편집인: 오세곤
편집위원: 양기찬, 조만수, 최은옥
기자: 심희령, 장시내, 이정현

목차

 

                                                - 편집인의 글 | 오세곤

1부

Review

                                              - 게르니카 | 최창근
                                              - 꿈꾸는 거북이 | 임수선
                                              - 도라지 | 김옥란
                                              - 메디아 | 목정원
                                              - 서울테러 | 이주영
                                              - 오후 네시 | 하형주
                                              - 조용한 식탁 | 성유경
                                              - 특급호텔 | 김민승
                                              - 특급호텔 | 이용은
                                              - 한중록 | 서은영
                                              - 해님지고 달님안고 | 장현주

2부

재수록

                                              - 극적인 하룻밤 | 박연숙
                                              - 루시드 드림 | 백승무
                                              - 민들레 바람 되어 | 박정기
                                              - 게르니카 | 박정기
                                              - 조용한 식탁 | 박정기
                                              - 유리알 눈 | 박정기

 

논단

                                              - 실기와 창의력 | 우상전    

 

정책기록실

                                              - 예술인 복지 법제화의 시급성과 당위성  | 오세곤
                                              - 대학로 포럼  2010~2011 연속 토론


 

편집후기

 

재수록

  <극적인 하룻밤>, 사랑에 대한 그리고 여성에 대한 모독


                                                                           박연숙(숭실대 베어드 학부대학, 철학 박사)

작 : 황윤정 연출 : 이재준  출연 : 민준호 손수정 성두섭 윤정선  
제작기획 : 극단연우무대
공연기간·장소 : 2010년 12월 07일(화)~2011년 02월 27일(일) 소극장 연우무대
관람일: 2011년 2월 19일 4시


“우리 술 한 잔 하고 같이 잘래요?” 이 연극의 부제이면서 남자에게 던지는 여자의 대사이다. 2인극인 만큼 모든 사건과 대사는 정훈(민준호/ 성두섭)과 시후(손수정/ 윤정선)가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에 맞춰져 있다. 이야기의 첫 장면은 정훈의 전-애인이 정훈의 선배와 결혼식을 막 마친 순간이다. 피로연장에서 정훈에게 다가와 수작을 걸어 온 여자는 신랑의 전-애인 시후이다. 그녀의 끈덕진 작업으로 둘은 하룻밤 섹스에 이르고 그날 이후를 수습하는 과정이 이 연극의 전부이다.

이 연극은 몇 가지 점에서 유감스럽다.
우선 20세 이상이라는 등급 표시를 하고 노출 수위가 아닌 공감 지수로 등급을 매겼다고 하면서 공감을 강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러한 등급 표시는 광고를 위한 제스처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노출 수위나 감정 수위 어느 면에서 보나 충격적일 것 없는 단조로운 드라마에 지나지 않았다. 이 연극이 관객과 공감하리라 확신한 한 지점은 배신의 아픔, 섹스에 대한 궁금증, 낙태한 여자의 괴로움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공감을 이끌기에 두 인물의 행동과 말은 모두 피상적이었다. 공감의 요소를 두고도 공감을 이끌지 못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극작가(황윤정)에게 있다. 배신의 아픔을 성충동과 자살충동으로밖에 표출하지 못하는 미숙함이 문제이다. 그러한 미숙한 감정에 공감을 요구한다는 것은 관객 모독이며 대중 오도이다.

이 연극이 불쾌한 것은 여성에 대한 잘못된 스테레오 타입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후는 26살의 광고 카피라이터이다. 그녀가 정훈을 대하는 태도는 도발적인 여인이면서 동시에 신경증 환자의 불안전성과 아이 같은 어리숙함이 혼재한다. 술 마시자거나 노래방 가자거나 섹스하자는 제안에서는 도발적인 여인의 모습이다. 이러한 성격은 ‘극적인 하룻밤’을 이끄는 중요한 요소인 점에서 충분히 설득력 있다. 그러나 자살 소동에서 나타나는 불안정성과 남자에게 매달리는 아이 흉내의 모습은 극적 필연성도 없을뿐더러 여성을 아이 수준으로 비하하고 결코 어른이 될 수 없어 언제까지나 남자의 보호와 지도를 필요로 한다는 잘못된 고정 관념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이다. 이 연극이 ‘로맨틱 코메디’를 지향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희극적 요소가 시후의 황당한 아이 흉내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위험한 코메디’라는 생각까지 든다. 이러한 문제의 책임은 연출(이재준)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 같은 목소리와 연기는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연출자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 연극에 로맨스가 빠져 있으니 웃음에서 보상하려 했을까? 로맨스는 없고 섹스만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웃음만 남발한 점에서 이 연극이 ‘로맨틱 코메디’를 자청하는 것은 과욕이다.

이 연극은 매우 거칠다. 결혼식장- 정훈의 집- 장례식장으로 이어지는 장소 역시 단조롭고, 특히 장례식장 장면 전후는 매우 어설프고 억지스럽다. 장례식장 장면에 앞서 정훈이 전신 거울 앞에서 몸단장하는 연기는 관객의 취미와 배우의 존재를 비하한다는 생각이 든다. 정훈은 한껏 도취되어 향수를 허공에 뿌려대고 춤추듯 우아한 몸짓으로 옷 입기 퍼포먼스를 행한다. 그러나 그러한 연출은 통일성과 긴밀성을 무너뜨린다. 그가 왜 그런 표정으로 그처럼 긴 시간 동안 연기를 하고 있는가는 전혀 답해질 수 없다. 다만 젊은 여성 관객의 눈요기를 위한 것이다. 이내 정훈의 그처럼 길고 어색한 몸단장이 전-애인 남편의 장례식장에 가기 위한 것임이 밝혀지는데, 장례식장에서 우연히 시후를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를 감안하더라도, 장례식장의 정훈과 몸단장 퍼포먼스의 정훈은 단절되고 파편화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극적 비약은 정훈의 집에서 정훈과 시후가 나누는 대사에서도 여러 차례 발견된다. 극적 미숙함을 조잡한 연출로 메우려니 지루해질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연극의 도입부에서 정훈과 시후가 버림받은 같은 처지로 서술되지만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정훈은 전-애인을 6년간 짝사랑했었지만 그녀와 사귀기로 한 첫 날 그녀와 섹스 한 직후 그녀에 대한 모든 환상이 사라지고 점차 사랑이 식어갔다고 했다. 그렇다면 정훈은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발목의 족쇄를 풀어 버린 것에 해당한다. 그녀가 임신한 아이가 자신의 아이인지 아닌지도 확인하지 않고 미련 없이 선배에게 보낼 수 있었던 것 역시 그녀로부터의 자유를 원했기 때문이다. 정훈은 전-애인을 사랑하지 않았다. 6개월 후 전-애인의 남편인 자신의 선배의 장례식장에 가기 위해 옷을 차려 입는 장면에서 자신의 섹시함을 맘껏 뽐내며 자아도취에 빠져 있었던 것도 이를 입증한다.
반면 시후는 남자에게 몸 뺏기고 마음 뺏기고 전세금까지 뺏긴 철저한 루저이다. 절망스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그녀의 몸부림은 정훈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으로 나아가지만, 그들의 만남이 ‘우연인지 인연인지 실험하자’는 정훈의 제안으로 또 한 번 거절의 맛을 본 셈이다. 시후의 거듭된 좌절은 자신의 성적 매력을 남자에게, 심지어 낯선 남자에게 확인받고 싶어 하는 어리석음 때문이다. 그녀가 벌인 자살 소동이나 앙탈, 애교가 모두 자신의 성적 매력을 확인받기 위한 제스처에 불과한데, 이 연극이 시후의 제스처에 상당부분 의존함으로써 연극의 전체 품격을 떨어뜨렸다.
그녀는 끝까지 루저로 남는다. 그녀가 장례식장에서 만난 정훈의 구애로 끝내 정훈과 연인이 되는 것은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다. 이 결말은 시후의 승리가 아니라 정훈의 승리이다. 시후는 정훈과 헤어져 지낸 시간 동안 그를 간절히 원했던 것도 아니었고, 전-애인의 장례식에서 급작스럽게 벌인 정훈의 구애가 내키지도 않았었다. 신통치 않은 그녀에게 정훈 말고는 별다른 선택이 없기 때문에 그의 품에 안긴 것뿐이다. 이처럼 어리석은 선택을 ‘로맨스’라고 부르겠다면 이는 사랑에 대한 모독이다.    

2009년 한국일보 신출문예 당선작이라는 기대감이 문제였을까? 2인극이 주는 밀도 높은 심리전을 기대했기 때문일까? <극적인 하룻밤>의 시후라는 여자 주인공의 성격과 의도가 보강되지 않는다면 이 연극은 젊은 남녀의 좌절과 다시 시작되는 사랑을 깊이있게 보여주지 못한, 한 귀여운 한 여자 아이의 애교와 앙탈만 보여줄 뿐인 그저 그런 시트콤 드라마 수준에 머물 것이다.

박연숙 철학박사, 숭실대학교 베어드 학부대학 조교수
feelogo@naver.com

 

21세기 악의 꽃: 루시드 드림

극작: 차근호
연출: 김광보
극단: 극단 청우
상연일시: 2011.1.29-2011.2.13
상연장소: 정보소극장
관극일시: 2011.2.11. 20:00

21세기 악의 꽃: 루시드 드림

보들레르는 자신의 시집 악의 꽃을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담아 놓은 사전”이라 평했다.

                                                                               백승무(연극평론가, 서울대 강사)

루시드 드림은 강력하다. 최근 이처럼 실팍한 서사의 맷집과 장건한 인문학적 근육을 겸비한 희곡은 없었다. 1997년 등단 이후 다양한 색채의 희곡과 여러 장르(뮤지컬, 각색, 번안)의 글쓰기를 선보였을 뿐만 아니라, 연출과 극단운영까지 활동범위를 넓힌 차근호는 루시드 드림을 통해 숲을 보며 나무까지 조망하는 박이정(博而精)의 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숲으로 활동반경을 확장하면서도 자신의 전공인 극작이라는 나무를 소홀히 하지 않은 것이다. 소홀은커녕 숲의 영양과 소통하면서 공생 성장하는 우람찬 나무의 기상을 과시했다. 이 작품은, 감히 단언컨대, 차근호의 15년 필력(筆曆)을 이전과 이후로 분절하는 표석이 될 것이다. 이 한 편의 희곡이 차근호 작품세계의 수위와 향후 예정작에 대한 기대치를 상향시켰다는 점에서 루시드 드림은 작가 자신뿐만 아니라 한국 연극계에도 혁혁(奕奕)한 축복이다.

운명의 시계공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태초의 혼돈에서 가이아(땅)가 나오고 그 가이아로부터 우라노스(하늘)가 나온다. 이 둘의 결합으로 크로노스가 탄생하는데, 우라노스의 폭력을 견디다 못한 가이아는 아들 크로노스를 사주하여 우라노스를 제거한다. 크로노스는 낫(스퀴테)으로 아버지 우라노스를 죽이고 지배자가 된다. 누이 레아와 결혼한 크로노스는 제 자식에 의해 권력을 찬탈 당한다는 신탁 때문에 태어난 아이들을 마구 삼켜버린다. 레아의 기지로 겨우 목숨을 구한 막내아들 제우스는 구토제로 아버지를 제압하고 제왕의 자리에 오른다.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 또한 아들에 의해서 제거당하는 크로노스는 탄생한 모든 것이 결국 죽음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시간의 속성을 상징한다. 유럽의 명화나 조각에서 낫과 모래시계를 들고 등장하는 이 기구한 팔자의 사내 크로노스. 거역할 수 없는 인간의 필멸성을 상기시키는 치밀한 운명의 시계공 크로노스. 그의 삶 자체가 이것을 증명했거니와, 그가 삼켰던 자식들, 세상의 빛을 보자마자 다시 죽음의 어둠으로 내몰린 그 자식들도 결국 영원한 생명의 순환을 암시하는 알레고리였던 것이다. 운명 자체보다는 회피할 수 없는 운명의 형식을 준엄하게 고지하는 이 크로노스의 이미지는 폭행, 살인, 분열 등 루시드 드림의 키워드들과 묘하게 공명한다.

불안과 우울의 징후
묻지마 살인으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몇몇 사이코패스의 충격적 엽기행각이 아직도 기억에 선연한 이 마당에 총 17명(13+2+2)의 살해행위가 언급되고 있는 루시드 드림를 앞에 두고 우리가 고전으로 추앙하는 그리스 신화의 창세기를 읊조리는 것은 폭력적 부권과 친부살해, 무자비함 등에 있어서 이들 간의 연관성을 백분 인정한다하더라도 마뜩찮기 마련이다. 게다가 루시드 드림이 현대인의 정체성 상실, 대중 속의 고독, 가족 붕괴, 가정 폭력, 사법제도 모순 등 철학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주제를 배면에 포진시켰다하더라도, 사이코패스의 살인놀이라는 소재의 자극성과 충격성을 모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시드 드림은 10년이 조금 지난 21세기 초반부의 위태로운 지경을 선명하게 포착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즉 뉴밀레니엄의 호들갑 이면에 숨겨진 세기말의 불안감과 공포심리가 타다만 재처럼 깊은 음영을 드리우는 세기초의 기괴한 정신병리적 징후를 탄탄한 서사력과 조밀한 심리묘사로 옹골지게 드러냈다는 것이다. 연쇄살인범의 범행동기를 추적하면서도 단순히 사이코패스의 범죄심리학에만 머무는 것도 아니고, 왜곡되고 굴절된 인간의 정체성과 주체의 분열을 그려내면서도 경악과 광란이 지배하는 표현주의적 색소는 말끔히 세탁되어 있다. 위악과 패륜이 과도하지만 인간본성에 대한 충실한 추궁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사회적 병리에 대한 냉소가 비등하지만 섣부른 교훈극의 엄숙과 훈계도 피해간다.

레미니상스의 지문들
루시드 드림이 최근의 창작극들이 의연히 산화했던 그 많은 오류의 지뢰밭을 교묘히 피해가며 대중과 평단의 애정을 만끽할 수 있었던 동력은 소재와 주제 곳곳에 묻어 있는 다양한 문학적, 철학적 차용(reminiscence)에 있다. 크로노스와 오이디푸스에 대한 신화는 말할 것도 없고, 루시드 드림이 뼈대를 빌리고 있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친부살해 모티프로 인간구원의 문제까지 다가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여기서 받은 영감으로 자신의 사상을 압축하여 저술한 프로이트의 도스토옙스키와 친부살해, 그리고 도스토옙스키 문학의 레테르인 분신의 현상학까지. 여기에 인간 정신을 이드와 에고의 충돌로 파악한 프로이트의 분석과 인간의 기억이 왜곡과 허위로 재구성된 조작이라는 ‘억압된 기억’에 대한 정신분석학의 증명들도 가세한다. 가히 레미니상스의 진열장이라 부를만하다. 이처럼 루시드 드림은 19세기 윤리적 인간론의 뼈대에 20세기 사상으로 살을 붙여 21세기형 상상력을 배태하고 있다. 이런 다양하고 풍성한 차용의 계보가 그려내는 위악적 욕망의 지형도가 루시드 드림이 관객과 함께 향유하는 내밀한 광장이다.

이상과 폐허
루시드 드림은 일단 재미있다. 이념의 해체 이후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추리문학의 규범을 따르면서도 장르를 초월하는 다층적 문제의식이 관객의 심리를 휘저어 놓는다 범죄심리물의 스릴러와 관능적인 섹스 씬, 분열된 주체의 역할놀이, 관객의 지성을 교란하는 연이은 반전만으로도 숨이 차고 살이 저리다. 무엇보다 관객의 가슴을 오그라들게 쥐어짜는 것은 작품을 관통하는 악마적 살인 욕망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다. 내 운명에 살인이 허락되었는가? 13명을 연쇄살해한 추악한 괴물 이동원은 스스로 던진 이 질문에 ‘운명에 의한 예정된 결말’이라는 답을 제시한다. 한 손에는 도끼를, 한 손에는 시계를 들고 자신의 운명을 짜 맞추는 저승사자 이동원에게 살인은 해체된 시계를 조립하는 유희와도 같다. 자신에게 피를 뿌릴 권리가 있는지 시험하는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가 인류의 행복이라는 망상을 위해 전당포 노파와 리자베타를 살해하는데 반해, 이동원은 살인행위가 주는 극적인 쾌감만을 위해 사람을 죽인다. 자기파괴에 기반한 이동원의 극악한 방종은 자신의 고상한 이념을 위해서라면 살인쯤은 사소한 패악에 불과하다는 라스콜니코프의 궤변을 흉내 내고 있지만, 실상은 인류구원의 이념이 탈수된 만용의 찌꺼기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이동원은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이반의 분신 스메르댜코프(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게 더 가깝다. 특히 이동원이 사이코패스의 공통적 증상인 성적 우월감에 대한 집착 없이 순수한(?) 살인욕망에 경도된 면모를 보이는 것은 사생아 스메르댜코프가 아버지 표도르의 육욕에 대한 저주로 지독한 금욕주의를 표방하는 것과 한 맥락이다(그가 입고 다니는 흰 셔츠와 흰 타이즈는 금욕과 거세를 주장하는 신비주의 종파인 ‘비둘기파’의 상징이다). 반면 이동원을 분신으로 둔 최현석 변호사가 장남 드미트리처럼 방탕한 육욕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것도 이 맥락에서 그리 멀지 않다. ‘숭고한 이상과 추악한 탐욕’ 사이의 멀고도 깊은 진폭을 경험하고자 한 드미트리처럼 최현석이 타락한 변호사와 고상한 지식인 사이를 오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도스토옙스키가 욕망의 파괴성과 무신론의 절망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제시한 알료사는 어디에 있는가.

서사의 계보
이동원이 교묘한 지능게임의 승자로 판명 나고, 완전범죄를 저지른 최현석이 출세가도를 질주할 때, 그리고 무엇보다 구원의 소피아인 소냐가 ‘그냥 더러운 창녀’일 뿐이라면, 작가가 남긴 것은,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이 참혹한 몰락 앞에서 우리는 어떤 포즈를 취할 것인가. 연극적 유희가 세간의 윤리를 등지고 선다면, 비록 호평은 받을지언정 결코 호감은 기대할 수 없다. 다시 묻겠다. ‘세상을 다 알아버린 자’, ‘자기에게 살인이 허락되는지 알고 있었던 자’ 최현석의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신호등도 없고, 차선도 없고, 중앙선도, 횡단보도도” 없는 이 막막한 좌절감을 수습하기 위해 다시 도스토옙스키에게로 돌아가자. 라스콜니코프가 노파를 내리찍은 도끼는 19세기 사회악에 대한 자기 입법권, 사적 처벌권(lynch)의 상징이다. 가난한 자의 등골을 빼먹는 탐욕스러운 고리업자를 척결하려는 그의 용단은 ‘복수는 내게 있으니 내가 이를 행하리라’(로마서 12:19)는 톨스토이적 훈화와는 정반대의 길이다. 라스콜니코프에게 살인행위는 세계악을 일소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처벌권이 자신에게 있는지 확인하는 절차이다. 메시아 콤플렉스의 전형이지만, 그의 순수한 동기는 구원의 맹아가 되었다. 하지만 이동원에게 살인심리에는 선악의 대립도, 범인과 초인의 갈등도 부재한다. 동기가 비어있다. 그는 애초에 결핍의 인간이다. 정상적인 인간관계도, 그 관계의 따뜻함도 기대하지 않는다. 받고 주는 메커니즘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죄의식과 가정 폭력으로 인해 분노와 적의로 수렴된 자의식의 과잉이 있을 뿐이다. 2만권이 넘는 책을 읽고 라틴어를 구사할 줄 아는 천재지만, 그는 구원의 주체가 아니라, 구원의 대상에 불과하다.
이동원의 살인충동에는 친부살해 테마를 이용하는 서사가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세대교체의 원초적 순리도 부재한다. 프로이트가 구세대를 척결하고 새로운 질서를 선포하는 일종의 마니페스토로 순화시킨 친부살해의식은 인간의 생사도 결국 자연의 일부인바, 세대교차라는 거대한 우주적 순환을 통해 문명의 태동을 설명하는 하나의 가설적 원리이다. 이동원과 최현석에게 친부살해는 동물적 공격성이 정당방위 형식으로 발현된 복수의 심리극일 뿐이다. 법의 원리와 금지의 명령을 상징하는 아버지(의 이름)의 죽음은 도덕원칙을 담당하는 슈퍼에고의 상실과도 같다. 최현석(에고)과 이동원(리비도)의 대립을 통제하는 억압기제의 상실이 연쇄살인의 무한 질주로 귀결되는 것은 자명하다.
이동원과 그의 샴쌍둥이 최현석의 패악심리에 부재하는 또 한 가지. 타자에 대한 호기심이 자기동일성의 파괴로 종결되는 순간, 최현석은 반성하지 않는다. 운명에 대한 처절한 환멸이 찾아오지만 그는 자기처벌을 감행하지 않는다. 그 기회는 이미 김선규 선배에게 빼앗긴 후다. 여기가 자신의 가려진 정체와 패륜 행위를 발견하고 탈속적 고행에 투신하는 오이디푸스 서사와 갈라지는 지점이다.

소외하는 자, 소외당한다.
결론으로 넘어가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할 사족 하나. 작가가 이동원의 사형선고를 무기징역으로 감면시키기 위해 설정한 에피소드, 즉 강박사가 이동원에게 정신질환 소견을 피력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설명하는 장면은 최근의 ‘김길태 사건’을 선견하는 것 같아 반전의 묘미를 넘어서는 작가의 예지력을 맛보게 해준다. 강박사가 이동원을 미치광이로 만들어야 하는 근거는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설파한 논리를 본뜨고 있다. 푸코가 지적한 것처럼 광기에 반하는 정상이란 평균과 다수, 상식을 가리키는 말이지 결코 옳음, 정당, 진리를 함유한 개념이 아니다. 광기의 정의는 ‘비정상’이고, 정상의 정의는 ‘광기없음’이라는 순환논리의 오류가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광인을 계속 정상의 영역 밖으로 밀어내야 하는데, 그것이 정상인들의 생존법이기 때문이다. 광인을 타자화하는 소외전략은 타자를 점령하고 강금하고 배제시키기 위한 이념적 허구에 불과하다. 그것이 기독교가 이슬람에 행하는 방식이며, 강대국이 약소국에, 다수의 이성애자가 소수의 동성애자에게 행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광인이란 정상인이 광인이 아니라는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감옥이 우리가 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회 전체가 거대한 감옥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과 같다. 광인과 죄인을 강금하여 정상인을 보호한다는 논리는 국가가 개인을 통제하고 불온세력을 폭력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공권력을 승인받는 공식적 방편이다.
지옥이 천국에 가야하는 동기의식을 고취시키는 기제로 작동하는 것도 같은 원리다. 지옥이 없다면 천국도 없다. 이동원이 묻는다. “목사님은 정말 지옥에 가셨을까요?” 최현석이 답한다. “정말 지옥이 있다면 이런 사람을 위해 만들었을 거예요. 어쩌면 진짜 지옥에 갔을지도 모르죠.” 다시 어린 최현석이 자신이 죽인 아버지가 지옥에 갔을지 묻는다. 마담이 답한다. “맞아. 그 사람 지옥에 갔을 거야. 지옥은 그런 사람을 위해 만든 거야.” 정상과 광기의 양분화가 체제의 건전성을 과시하고 권력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듯이, 천당과 지옥의 이분법도 악을 응징함으로서 자신이 선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자기기만과 동종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신지옥을 외치며 폭력과 강권으로 자식을 위협하는 두 목사 아버지나, 자신의 살인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들을 지옥으로 보내야했던(?) 두 아들은 결국 동일한 이분법의 논리로 치킨 게임을 벌인 셈이다. 우리가 이동원을 미치광이로 만들어야 하는 것도 그 ‘동일한 이분법의 논리’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논리게임에서 공범자임이 분명하다.

불경스러운 아름다움
그렇다. 이제 최현석의 구원에 대해서 미뤄오던 답을 할 차례다. 선악을 가르는 진리도, 보편윤리에 따른 자기정화도, 세속적 사법 정의도 작동 중지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거부할 수 없는 공범의식에 빠진다. 누구나 한번쯤 가져본 “생각 속에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 길거리에 휴지를 버리거나, 담벼락 꽃을 몰래 꺾을 때, 혹은 교통신호를 어기고 무단횡단 할 때, 내 속에서 나의 위선과 뻔뻔함을 조롱하는 쪼그만 새끼 악마의 키득거림을 들은 적 없는가.
물론 루시드 드림은 조무래기 악들은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악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우리가 사이코패스(반사회적 인격장애)라 이름붙인 자들의 심리적 고착과 극악한 만행을 다룬다. 공공의 적, 살인의 추억, 조용한 세상, 검은 집, 우리 동네, 추격자, 악마를 보았다 등 영화 속에서는 물론 실제 삶에서도 종종 목격하게 되는 이 사이코패스는 결국 우리 사회가 낳은 괴물이고, 이들의 극악성은 우리 사회의 오염과 타락에 비례한다. 사이코패스를 정의해보자. 호감 가는 외모에 능란한 말재간과 뛰어난 지능을 지닌 자이나 자신의 이익과 쾌락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부족하며, 자기중심적이고 타인을 사랑할 수 없고, 잘못을 후회하거나 죄책감을 갖지 않고, 부적절한 반사회적 행동을 일삼는 자이다. 뭔가 이상하지 않는가. 이들은 우리가 좋아라 즐기던 막장드라마에서 매일 같이 나오던 그런 인간 부류 아닌가. 당장 신문 사회면을 펴보든지 9시 뉴스라도 보라. 물질과 탐욕의 노예가 되어 자신도, 가정도, 이웃도 내팽개치는 수많은 작은 악마들의 난장판이 보이지 않는가. 13명을 죽인 이동원도 사이코패스지만, 수조원대의 편법상속을 저지르는 파렴치한 부자들, 수천만 국민을 기만하고 배신하는 정치인들, 제 잇속 챙기기에만 골몰하는 뻔뻔한 종교인들도 피해강도 면에서는 더 위악적인 사이코패스이다.
결국 사이코패스는 내 속의 악이, 우리 사회의 악이 육화된 인격이다. 우리가 저지른 무관심과 이기심의 폭력에 고통 받는 아픈 영혼이다. 사회 정의와 복지, 평등의 그물코로도 건져 올리지 못한 소외된 운명들이다. 생산성 중독과 무한경쟁의 악다구니 속에서 버려지고 잊혀진 상처받은 내면들이다. 물질과 속도만 추종해온 우리의 속물성이 뼈와 살을 대준 이 외로운 프랑켄슈타인은 결코 배재와 이격으로는 치유되지 않는 우리 사회의 통증이다. 그래서 루시드 드림은 세상에서 가장 아픈 고통의 목록이다. 사이코패스의 무차별적 살인놀이은 그저 자연재해처럼 복불복으로 받아들일 일이 아니다. 최현석의 구원이 곧 우리의 구원이다.
우리는 모두 최현석의 분신이며, 우리 내부에는 또 하나의 최현석이 거주한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최현석과 공범자다. 우리도, 자기 자신도 결국 최현석이라는 고백이 작가 차근호의 마지막 말이다. 세련됐지만 짝퉁인 훈계보다 비참하지만 진실한 고백이 더 아름답다. 치명적인 아름다움, 악의 꽃. 작가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고, 연극이 도달한 막다른 길도 바로 이 부근이다. 부족하다면 죄와 벌을 다시 펴드는 수밖에.

 

민들레 바람 되어

극작: 박춘근
연출: 김낙형
극단: 연극열전
상연일시: 2011.01.21 ~ 2011.02.22
상연장소: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관극일시: 2011.2.8

연극열전 박춘근 작 김낙형 연출의 <민들레 바람 되어>를 보고

            박정기(극작가/연출가, 2010년 한국희곡문학상 심사위원장) pig5134@naver.com

2월 8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연극열전 박춘근 작 김낙형 연출의 <민들레 바람 되어>를 관람했다.
박춘근은 2010년 화동연우회에서 공연한 윌리암 세익스피어 원작 김광림 연출의 <페리클리즈>를 각색해, 원작에 등장하는 노시인역의 음유시인을 임진택의 판소리 해설로 재구성해 관객의 공감대를 형성했고, 극단 우투리의 김광림 작 연출의 <리회장 시해사건>의 드라머터그를 하는 등 그 작품 활동이 기대되는 작가다.
<민들레 바람 되어>는 한적하고 아름다운 공원묘지에 안장된 젊은 시절의 부인의 묘소를 찾은 한 남자의 넋두리 같은 추모의 정에서 연극이 출발한다.
고인이 된 부인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남편과 대화를 나누고, 상석에 술을 잔에 따르고 절을 하듯, 죽은 아내와 대작을 하며, 지나간 일, 자식의 현재, 그리고 재혼한 부인과의 일상까지 남편은 마치 살아있는 부인에게 이야기하듯 묘소에 대고 이야기를 한다. 물론 무덤속의 아내는 의자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가끔 일어서기도 하면서, 아름다운 꽃을 들고 온 남편에게 감사를 표하고 향기도 맡는다.
젊은 부인의 묘와 가까운 거리에 묻힌 묘지에 안장된 노부인도 함께 등장해
젊은 부인과 대화도 나누고, 젊은 부인의 노래도 들으며, 노부인의 남편의 방문과 노부부의 익살로 객석이 온통 웃음바다로 변하기도 한다.
어찌 남편이 작고한 부인 앞에서 진실 아닌 이야기를 할 수 있으랴? 행여 부인이 알아듣지 못할세라 열변을 토하고, 눈물을 뿌리기도 하면서, 부인의 처절한 답변을 마음으로 듣기도 한다.
노부인의 무덤을 찾던 노신사도 결국은 죽어 부인 곁에 합장이 되고, 30년을 한 결 같이 죽은 부인의 묘역을 방문하던 애처가인 남편은 노인의 모습이 되어 찾아와 죽은 부인과의 마지막 포옹과 함께 숨을 거둔다.
묘역에 만개한 민들레와 그 씨앗이 송이송이 바람이 되어 관객의 가슴깊이
날아드는 듯한 느낌의 대단원을 맞으면서, 관객 모두는 부부와 가족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돌이켜보고, 반성을 하게 되는 감동적인 연극이었다.
부부싸움이 잦거나 부부간의 갈등이 심한 부부는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하는 <민들레 바람 되어>를 꼭 관람하도록 권하고 싶은 연극이다.

 

게르니카

극작:
연출: 유홍영
극단: 마임공작소 판
상연일시: 2011.02.08 ~ 2011.02.27
상연장소: 삼일로 창고극장
관극일시: 2011.2.13

마임공작소 판의 이미지 극 유홍영 구성 연출의 <게르니카>를 보고

            박정기(극작가/연출가, 2010년 한국희곡문학상 심사위원장) pig5134@naver.com

2월13일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마임공작소 판의 이미지극 유홍영 구성 연출의 <게르니카>를 관람했다
<게르니카>는 20세기 회화 최대걸작으로 파블로 피카소에 의해 그려진 유화다. 1937년 에스파냐(영어로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 정권을 지원하던 나치 독일의 비행기가, 민주화 투쟁을 벌이던 에스파냐의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를 공습해 2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마을이 파괴되자,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피키소가, 같은 해 개최된 파리 만국박람회 에스파냐관의 벽면에, 공습의 참화로 살상된 민간인과 가축 그리고 붕괴된 건물을 가로 776cm 세로349cm의 화폭에, 민중의 분노와 절규, 상처 입은 말, 피카소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에스파냐 특유의 투우 그리고 아기와 함께 절규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기하학적 도형과 배치로 흑과 백 그리고 황토색만으로 1개월 반 만에 그려내어 에스파냐 관에 전시하자, <게르니카>는 당시 전 세계에 충격을 던진 작품이 되었다.
파블로 피카소의 유언에 따라, 에스파냐가 민주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뉴욕의 근대미술관에 보관되었다가, 1981년에 에스파냐 쏘피아 미술센터에 전시되어 자리를 잡을 때까지 <게르니카>는 44년간을 해외에 보관 전시된 작품이다.
이번 마임공작소 판의 단원들이 <게르니카>를 실제 크기대로 제작해 무대에 장치로 세우고, <게르니카>의 소재가 된 역사적 배경에서부터 비행기 폭격장면과 아비규환 속에서의 사람들의 모습, 참화 속에서 아기를 출산하는 여인들의 고통, 말과 말을 찍어 누르는 은색의 파편, 도시를 감싼 검은 구름과 그 속에서 태어난 아기들 그리고 거대한 공습과 폭탄투하의 영상 그리고 대단원에서 검은 구름의 장막위에 피어난 흰 생명의 꽃 등 파블로 피카소의 분노보다도 더 절실하고 처절한 상황으로, 온몸과 혼신의 열정을 다해 표현되었고, 이경열, 한철훈, 윤태영, 최성재, 김설, 이해나 등 여섯명의 마임이스트의 열연이 유홍영의 발군의 연출력과 혼연일체가 되어 근래 보기 드문 걸작 마임 이미지 극 <게르니카>를 탄생시켰다.
채희준의 음악과 무대와 설치의 이진, 선우용, 박성훈, 박태경, 조성미 그리고 영상의 이종희, 조명의 이나구, 김동훈, 박석광, 신유진, 박준범과 연습일지를 정성스레 기록한 조연출 윤진아의 세심함에 이르기까지 스텝진의 노력의 성과가 <게르니카>의 공연을 성공으로 이끌었고, 그 예술적 표현 하나하나가 필자의 가슴에 따뜻하게 다가와 남는다.
마임공작소 판의 이미지 극 <게르니카> 공연을 축하하고, 차기 작품에도 기대를 한다.

 

조용한 식탁

극작: 한윤섭
연출: 김도훈
극단: 뿌리
상연일시: 2011.02.15 ~ 2011.02.27
상연장소: 대학로 예술극장 3관
관극일시: 2011.2.22

대학로 예술극장 3관에서 극단 뿌리의 한윤섭 작 김도훈 연출의 <조용한 식탁>을 보고


            박정기(극작가/연출가, 2010년 한국희곡문학상 심사위원장) pig5134@naver.com

2월 22일 대학로 예술극장 3관에서 극단 뿌리의 한윤섭 작 김도훈 연출의 <조용한 식탁>을 관람했다.
<조용한 식탁>은 2010년에 소극장 혜화동1번지에서 초연되었고, 이번에 대학로 예술극장3관에서 재공연 된 작품으로, 소극장에서 보다 이번 중 극장에서의 공연이 내용면에서나 전달 면에서 성공적인 공연이 되었다.
한윤섭의 <조용한 식탁>은 아버지의 새 여인이자 아들에게는 새 어머니가 될 미모 여인과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로, 10년 전 아들이 아버지의 현금카드로 성매매를 했던 여인이 10년 후, 아버지의 새 결혼상대로 등장하면서 아들은 차츰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카드의 사용처와 매음행위의 상대가 아버지의 새 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 사실을 발설할 수 없는 입장이고, 여인도 자신이 홍등가에서 성매매를 할 당시 처음으로 자신과 성 접촉을 한 순진무구했던 청년이 결혼상대자의 아들임을 알게 되지만, 여인역시 그 사실을 발설할 수 없는 입장에 놓인다. 아버지 역시 카드의 사용처가 홍등가임을 알고 사실 확인 차 사창가를 방문했던 사실과 성매매 상대여인이 성접촉을 거부해, 포주로부터 구타를 당하는 여인이 바로 결혼 상대자임을 알게되지만, 아버지 역시 그 사실을 발설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집에서 식탁을 사이에 둔 세 사람이, 격렬한 심적 갈등상황과 난처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세 사람 다 감정의 표출을 자제하고, 억제와 극기로 일관하며 1시간 30분간 관객을 팽팽한 긴장감 속에 연극 속으로 몰입시킨다.
세 명의 연기자, 아버지 역의 한기중과 아들역의 민준호 그리고 여인역의 박리디아는 세밀한 감정까지 객석에 전달시키는 세련된 연기를 보였고, 한기중은 대사 한마디,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 걸음걸이에 이르기까지 내면까지 전달시키는 대사처리와 무용가의 춤사위를 능가하는 절도 있고 우아한 동작의 세련된 연기를 보였으며, 민준호는 부친인 원로 연기자 민지환 선생을 빼어다 밖은 듯한 모습과, 발군의 기량을 갖춘 연기력으로, 발전적인 장래를 예측 할 수 있었다.
박리디아는 2월 초, 충무로에 개관한 카페 <무비하우스>에서 루실 프레처의 미스테리 스릴러 <전화 잘못 걸렸습니다>를 모노드라마로 공연했는데, 좌중의 관객에게 찰나의 유예조차 주지 않는 열연으로 관객을 극 속에 몰입시켰다. 특히 박리디아는 미스테리 스릴러 영화 <가스등>의 잉그릿 버그만이나, <환상>의 킴노박에 대비되는 모습과 연기로,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이번 <조용한 식탁>에서도 영화 <모정>의 제니퍼 존스를 연상시키는 미모와 기량으로, 다가올 <박리디아 시대>를 예견케 했다.
올드 팬의 뇌리에 남아있는 음악 <쿠쿠루크크 팔로마>의 애잔하고 처연한 멜로디가 이 연극에서 관객을 끝없는 상념의 세계로 이끌어 갔고, 적절한 조명과 무대미술이 조화를 이루어 김도훈의 연출대가로서의 장인정신을 100%살려 <조용한 식탁>을 품위 있고 격조 높은 연극으로 만들었다.  
극단 뿌리와 한윤섭 작가의 다음 작품에 기대를 한다.

 

유리알 눈

극작: 미셀 마크 부샤르

번역: 임혜경
연출: 까띠 라뺑
극단: 프랑코포니
상연일시: 2011.02.23 ~ 2011.03.13
상연장소: 산울림 소극장
관극일시: 2011.2.28


극단 <프랑코포니>의 미셸 마크 부샤르(Michel Marc Bouchard) 작 임혜경 역
까띠 라팽(Cathy Rapin) 연출의 <유리알 눈(Des yeux de verre)>을 보고

            박정기(극작가/연출가, 2010년 한국희곡문학상 심사위원장) pig5134@naver.com

2월 28일 소극장 산울림에서 극단 <프랑코포니>의 미셸 마크 부샤르 작 임혜경 역 까띠 라팽 연출의 유리알 눈을 관람했다.
미셸 마크 부샤르는 캐나다에서 불어를 사용하는 퀘벡지역출신 작가로 2009년에는 우석레퍼토리극장에서 2010년에는 혜화동 게릴라소극장에서 <고아 뮤즈들>을 까띠 라팽의 연출로 공연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고, <유리알 눈>은 2009년에 발표해, 동일한 연출에 의해 2011년 들어 산울림소극장에서 첫 번째로 공연된 작품이다.
번역을 한 숙대 불문과의 임혜경 교수는 최인훈, 이근삼, 박조열, 윤대성, 오태석, 이현화, 이강백, 이윤택의 희곡을 불역해, 프랑스에 소개한 극단 <프랑코포니>의 대표로 우리 연극계의 보배다.
연출을 한 까띠 라팽은 외국어대 불어과 교수로 미셸 마크 부샤르의 <고아 뮤즈들> 이오네스코의 <왕은 죽어가다> 쏘니 라부탄지의 <파리떼 거리>를 연출했다.
<유리알 눈>은 인형 제작을 하는 아버지가 인형에 만들어 넣는 눈을 의미한다. 평생 인형제작에만 몰두하는 아버지를 두 딸은 어릴 때부터 경쟁하듯 사랑하고, 성장하면서도 어머니보다도 더 아버지를 독점하려는, 세상 어디에서건 흔히 볼 수 있는 아빠사랑을, 이 연극에서는 딸들의 아빠에 대한 과잉사랑으로 비극적 결말을 초래하게 된다.
이 연극의 홍보인쇄물에는 아버지가 소녀인 딸을 추행한 것으로 소개가 되어 있어, 엽기적이고 외설적인 작품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으나, 우리나라 경우에 전철에서 노인이 옆에 앉은 초면의 소년에게 “부랄 좀 만져보자”하는 말은 노인들이 손자뻘 되는 어린아이에 대한 호감의 표시인데, 외국에서는 성 추행범으로 인식이 되니, 문화나 생활습관의 차이가 엄청난 사태를 야기할 수 있음을 이 연극에서 감지할 수 있다. 어쨌건 아비의 딸에 대한 성추행으로 가출을 했던 막내가 성장을 해 인형 취재기자로 변신을 해 귀가를 하게 되고, 첫째 딸은 어려서부터 성장을 한 현재까지 어미 대신 아비 품에서 자기를 고집하는 이상성격과 기벽을 가진 딸이고, 어미는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도외시한 채, 남편의 인형제작과 홍보에 앞장을 설 뿐 가정이나 가사 일에는 일체 무관심하다. 막내의 귀가로 첫째 딸은 아비 품에서 떨어져 멀리 떠나게 되는 것이 두렵고도 싫고, 막내는 어미의 남편에 대한 신뢰나 무관심을 시험하듯 옛 버릇대로 아비 앞에 전라의 모습을 재현함으로써, 어미의 분노를 사, 결국 어미에게 살해를 당하게 되고, 집을 떠나려는 첫 째까지 어미에게 죽음을 당한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착한 가장들이 근자에 점점 기가 세어가는 여자들 틈바구니에서 기가 죽어가고, 그중에서도 “그저 눈퉁이가 밤퉁이가 아니 되기만 바라는” 연극인 남자동지들처럼, 이 연극에서 기가 센 여자 틈바구니에서 인형제작이외에는 무능한 아비가 가족의 비극을 대처하거나 해결하지 못한 채, 영원한 어미의 장신구 역할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며, 필자와 함께 관극을 한 원로 연극인은 깊은 공감과 함께 처연한 심사로 한숨을 내쉬며 귀가를 하게 된 그런 공연이었다.
이상구, 박현미, 김정은, 이서림 등 출연자들의 연기가 놀라울 정도로 출중했고, 김기영의 음악과 이유정의 음악보컬, 김정훈의 무대디자인과 이태원 김준환, 전성민의 무대제작, 공연화와 손정은의 조명, 임예진의 의상, 김선희의 분장, 이신혜의 자막에 이르기까지 까띠 라팽의 연출과 스탭진이 혼연일체가 되어 <유리알 눈>이라는 걸작연극을 탄생시켰다.

논단

  실기와 창의력

                                                                                               우 상전(연극배우)

               미술대학의 새바람

미술대학 입시에 새로운 바람이 부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단순히 손으로 ‘그리고 만들기’가 아닌 창의력과 잠재력, 학습능력과 개개인의 개성을 더 우선시하는 ‘비실기 전형’을 시도하고 있다고 한다.
실기시험을 완전히 없애고 내신과 수능, 자기 소개서나 내역을 중심으로 한 서류전형만으로 입시를 치르기도 한다고 한다. 물론 이를 시행하는 학교가 아직은 많지 않으나 미술대학의 발전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등장하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미 15년 전부터 소규모의 학교에서부터 시작해서 서서히 범위를 넓혀가고 있으며, 결과도 아주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입학 당시 실기 실력 못지않게 학생들의 다양한 경험과 폭넓은 이해력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미술대학도 연극대학처럼 학원에서 준비해 온 실기를 통하여 선발했는데, 이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생기기 시작해, 이제는 협소한 사고에 갇혀 새로운 창조의 무력함에서 탈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명문대로 꼽히는 홍익대 미대가 ‘비실기 전형’을 확대한다는 발표를 하게 됐다고 한다.
더욱 관심을 끄는 기사는 <지금 홍익대 미대에서는 지방에서 전혀 미술을 가르치는 교사가 없어 미술체험을 하지 못하는 고교생들을 위한 ‘미술 체험 캠프’를 열고 학생들에게 창의력을 자극하는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고 한다. 이 캠프에서 전국 163개 고교에서 학생 100명을 초청했는데 미술교사가 없는 학교의 학생들이었다고 한다. 한 학생은 “학원에서는 그리는 기법만 설명하는데 이곳에선 창의력을 일깨워주려는 것 같다”면서 “초등학교 이후 이런 미술수업은 처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는 이스라엘에서 온 설치미술가가 학생들에게 ‘즐기면서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강의를 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신문은 ‘고교연계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에 입학관리본부장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고교 교육이 바뀌어야 대학 입시가 달라진다. 미술교육에 소외된 지역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확대하겠다.”  (3월 1일자 중앙일보 20면)
홍대가 실기고사를 없애겠다고 하자, 주변의 학원들이 그렇다면 이에 맞는 ‘맞춤교육’을 자신들도 실시하겠고 흥분하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하여튼 당시에는 몹시 충격적이었고 그게 가능할까하는 생각도 했었다. 미술대학에서 ‘그리고 만드는 솜씨’를 따지지 않겠다는 게 정말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미술대학은 실기전형을 없애고 입학 후에 이를 보완할 ‘커리큘럼’을 짜는데 고심하고 있다고 한다. 또 이러한 ‘비실기 전형’이 일찍부터 재능을 갖춘 ‘그리기’에 천재적인 학생들을 오히려 ‘썩히는’ 결과를 가져 오지 않을까하는 우려까지 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어째든 이제는 이게 대세로 고정되어 가는 모양이다. 물론 현대미술이 ‘그리기’에 멈추지 않고 창의력이 더 소중해지는 미술계의 추세를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
내가 이에 관심을 갖는 것은 연극대학이야말로 미술대학보다도 더 ‘비실기 전형’과 창의력 교육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스마트폰 영화

얼마 전 베를린 영화제에서 스마트폰으로 만든 박찬욱감독의 단편영화가 대상을 수상해 화제가 되었다. 덩달아 이를 후원한 KT가 연일 광고로 이를 자축하고 있다. 이제는 이런 종류의 영화가 봇물을 이룰지도 모른다. 우선 제작비가 저렴하고 아마추어들도 손쉽게 가세할 수 있어 영화 제작과 흥행에 일대 파란을 예고하는 사건이 될 조짐이 인다.
이제 극장에 가서 구경하기보다는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만들어 지하철이나 사무실에서 ‘스마트폰’으로 자기들의 영화를 감상하는 시대가 도래 할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기존 개념의 감독과 배우의 기능에 새로운 변화가 야기될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데 언제까지 연극대학의 입시는 셰익스피어의 독백을 외우는 ‘말하기’에만 의존해야만 하는가를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장르의 변천

뮤지컬의 도약을 논할 때면 연극판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뮤지컬도 한물갔어, 흥행 안 되는 작품이 너무 많아” 그럼 나는 이렇게 묻고 싶어진다. “그럼 너는 연극이 흥행이 잘돼서 지금껏 연극을 하고 있니?” 장민호선생이 뮤지컬 배우였다면 지금도 뮤지컬을 하고 계실 것이다.
사실 새로운 장르의 출연은 모두가 다 연극의 영역을 축소하는 결과가 되어왔었음을 한국연극사가 말해주고 있다. 한때 엄청난 대중의 사랑을 받았었다고 말하는 창극을 하는 선배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판소리가 무너졌어요?” 판소리가 쇠퇴하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하지만 대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서양 서커스에 당했어!”
예술세계에서 장르의 몰락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더구나 과학의 발달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올지 예측이 불가능한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미술대학의 고민도 여기서 출발했을 것이다.
오래 전 학전의 김민기 대표가 친구인 음대교수에게 “뮤지컬 배우를 한번 길러보지?” 하고 권하자, “졸업 후에 중, 고교 음악교사를 원하지, 몇 명밖에 배출되지 않는 배우를 누가 하려고 하겠어!”
그나마 졸업 후에 학교 교사 자리도 없는 연극대학이 지금껏 버텨 온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아마 TV나 영화에서 스타를 꿈꾸는 욕망이 이를 지탱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연극대학의 현실

왜 아직껏 연극대학은 입시에서 ‘말하기’만을 고수하고 있는 걸까? 물론 요즘은 춤과 노래, 특기라 해서 첨가를 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도 길어야 3분 테스트에 그치고 만다. 이렇게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도 어느 대학도 창의력을 위한 전형에는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 것 같다.
미술대학마저 ‘그리기와 만들기’를 포기하면서까지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연극대학은 아직껏 ‘1분 독백’에 안주하고 있다. 또 부실한 학원교육에 흡족해 하고 있다. 왜 그럴까? 실체를 밝히자면 긴 글이 필요할 테니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자.

               ‘말하기’의 현실

나는 몇 년 전부터 입시에서의 ‘독백전형’를 폐기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우선은 3분 테스트로는 기량을 가려내기 힘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학원교육(예술고교 포함)’의 ‘말하기’가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대학에서 수업을 담당해 본 나로서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심각하다. 실상을 파악하고자 젊은 연극제에서 ‘독백대회’를 참관해 보기도 하고 직접 심사를 해보기도 했다.  
이제는 연극판도 젊은 연극친구들에 의한 일상성 연극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도 입시는 자기가 하는 대사의 뜻도 모른 채 외쳐대는 셰익스피어류의 독백이 판을 치고 있다. 그러니 이런 ‘말하기’를 해서 어느 곳에서 연기를 하려고 하는지 의구심마저 든다.
어느 해 연극배우들의 영화계 진출이 늘자 한겨레신문의 영화잡지 <씨네 21>이 특집을 실었는데, 오태석사단, 박근형사단, 한양레파토리를 영화배우를 배출하는 연극집단으로 꼽고 있었다. 특징은 창작극, 자연스러운 일상성 연기가 이런 결과를 내고 있다는 것을 연극인이라면 한눈에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연극판을 망치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도 대학은 여전히 구태의연한 ‘말하기’를 지속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런 현실이라면 학생들의 영상매체 진출조차도 ‘연극쪼’로 인해 어려워질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인데도 현재 대학은 아무런 변화도 모색하고 있지 않다.
차라리 이럴 바에는 입시에서 독백을 포기하고 미술대학처럼 창의력을 키우는 방식으로 입시를 바꾸고 ‘말하기’는 입학 후에 커리큘럼을 통해 학습시키는 게 더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싶다.
실제로 TV-PD출신 교수들은 오히려 연극의 연기전공자보다는 영화연출전공자가 더 연기자로서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입시(학원교육)를 통해 연기가 더 왜곡되고 있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대학과 학원이 짜고(?) 이를 방관하고 있다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은 게 현실이다.

               ‘창의성 전형’은 불가능한가?

현실이 이러하다면 입시에서 ‘말하기’ 전형을 포기하고 미술대학처럼 차원이 다른 변신을 시도해 보는 것은 어쩔지? 학원교육에 의존해서 행해지는 이런 방식의 ‘3분식 테스트’로 연기가 왜곡되고 있다면 미술대학처럼 창의성을 위한 전형이나 ‘고교연계교육’ 방식으로 바꾸어 보는 것은 어떨까? 명문대를 자처하는 대학들이 앞장서서 이런 변화를 시도해 본다면?
대학이 대중매체의 스타를 원한다면 차라리 ‘생김새’만으로 학생을 뽑든가하지 이도저도 아닌 현실이 안타깝다. 전혀 훈련이 없는 ‘아이돌 가수’도 연기가 가능하게 현실이지 않은가? 그렇지 않고 앞으로 변화된 세상에 잘 적응할 학생을 원한다면 창의성을 개발해 선발해보는 것은 어떨까? 물론 나의 이런 주장에 ‘대학본부나 교육부’에 핑계를 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국립극단도 단원제를 폐지했다. 이제 연극판에서 ‘안정된 직장’은 교수직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교수들이 나서서 연극의 장래를 위해 새로운 시도로 연극판의 분위기를 바꾸어 보는 게 어떨까?

정책기록실

 

  예술인 복지 법제화의 시급성과 당위성

 (2011년 3월 10일 국회 문광위 예술인 복지법 공청회 원고)


                                                             오세곤(순천향대학교 공연영상미디어학부 교수)

1. 예술인의 가치

예술인의 중요성은 예술의 가치로부터 나온다. 예술의 가치는 그것이 없을 때 우리 국가와 사회가 어떤 상태가 될지 생각하면 쉽게 드러난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이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였던 것 같다. 고구려 부흥 세력들은 국가 재건을 위하여 가장 먼저 예인과 장인을 챙겼고, 우리 역사상 최고의 국가 경영자였던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농업 발전을 위하여 수많은 과학 발명을 시도하는 외에 손수 기보법까지 창안해 가며 음악을 정리하였다. 예술을 문자나 과학기술과 함께 국가 경영의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예술의 가치를 본격적으로 따진 것이 이른바 몇 년 전 신조어로 나타난 기초예술이라는 단어이다. 기초란 모든 사물의 밑바탕을 의미한다. 기초학문과 기초산업과 기초사회가 그렇듯 기초예술도 국가와 사회를 떠받치는 주춧돌이다. 즉 기초예술은 단순히 응용예술, 실용예술, 상업예술 등의 대립개념이 아니라, 모든 사회와 문화의 상대적 개념으로서 국가의 존립기반이다.
기초예술은 한 사회공동체가 유지되는 문화적 토대가 된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모두 의식을 하건 안 하건 그 사회가 축적하고 생산한 문화 예술적 토양 속에서 하루하루 일상을 영위해간다. 그러니까 바로 일상적 삶의 질을 지정하는 것, 즉 우리가 얼마나 괜찮은 삶을 사는지의 기준이 바로 기초예술인 것이다.
또한 기초예술은 과학기술과 상호 보장 관계에 있다. 예술은 본성적으로 성공 확률이 낮다. 아니 낮아야 한다. 도자기를 깨는 도공의 장면을 생각해 보라. 자기 검열 기준이 까다로워 천개를 깨고 남은 단 하나의 작품조차 세상에 내놓기를 망설이는 도공과 자기 타당화가 심하여 웬만하면 다 작품이라고 내놓는 도공이 있다면 누구의 작품이 더 명품 가능성이 높겠는가?
이른바 ‘비효율의 효율성’이야말로 예술의 본성이다. 그렇게 거의 제로에 가까운 낮은 확률을 무릅쓰고 시도하는, 걸작을 향한 노력은 고도의 과학 기술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 된다. 더욱이 그렇게 개발된 고도의 기술로써 실현해야 할, 이른바 콘텐츠는 기초예술의 도움 없이는 결코 높은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
사실 기초예술은 기존의 표현인 순수예술과 내용상으로 별 차이가 없다. 본질이 같다면 명칭이 어떻든 그 중요성이 달라지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도 구태여 기초예술이라는 새 단어를 내세우게 된 것은 순수를 현실과 거리가 먼, 그래서 아예 신경을 안 쓰거나 가장 늦게 챙겨도 되는 사치품 정도로 여기는 무지함 때문이다.
상업예술은 그 표현부터 명백히 이윤 창출을 목표로 한다. 반면에 순수예술은 이윤 창출이 아닌 예술적 가치 실현, 즉 예술적 완성도와 예술적 성취를 목표로 한다. 그러나 이윤 창출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제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오해가 발생했고, 그것을 피하기 위하여 순수예술 대신 기초예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기초예술은 그 표현 자체에 경제적으로 또한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선언을 담고 있다. 그 표현은 예술은 순수해야 하므로 돈을 벌 필요가 없다거나, 배가 고파야 우수한 작품이 나온다는 식의 해괴한 논리를 단호히 거부한다. 더불어 가깝게는 인간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것으로부터 궁극적으로는 공동체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까지, 즉 사회적 내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확언한다.
사실 예술의 국가적 위상이 어때야 하는지는 명백하다. 이제 국가의 존립기반인 예술을 극빈생활조차 감내하는 몇몇 예술인들의 강한 의지나 인내력에만 의지하는 집단적 몰지각은 사라져야 한다. 국가 차원의 응급조치는 물론이고 종합적이면서도 세밀하고 유연한 예술 정책이 시급한 것은 그 때문인 바, 이 정책이 예술에 대한 지원 정책과 예술인에 대한 복지 정책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2. 예술인 복지의 의미

복지란 쉽게 행복의 보장을 뜻한다. 그렇다면 예술인의 행복이란 무엇일까? 예술인이란 대부분 스스로 좋아서 그 길을 가는 이들이다. 물론 어렸을 때 타의에 의해서 선택한 경우도 있겠지만 이후 보람과 즐거움이 없다면 결국 중단하거나 의미를 잃은 명맥 잇기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일단 예술인이라면 정신 부분의 행복은 확보 가능한 셈이다. 엄청난 양의 작업을 하며 왕성한 활동을 벌이는 예술인들이 일반 직장인과 달리 별도의 여가활동 없이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정신과 몸은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미친다. 즉 예술인에게도 먹고 사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며, 정신적 행복과 육체적 행복은 함께 가야 한다. 이에 대해 “배가 부르면 작품이 안 나온다.”느니 “배가 고파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느니 하는 말은 참으로 무책임하다. 아마도 국가와 사회가 책임질 일을 개인에게 전가하기 위해 지어낸 교묘한 말장난이거나, 예술인들 스스로 어차피 달라지지 않을 현실이니 마음이라도 편하고자 만들어낸 마음의 주문이 아닐까 한다.
물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며 훌륭한 작품을 내놓다가 유명해지고 경제적으로 윤택해진 이후 작품이 힘을 잃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인으로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정신적 나태의 문제이지 결코 모든 예술인에게 적용할 철칙은 아니다.
또 경제적 부분에는 아예 눈을 감은 채 주옥같은 작품을 지어낸 예술인들도 있다. 그러나 거부의 자제나 되면 모를까 십중팔구 그 예술인의 가족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었을 것이며, 가난의 대물림으로 자손들의 삶마저 비참한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모름지기 직업이란 그로써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그렇게 볼 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예술인은 제대로 된 직업이라 보기 어렵다. 직업의 가치를 철저히 돈으로 계산하는 보험사에서 예술인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보면 그것은 명확하다. 이에 단언하건대 예술인의 행복이란 작품 활동에서 오는 정신적 행복과 함께 자신과 가족의 경제적 삶의 유지를 바탕으로 하는 물리적 행복이 함께 해야 한다.
즉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필요하며, 그렇게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더라도 자신과 가족의 생계가 위협받지 않는다는 보장이 될 때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 물론 일반적으로 예술정책을 거론함에 있어 작품에 대한 부분은 주로 지원정책으로 분류하고 복지정책은 경제적 의미로 사용한다.
그래서 최근의 예술인복지 관련 법안들 모두 예술인의 범위와 함께 고용보험과 산재보험, 건강보험, 국민연금 등 주로 경제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기실 예술인에게 복지란 두 부분 모두 해당된다 하겠다.

3. 예술인 복지 논의의 현황

2005년 연극계는 연극인 복지재단을 출범시켰다. 국가가 뭔가 해 주기를 기다리다 못 해 직접 나서기로 한 것이다. 또 2007년에는 전문무용수지원센터도 출범하였다. 물론 아직은 두 단체의 사업 모두 본격적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소규모이지만 이런 움직임에 힘입어 예술인 복지에 대한 논의가 꾸준히 이어져 왔다. 여기에 최근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불행한 소식이 알려지면서 그 논의의 강도가 훨씬 강해진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예술인 복지와 관련하여 자주 떠오르는 키워드를 보면 ‘복지’와 함께 ‘공제회’ ‘보험’ ‘조합’ ‘재단’ 등이 있다. 이중 ‘복지’와 ‘보험’은 내용이고 ‘공제회’, ‘조합’, ‘재단’은 형식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떤 형식이건 추구하는 내용을 보면 거의 비슷하다. 즉 최소 4대 보험 가입을 보장하고 그에 더해 다른 직업군 수준의 추가적 사회 보장제도를 마련한다는 것이다.
사실 예술인 복지가 무엇인지는 명확하다. 처음 예술계에 진입할 때 부족한 힘을 어떻게 더해줄지, 진입 후 안정성이 떨어지는 것을 어떻게 보완할지, 활동 중 질병이나 부상에 대한 대책은 어떻게 세울지, 예술적 능력은 어떻게 유지하고 발전시킬지, 결혼과 자녀 양육 등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어떻게 유지할지, 노후 대책은 어떻게 세울지 등이다.  
이에 있어 통상 공제회는 상호부조의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예술인들에게 상호 부조를 할 만한 여유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물론 여기서 여유라 함은 실제 물리적 여유와 함께 그런 데 신경을 쓸 만한 정신적 여유까지 포함한다. 어쨌든 물리적이건 정신적이건 예술인들은 최소한의 삶을 영위하며 예술 행위를 이어나가기에도 벅찬 실정이다.
사실 상호부조의 개념은 조합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공동의 권익을 추구한다는 것이 조합의 성격이라 할 때 과연 예술인들에게 자신의 권익을 위해 노력할 만한 여유가 있을지 의문이다. 게다가 그렇게 조합을 이루어도 상대가 없거나 모호한 경우가 대부분이니 참으로 공허할 따름이다.
이에 비해 재단은 명칭에서는 그런 상호부조의 느낌은 없다. 그러나 역시 그것은 느낌일 뿐이고 똑같이 재단이라는 이름을 사용해도 그 내용이나 성격은 천차만별이다. 결국 어떤 경우이건 중요한 것은 공적 자금의 투입이다. 공적 지원을 근거로 설득하면 상호부조를 위해 회비를 내야 한다는 심적 부담도 상당히 줄일 수 있다.
이에 있어 지금까지 논의된 여러 방안들을 살펴보면 모두 공적 지원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를 위한 필수적 장치로 법의 제정을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설립된 주요 공제회들이 거의 법적 근거 위에 설립된 특수법인이며 모두 공적 자금의 지원을 받고 있음을 생각하면 충분히 근거가 있다.
4대 보험은 최소한의 안전장치이다. 그 가입을 위한 지원은 최우선 과제이다. 물론 건강보험은 대부분 가입이 되어 있다. 다만 거의 지역의보 가입자로서 경제적 정신적 여유의 결여로 말미암은 체납과 그에 따른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크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더욱이 국민연금은 아직 미가입상태가 많고 산재보험과 고용보험은 거의 해당되지 않는다. 애당초 고용의 개념조차 확립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서는 안정성 결여에 있어 비슷한 ‘건설근로자공제회’를 모델로 ‘문화예술인공제회’를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술인의 상황은 건설근로자보다 훨씬 더 열악하다. 즉 건설근로자에게는 사용자의 존재가 분명하고 따라서 공적 지원 외에 기금을 모을 방도가 있지만 예술인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한 개선을 위해 예술인들 스스로도 노력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표준계약서, 원천징수 등, 제도 자체를 대단히 쉬운 방식으로 마련하는 문제와, 그에 따르는 경제적 지출을 당연한 것으로, 즉 일종의 경직 경비로 간주하는 예술계의 풍토 확립이 포함될 것이다.
그러데 또 하나 어려운 문제가 있다. 바로 예술인의 범위이다. 한 장르에서 누구까지를 전문예술인 내지 직업예술인으로 볼 지, 또 어떤 종류의 활동까지 예술에 포함시킬 지 모두 문제이다. 물론 지금까지는 다소 막연한 규정으로도 별 문제가 없었지만 복지를 실행하는 단계가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형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적 특성이다. 그 부정형을 문제 삼으며 주저하는 것은 마치 침대에 눕힌 뒤 침대보다 키가 큰 사람은 잘라서 죽이고 작은 사람은 늘려서 죽였다는 서양 신화를 생각나게 한다. 기준에 조금이라도 안 맞으면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기준에 100% 어긋나는 것이 아니면 모두 포함시키는 정도의 전향적인 자세가 필요한 대목이라 하겠다.
사실 어떤 정책이건 현실의 다양한 경우를 만나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현실 문제에 대한 예측이 정책 결정 자체를 재고할 정도인지 판단하는 것일 텐데, 예술인 복지에 관한 한 앞서의 부정형은 결코 그런 장애 요소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시행상의 난점만을 주장하며 불가하다고 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세밀한 방안을 마련하여 본성적인 부정형을 수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요약하면 예술인 복지의 내용은 분명하고, 그를 위해 모델로 삼을 만한 국내외 사례들도 충분히 있지만, 그것을 이룰 자금을 어떻게 확보하느냐 하는 것과 대상의 범위와 실행 방식을 확정짓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해결 과제인 셈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안 된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이게 꼭 필요하고 따라서 어떻게든 성사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국가적 공감대의 형성일 것이고 그것을 이루려는 정책적 결단일 것이다.

4. 예술인 복지 법제화의 시급성과 당위성

주지의 사실이지만 일반 직업인에 비해 예술인의 기초적 삶은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예술인이 활동하는 데 있어 기초적 삶의 부분은 그 활동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러니까 예술인의 생명을 예술적 생명과 물리적 생명으로 나눈다 할 때 그중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둘 다 있어야 비로소 사는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즉 예술인의 물리적 생명이 흔들리면 그의 예술적 생명도 위태로워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예술인 기금이 됐건 실업급여가 됐건 포괄적 보험제도가 됐건 공제회가 됐건 복지재단이 됐건 최소한의 삶을 보장할 제도적 장치가 있어야 한다. 예술인도 결혼하고 예술인도 자식을 낳고 예술인도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옳다. 또 교수와 학생에게 방학이 있듯 예술인에게도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은 재교육, 재훈련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 또 작업을 하는 동안 아이를 맡아줄 탁아방도 있어야 하고 어린이집도 있어야 한다.
더불어 예술인의 사회적 역할은 지금보다 훨씬 확대되어야 한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교육 기능 내지 치료 기능이다. 즉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예술교육이 활성화되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전 국민이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삶 속에서 예술을 접하도록 하기 위해 많은 예술인들이 기꺼이 그것을 돕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예술과 예술인이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존재라는 인식은 훨씬 빨리 확산될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예술인에 대해 일상의 삶을 포기한 기인 정도로 여기는 분위기는 사라져야 한다. “예술이 좋아서 결혼을 포기하고 예술과 결혼했다.”는 말은 위험하다. “배가 고파야 예술이 나온다.”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일의 성격상 예술인들은 일반인과 다른 모양으로 살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그건 어떤 직업에서고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마치 대중교통 기사나 소방관이 모든 이들이 쉬는 공휴일에 일하는 것이 자연스럽듯 공연예술인들이 밤에 나가 공연하는 것도 직업적 특성일 뿐이다. 결국 예술인에게 가장 확실한 복지는 이 사회의 일원이자 꼭 필요한 존재로 인정받으며 누구나처럼 일상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제 예술과 예술인의 가치에 대하여 분명한 인식이 필요하다. 예술인 복지가 국민 중 취약한 계층에 대한 복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마치 국가의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요소를 지키듯이 예술과 예술인을 지켜야 한다는 인식이 국가 경영자들의 뇌리에, 나아가 국민 전체의 의식 속에 확실히 자리 잡아야 한다.
그렇게 국가와 사회가 나서야 한다. 그것도 그냥 나서는 것이 아니라 긴장해서 팔을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나서야 한다. 이에 있어 특히 “우는 아이 젖 준다.”는 식의 사고를 경계해야 한다. 즉 시끄럽게 울지 않으면 젖이 필요 없다는 뜻으로 이 말을 신봉하다가는 경우에 따라 그 아이가 굶어 죽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너무 굶어 이미 울 힘도 없는 아이, 또는 미처 우는 방법을 못 배운 아이, 그런 아이들은 일정 정도 요구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이내 세상과 단절하고 스스로 고통조차 못 느끼고 죽어가는 자폐상태에 빠지고 만다.
예술을 살리려면 예술인들이나 예술계가 울지 않더라도 국가가 나서서 “국가의 근간인 예술이 사망하면 안 되니 제발 젖을 먹어 달라.”고 애걸복걸 부탁하면서라도 지원해야 한다. 시혜자의 오만한 태도로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그 젖은 목구멍을 통과하지 못 한다. 공적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경박한 공치사 없이 인내해야 하고, 젖을 준 효과가 당장 안 나타나도 너무 오래 굶은 것임을 이해하고 기다려야 한다.
그러한 절실함과 인내심을 바탕으로 조심스레 깨지기 쉬운 보석알 다루듯 애지중지 살려야 예술가는 비로소 숨을 쉬며 주옥같은 예술작품을 뽑아내고 그렇게 예술이 발전해야 국가는 비로소 활력을 얻어 성장을 하게 될 것이다. 21세기 우리의 국운이 걸린 일이라는 생각 아래 크게 결단해야 할 때이다.

 

  대학로 포럼  2010~2011 연속 토론

 [대학로 포럼  2010~2011 연속 토론]

‘한국의 연극 정책 어떻게 볼 것인가’ - 6

참석자/  송선호(연출가, 극단 유랑선 대표),박상현(연출가, 극작가), 전용환(연출가, 극단 청춘오월당 대표), 김태수(연출가, 극단 완자무늬 대표)), 홍재웅(평론가), 채승훈(연출가, 극단 창파 대표), 김한아(기록)
일시/ 2011년 2월 12일 대학로 민들레영토


채: 오늘은 현 정부 문광부의 지원 정책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간접지원, 선택과 집중이라는 명분으로 되어있는 사후지원에 대한 토론을 할까합니다. 그리고 그전에 최근 최고은 시나리오 작가가 사망한 사건과 관련하여 소회를 말씀해 주시면 어떨까요. 그리고 미리 얘기합니다만 다음 달에는 그에 따른 예술인 복지 문제에 대하여 토론해 보려 합니다.
오늘 오전부터 이분 저분 만나 뵈었는데 한 결 같이 그 문제가 주제가 되었습니다. 올해 우리 연극계의 화두는 예술인 복지법을 어떻게 통과시키느냐가 될 것 같습니다. 전용환 선생님은 최고은 작가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 저도 조만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두: 네? 아, 허허.

전: 그거에 관하여 예술인복지 문제를 다룬 한겨레 신문을 가져 왔습니다.

채: 연극학과 교수협의회에서는 ‘예술인 복지법 제정을 촉구하며’ 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로 하였습니다.

박: 어제 연극을 가르치는 선배교수 두 명을 만났는데, 하는 얘기가 ‘연극계라면 안 이랬겠지?’ 하는 거예요. 연극계는 아직 공동체적인 정서가 남아있는데 영화계는 완전 황폐화 되었다는 거죠. 연극계는 또 20~30년 전하고 비교해 봐요. 요즘 벌이가 없이 연극한다고 하면 누가 챙겨주는 것 아니잖아요? ‘벌이가 없으면 어쩔 수 없지 뭐...’ 이런식으로 나오니까요.. 사실 복지라는게 예전처럼 십시일반이 가능하고 그냥 숟가락 하나놓으면 같이 먹을 수 있는 그런 공동체적인 것이 남아 있는 사회라면 복지문제가 단순히 얘기하면 심각한 것이 아닌데, 지금은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벌이가 없으면 어디에 가서 부탁 할 데가 없기 때문에 복지가 중요하다는 거죠. 나도 처음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왜 친구 집에 찾아가지 않았을까? 부모님은 뭐하나? 아무래도 그런 관계들이 단절된 지경까지 간 것 같고, 나름대로 장래가 촉망받는 친구가 이 정도였으니까.. 연전연패하면서 고군분투하는 친구들이야 오죽하겠어요..

김: 어쨌든 첫 기사가 아주 쇼킹하잖아요. 남은 밥 좀 있으면 김치하고 좀 가져다주면 고맙겠다는.... 그렇다면 지금 얘기했던 공동체 사회가 깨져버리고, 승자만 살아남는 정글의 법칙으로 흘러가버리고, 아홉 개 가진 자가 하나 가진 자의 것, 즉 이 하나는 남은 밥과 연계된 최소한의 생계대책 일 것인데 그것마저 빼앗아 열 개를 채우겠다는 자본의 논리로 사회전체가 그렇게 부끄럼도 모르는 후안무치한 세상이 대세고 안하무인이고, 그런 사회로 가는 어떤 표상으로 보여요. 그렇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지도 못했던....

전: 여기 신문을 보면 ‘영화계는 말 그대로 산업화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예전처럼 공동체 개념은 없고 말 그대로 갑을 관계만 있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예술인들은 그런 부분에 있어서 국가에서 지원해줄 수밖에 없다.’ 고 적혀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10개월간 507시간 일하면 실업금여를 탈 수 있고, 예술고등학교나 예술대학교를 나오면 향후 3년간에 실업급여를 줍니다. 젊었을 때니까 그때까지 승부를 봐라. 최소한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줄테니 3년 안에 해결을 봐라, 하는 그런 복지제도가 있고. 예술가에 대해서 직접지원의 방책이 되고 하는 거죠.

채: 영화가 산업화 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대중예술이란 것이 상업적으로 많이 기울어져 가고 있는 생산구조 속에서 희생자가 나왔다 할 수 있는 건데, 중요한 건 영화뿐만 아니라 연극 등 다른 모든 분야들이 근래에 이르러 비슷해져 간다는 것이지요. 우려가 됩니다.

김: 죽음을 들여다보면 왜 알바라도 하지, 그렇게 인간관계가,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겠나 하겠지만 하지만 일을 하려고 해도 몸이 건강해야 일을 하죠. 사정을 모르면 그 사람이 처해있는 상황을 우린 모르는 거고, 그런 복지 ‘사각지대, 보이지 않는 곳’이 많다 이거죠. 또 학교 급식 문제도 무엇 때문에 누굴 위해서 정책적으로 싸우는지 올바른 결정이 나야 하겠지만 사실은 서로 표 싸움과 이기적 태도 때문에 항상 소외되는 국민은 있게 되어 이런 사건이 언제 어디서 터질지, 터지고 난 후 사후약방문만 두드리는 격이 되는 걸 너무나 많이 봐왔지요. 그래서 문화예술인들의 복지 사각지대가 아닌 곳이 없다할 정도여서 위험한 요소들이 정말로 우리가 모르게 죽어가는 사람이 많지 않냐는 걱정도 됩니다.

홍: 핀란드에 관한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우리와는 전혀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우리는 경쟁을 부추겨서 경쟁에서 지면 밑바닥, 아니면 묻혀버리는 사회지요. 결국 상위 몇몇만 살게 되는 사회를 지향합니다. 그렇지만 핀란드는 어느 하나 잃을게 없다고 말합니다.  한사람도 놓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런 생각을 가지고 개개인의 독특한 재능을 찾아내고, 찾아내도록 도와주는데, 우린 그런 재능을 1등이 아니면 알아봐주지도 않지요. 결국 ‘아.. 저런 것은 해봐야 안 되겠구나’하는 생각을 미리부터 가지게 되고, 새로운 영역을 위한 노력과 이에 대한 격려는 아무래도 적어질 수밖에 없어집니다. 사람들의 진정한 아픔, 죽음, 슬픔을 보듬어 안기 보다는,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이라고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그런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진행되어 장기화된다면 30~40년 후에 우리나라에 과연 예술이 살아남아 있을까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채: 피라미드 구조 같아요. 삼각형구조라고 할까요. 상층부에는 소수의 성공한 예술인들, 반대로 무명이라고 할 수 있는 많은 수의 젊은 층은 삼각형의 최하단부를 형성하겠지요. 삼각형 전체를 균형 있게 아우르는 지원, 복지정책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의 지원정책은 주로 상층부만을 대상으로 하고, 복지야 말할 것도 없이 전무한 상태이고, 게다가 영화계 같은 경우 모든 과실의 90%가 상층부 스타급 배우나 제작사가 가져가고, 진짜로 없어서는 안 되는 스탭들은 극빈자와 같이 사는 실정이 큰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홍: 배우도 A급이니 B급이니 하며 나누는데.. 소위 A급 배우들이 개런티를 독식하다시피하고, 그 옆에 서있는 B급인 C급 배우들은 밥값 벌기도 어려운 형편입니다. 게다가 지난번에 뉴스에 나왔던 것처럼 국영방송은 물론 대기업 방송사들이 이들 배우들의 임금 지급을 미루고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들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인데, 빵 하나만이라도 사먹어야 하는 사람에게는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먼저 챙겨주는 기현상이 나오는 거죠.

송: 방법이 있지 않았겠느냐, 그렇게 말하지만 결국 끈을 놓아버린 거죠. 그 상황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렵고... 한편으로 연극보다 영화 쪽이 훨씬 화려하잖아요. 현재 중학생 중에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수가 그런 쪽 일을 하고 싶다는 화려한 꿈을 꾼다고 합니다. 사회가 무한대로 욕망을 부추기고, 거기서 살아남는 사람은 남는 거고, 아니면 순전히 개인의 책임이고... 아무튼 경종을 울린 사건인 것 같아요. 연관시켜 복지 정책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되는데, 예술인 복지법은 저소득층 대상의 복지법과는 달라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다루겠지만 그냥 쌀을 주는 그런 방식은 절대 아니라고 봐요. 어떻게 보면 넓은 의미에서의 간접지원 형태라고 할 수 있겠죠.  

채: 최고은 양에 안타까움에 대해..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하면서. 예술인 복지문제에 관해서는 차후에 관련된 분들을 초빙하여 그에 관한 토론을 집중적으로 하는 것으로 하고, 오늘은 말씀드린 대로 현 정부 지원정책의 근간인 간접지원, 사후지원, 선택과 집중에 대해 토론 해 볼까 합니다. 제가 먼저 용어의 개념부터 개략해 드리겠습니다. 간접지원이란, 예를 들어 창작자한테 직접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극장이나 페스티발 운영자, 전문연 등에 지원하고, 다음엔 그들이 창작자들을 선정하는 방식이겠지요. 또 극장지원을 통해 극장보수도 하고 대관료 인하를 유도하는 것 등도 간접지원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한편, 현재 서울을 기준으로 볼 때 연극분야에 있어 대표적인 직접지원은 서울문화재단에서 연말에 접수하여 1월 말에 발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올해는 약 60개 단체에 평균 1500만 원 정도가 지원되었으니 총10억여 원 되겠네요. 그런데 이것도 엄밀히 살펴보면 창작자 즉, 작가, 연출가, 배우한테 직접 지원되는 것은 아니고 극단한테 지원되는 것이니까 완전한 직접지원은 아니겠지요. 뭐 그거야 문학이나 미술 같은 분야와는 다른 연극의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요. 사후지원은 작품의 질을 보고 그 극단이나 창작자가 잘했다 싶으면 차기작이나 재공연을 지원하는 제도입니다. 현재 문화예술위에서 일 년에 두 번 공모 받아서 시행하고 있습니다. 평균 편당 약 4천~5천만 원 정도의 지원금을 받습니다. 작년기준 일 년에 한 열 두어 편, 총액은 약 6억여 원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선택과 집중이란 위의 사후지원의 경우에서 보듯이 잘하는 극단이나 창작자에게 몰아서 지원하는 형태, 일단 이것은 작품별로도 해당되겠고, 축적된 성과가 많은 극단이나 극장을 선택해서 지원하는 경우도 해당되겠지요. 위의 지원제도들은 쉽게 요약하면, 음... 농사에 비유하면... 열매가 익으면 잘 익은 것만 골라서 따 먹는 방식이라고나 할까요. 농사짓는 과정에 땀 흘리는 것은 농사꾼의 몫이고 결과물만 보겠다는 것이니까, 어떤 느낌인지, 또는 어떤 철학인지 대체로 아시겠지요. 그 중에서도 전문연 등의 극장들은 대부분 먹기 좋은 과일. 즉 관객이 좋아하는 작품을 선택하겠죠. 예술이 농사하고 같은 것인지, 그렇지 않고 예술성, 공공성의 작품을 일정 부분 담보하는 방법은 없는 것인지, 간접지원은 꽤 많아지고 직접지원은 현재 일 년에 약 10억밖에 없고, 그래서 이런 지원방식이 우리 연극계에 현재 미치는 영향이 어떻고, 어떤 장단점이 있으며, 이렇게 갈 경우 ‘연극 생태계가 어떻게 조성 될 것이냐’ 는 것들을 예측해 볼 수도 있는 거구요. 궁극적으로 그것들이 이상적인 시스템이다 하면 좋게 받아들여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수정하거나 바꿔야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것이 없는지에 대해서도 얘기해 보시지요. 우리가 식견이 부족하긴 하지만 현장연극인들이기 때문에 실용성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김: 지원금 총액이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까지는 많았었는데 최종원의원이야기를 들어보니 실질적으로 엄청 줄었더라구요. 삭감 된 거죠.

송: 복권기금도 줄었죠.

채: 그렇게 줄은 이유는 뭘까요?  

김: 정부에서 4대강 사업이나 다른 쪽으로 쓰려는 보이지 않는 손들이 있겠죠. 여기저기서 빼가 버렸으니까... 말로는 G20이니 OECD들어가서 우리나라가 명목이 선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은 그 선진국이라는 나라들 안에서 모든 것이 꼴찌이고, 자살률 인권침해 등 나쁜 것은 일등인데.. 그런 것에 대해서도 전혀 부끄럼이 없는 정부잖아요. 그 고통은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받는 거잖아요. 지원금 발표도 보니 올해 10 억 밖에 안되잖아요. 그렇다면 그게 날아든 액수를 보니까 많은 곳이 3천이고, 1800만원.. 그거 알아서 밥 먹고 알아서 몸으로 때우라는 건데.. 어떻게 보면 더 현장작업을 하는 우리들에게 거지근성을 기르는 거밖에 안되고, 생산적인 지원책이아니라.. 소비적인 정책이 아닌가하는 반성도 들고, 이런 문제점에 대해서 서로 토론하고 우리자신들도 지원책에 대해서 현장에 있는 우리도 이런 문제점에 대해 반성해야 할 것 같아요. 거부 할 수도 없고, 못타면 속상하고, 타면은 인정받은 것 같이 우쭐하고.. 예를 들면 밥통을 들고 가는 주인을 쳐다보는 개들처럼 이걸 나눠주는 사람만 쳐다보는 것 같은, 그 사람의 선처만 기다리는 것 같은, 묘한 거래는 아니지만 그런 보이지 않는 비겁함과 비굴한 웃음과 또 다른 올가미 들이 있는 것이 아닌가.. 반성을 하자면 그런거고.. 지금 정책의 큰 문제는 일단 그것이라 봅니다.

채:  우리나라 문화예산이 1%를 넘게 된 게 DJ때? 참여 정부 때?

홍: 노무현 정권까지는 1.2%, 현 정부는 0.9%로 알고 있습니다.

채: 예. 근데 이게 근본적으로 프랑스, 독일, 영국 등과는 다른 면이 있는데, 그 쪽의 예술 환경은 인프라가 이미 많이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그 1%라는 것은 다분히 소프트웨어, 즉 작품 창작 하는 쪽으로 지원이 많이 되는 것이고 우리는 매년 인프라 조성하는 것, 관광과 체육 분야 등까지 플러스 된 것이죠. 그들과 차이가 있는 거죠, 그들을 �아 가려면 실제로는 2~3% 정도 씩 10~20년 정도 쏟아 부어야 비슷한 수준이 되는 것이죠. 말이 1%지 정작 예술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1%는 아니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나마도 줄어드는 추세에 있다고 하니까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홍: 장르는 둘째 치고, 그것이 상업연극이냐 아니냐에 대한 지원 기준이 전혀 다릅니다. 뮤지컬은 아예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지요.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너희는 돈을 벌고, 입장료도 원하는 대로 받으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연극의 경우는 지원금을 받고 사람들이 봐야한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문화적인 소양과 발전의 차원에서 지원을 해줍니다. 그러니까 표 값도 싸서 많은 사람들이 저렴하게 볼 수 있게끔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게끔 말이지요. 그렇지만 뮤지컬이나 상업적인 연극은 그들 선택에 맡기는 거고요. 지원 대상으로 하는 연극을 ‘어떤 것으로 하느냐’라는 문제인데 우리의 경우 다분히 상업적인 것을 띄고 있음에도 지원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럼 과연 ‘어떤 것이 상업연극이냐?’ 하고 얘기하면 좀 더 얘기가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우리나라는 지원 대상의 연극에 포함시키지 말아야 할 것도 포함시키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채: 홍 선생님이 지금 중요한 대목을 얘기했다고 생각합니다. 간접지원에 얘길 결부시켜보자면, 소위 상업적인 공연물들에 대해서는 지원하지 않는 것이 유럽의 기준이다 할 때, 극장지원과 같은 간접지원을 하게 되면, 그 경계가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거든요. 극장에서 작품을 선택하다 보면 상업적 공연물들이나 재공연 작품들, 이미 지원을 받은 작품들이 선택될 확률이 도리어 높은 것이거든요. 이런 현상들은 비상업적 공연위주, 초연우선, 이중지원금지 등의 지원원칙들과는 방향이 틀린 것입니다. 어떻게들 생각 하시는지?

송: 극장은 검증된 작품, 알려져 있는 작품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겠죠. 선택과 집중도 마찬가지로 잘하면 돈을 주겠다는 것인데, 열 편 이내의 작품을 뽑아서 이전의 1.5에서 두 배 정도 지원금을 주는 것 같아요. 조금 더 결과를 두고 봐야겠지만 첫째는 과연 그 액수로 ‘선택과 집중’이 되겠느냐는 거죠. 또 홍 선생님 말씀하신 것과 연관시켜서 지원의 기준을 한번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물론 선정작은 뮤지컬이 아니었지만 뮤지컬 제작하는 단체를 지원했어요. 심사 기준에는 홍보에 관한 것도 있습니다. 얼마나 홍보를 열심히 했고, 그 효과가 있었느냐를 놓고 점수를 매기는 거죠. 그런데 라이센스를 따서 대형 뮤지컬을 하는 제작사와 군소 극단의 홍보력을 심사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런 건 기준의 문제이고... 일단 ‘선택과 집중’이라면 순수연극 단체들이 힘이 없으니 간접지원을 통해서 극장도 싸게 얻을 수 있고, 또 홍보도 할 수 있는 인프라를 마련해주는 것이 지원정책 안에 포함되어야 적극적인 것이죠. 기존의 정해진 지원액수를 놓고 스무 명이 가져가던 것을 다섯 명이 가져간다고 해서 그게 과연 선택과 집중이 되겠느냐는 겁니다.  

채: 옳은 지적입니다. 사후지원 같은 경우는 간접지원 형태는 아니고.....

송: 선택과 집중이죠.

채: 어찌됐든 극단이 좋은 작품을 만들고 나서 받는 형태니까 사후지원이고 그렇게 선택이 되었으면 이왕이면 단위가 높은 지원을 해줘야하는데 사실상 선택과 집중이란 말을 붙이기가 힘들 정도로 좀 그렇다는 거죠.

송: 제일 적게 받은 단체가 3000만원입니다.

채: 예산자체가 적고 선택을 하는 기준 같은 것도 불합리한 점이 있다는 거죠. 음, 간접지원에 있어서, 한팩이라든가 전문연이라든가 하는 극장들이 자칫 대중적인 작품들을 선택하게 되는 현상들이 발생하고 그것이 지속될 때 연극계에 주는 영향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김: 전문연이라든가 한팩이라든가 구성 문제가 어떤 당위성과 인정성이 있는 건지, 이런 것들이 전문성이 없으면서 심사제도 라는 것을 막연하게, 심사위원들을 비공개적으로 뽑아놓고 그 사람들이 책임지겠다고 하면 어디까지 책임지고 뭘 책임지는지도 불분명하잖아요. 그러면 10억을 지원해서 성과가 없으면 그 사람들이 10억을 물어내는 것도 아니고.... 그런 묘한 권력단체가 되어가는 모양새가 보기에 안 좋고, 그 사람들은 전문성이 없고, 아까 말했지만은 상업화되어 관객들의 취향에 야합하는 방향을 앞세워서 아니면, 얼굴 있는 배우를 앞세워서 그렇게 조금 예술성보다는 그냥 소비적인 문화로 흘러갈 방향이 많아질 거 같아요. 관객수를 심사기준의 점수에 반영하여 초대의 남발로 스스로 무덤을 파는 아주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극단을 운영하게 되고, 이 심사기준도 애매하잖아요. 심사하는 사람도 사실은 어디까지 책임진다는 것도 애매하고., 명칭만 그럴 듯한 거 아닙니까? 심사책임제도? 하하.. 그런 아이디어만 난무하고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 들은 허무맹랑한 것들만 있는 거죠.

홍: 그러니까 지원금에 관한 관리자체를 보면, 예를 들어 문화예술위원회가 있고 거기서 지원하는 체계가 있었는데, 지난번에도 얘길 나누었지만, 지금은 문화예술위원회 존폐자체가 이제 유명무실한 상황입니다. 예를 들어, 시립극장에 대한 예산은 서울시 전체예산에서 얼마가 나와 그것으로 1년 동안 운영하지요. 운영은 극장에서 알아서 하지만, 그게 과연 잘됐느냐 안됐느냐는 이후 감사도 하고 그것에 대한 평가가 내려집니다. 다른 예로 문화예술위 같은 경우는 자신이 극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예술성 있는 작품들을 상대로 심사해서 뽑고 그 작품에 대한 지원을 해주는 거죠. 그런데 지금은 한팩과 같은 단체의 경우는 극장을 끼고 운영을 하다보니까, ‘얼마큼 성공하느냐 안하느냐에 대한 평가를 ’관객을 얼마나 유치하느냐, 얼마나 벌어오나, TV에 얼마나 많이 나오나‘와 같이 이상한 잣대로 평가를 하는 겁니다. 실제 연극의 예술성에 대한 척도라기보다는 그야말로 그냥 일반인이 평가하는 그런 류의 평가로 변질되어 버리는 경우가 다분히 있습니다. 비슷한 얘기를 하자면, 영화인들 중에 몇몇 우리가 아는 유명 영화인들은 다른 나라에서 오히려 훨씬 더 좋게 평가해주는 감독들이 있는데 그들의 영화를 보러 가는 관객은 2000명도 안되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영화를 보러가는 관객이 적다고 하더라도, 그들에 대한 진정한 평가와, 그런 예술성을 지닌 영화들은 국가 차원에서 혹은 공적인 차원에서 보호를 해줘야한다는 거죠. 관객들이 예술 연극을 안본다고 해서 내친다면 과연 우리나라의 예술은 어디로 가야하냐는 것입니까? 그래서 지원금에 대한 관리자체가 좀 다른 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문화와 예술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지금 하고 있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정적인 것을 이미 담고 시작했기 때문에 그쪽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은 어느 정도 선이 서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채: 참고삼아, 완벽히 조사된 건 없지만 대략 해보면, 예를 들어보면, 서울문화재단을 통한 창작지원금액이 연극 쪽으로만 약 10억 정도 되고 예술위의 사후지원 같은 경우도 직접지원으로 분류하면 한 6억여 원, 합해서 총 20억 원 정도에 못 미치는 거죠. 거기에 비해 간접지원의 경우,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한팩 같은 데는 1년 예산이 50억 정도이고 명동예술극장도 그 정도는 넘고, 각종 극장이나 페스티발 지원, 부대비용, 극장보수지원, 전문연에 들어가는 액수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꽤 될 것 같은데요. 그렇게 본다면 차이는 무척 큰 것이지요. 직접지원과 간접지원의 액수 차이 말입니다. 이런 불균형이 가져오는 문제에 관해서 얘기를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전: 극장을 운영하는 측에서도 지원을 받으려고 어떠어떠한 극단과 어떻게 연결해서 어떤 어떤 공연들을 1년 동안 하겠다는 프로그램을 제시하는데, 당연히 이것을 심사위원들한테 어필하기위해서는 이미 검증된 또는 유명한 또는 흥행성 있는 작품과 인물들 위주로 연계합니다. 뭐.. 극장 같은 하드웨어나 페스티벌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단 한군데 극장이라도 1년 동안에 유지비만 지원해주면, 정말 제작환경이 열악하고, 또는 실험적이거나 진취적인 내용의 공연에 공간을 내 주겠다 하는 곳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연습하고 노력했던 작품들을 공연할 수 있는 공공의 장소가... 물론 그 안에서도 평가를 좋게 받아서 살아남을 수도 있겠죠. 무엇보다 이렇게 됐을 때 새로운 창작극, 다양한 형태의 공연들이 백가쟁명으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극장공간에서 제대로 완성도 있는 공연을 못한다면 너희는 연극을 하지 말아라.’ 이런 말을 들을 공간이 한 곳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김: 우리끼리 아둥바둥 싸우고 밥은 하나인데 거기 숟가락 다 넣고 싸우는 경우니까....사실은 이게 현실적으로 맨 날 얘기만 되풀이되고 문제는 있고 이게 이렇게 되면 고질적 문제를 얘기를 하는 거죠.. 뭔가 묘책이 있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좀 더 시원하게 예를 들면 10억이면 그걸로 극장하나를 만들어서. 5년이면 극장 다섯 개가 되자나요? 이게 마음을 비우는건가? 하하~

박 : 마음을 비우면 되요.

김 : 마음을 비운다 대학로를 떠난다 어려운 일이구만? 하하~

채: 극장지원 중에는, 소극장에 지원하는 경우가...그런데도 돈을 1억 가까이 받은 극장들이 대관료를 인하한다든가 그런 것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시설을 보수하거나 자체 기획공연으로 돌리거나 이렇게 했지 다른 단체들한테 인하된 저렴한 대관료로 제공하는 경우는 못 본 것 같습니다. 워낙 소극장 운영도 어려워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일반 극단들에게는 별로 실효성을 주지 못한 것 같고.... 말씀 하신 것 중에, 싼 대관료의 극장을 마련 해 주는 것 또한 간접지원의 한 형태란 말씀에 공감하구요. 실제로 그건 좀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더욱 더 그런 극장이 많아 졌으면 합니다. 한팩의 3,4관은 대관료가 좀 저렴하지 않나요?

전: 그거 60만원인가 80만원인가..

김: 개인차가 심하다보니까 50만원이 적당하다는 극단이 있고, 5만원도 비싼 극단이 있는 거죠. 이게 그러니까 지난번에 대학로예술극장 첫개관할 때 30만원 측정된 것도 비싼거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죠. 60만원이었나? 우리한테는 비싼거다...

전: 서울연극협회에서 정미소랑 한성대역에 있는 극장은 9만원이다. 20만원으로 해서 한시적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정미소극장 같은 경우 20만원으로 대관한다면 굉장히 싸다고 할 수 있거든요.

김: 근데 그게 쌀 수도 있는데 열흘이면 200이라구요! 통장에 200만원이 있으면 괜찮은데 없을 땐 그것도 굉장히 힘들지요. 왜냐면 그건 생돈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부채가 된다 이말 입니다. 먹는 거는 여기저기 손 벌려 입 벌려 먹는다 치고 먹지 않고는 못 사니까...

채: 100석정도 기준으로 봤을 때 우리가 진짜 간접지원의 혜택을 받는듯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은 얼마 정도가 될까요?

박: 진짜 지원이라면 무료에다가 청소비정도 내는 것이죠.

채: 무료? 10만 원 정도?

홍: 무료로!

채: 무료라면 무리한 요구라고 할지 모르기 때문에....

박: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얘길 할 수가 없다는 거죠.

채: 여러분들의 얘기는, 그렇게 간접지원의 형식으로 가는 극장들도 60~70만 원 하니까 그건 지원다운 지원이 아니다. 금액이 대폭 인하 된 극장이 주어졌을 때 그것이 실효성 있는 간접지원이고 나아가 실질적인 직접지원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

김: 예를 들면 창작공간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상업성을 배제하면은 대관료가지고 이런저런 얘길 안 할 거 같은데 이걸 경제를 앞세우다 보니까 모든 것을 헛갈리는 것 같아요. 정말 중요한 정신은 흐릿해지는 거죠. 어떻게 그래도 공짜로 해 돈을 안주고, 대관료를 내야지.. 이런 경우가.. 오히려 이 사람들을 그 공간에서 놀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바꿔준다면 그러면 보다 더 풍성한 작업이 이루어질 것 같은데.... 1억 정도 들어야 작품제작과정의 모든 것이 해결 될 것을 천만 원 이천만원 하려니까 어렵다는 겁니다. 돈으로 따지면..

홍: 어쩌면 사이에 드릴 수 있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네요. 60개 단체에 10억 정도 지원됐다고 하는데 이게 진짜 말이 되는 소린가?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10개 단체였다면 10억이 될 것 같은데.....우리나라에서! 다른 나라도 아니고.. 지금 뭐 경제발전, 선진국 운운하면서, 삼성이란 기업은 몇 조의 수익을 낸다고 하면서. 예술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너무 ‘야박한’ 지원을 계속 하고 있는 거죠. 지원 액수에는 변화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물가도 오르고 전기 값도 오르는데. 다른 것은 다 올라가면서 왜 이거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 액수를 고수하고 있는지. 어떻게 보면 서울시의 문화 예산자체가 퍼센티지 상으로는 엄청 줄었을 거예요. 그것에 대한 질타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유지가 되 온 것 같고요.

송: 또 그 액수가 극단 입장에서는 무서운 액수라는 거예요. 지원을 받은 이상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정신으로 연극하자’는 식의 얘기는 못해요. 왜냐면 돈을 받았기 때문에. 디자이너, 배우들에게 만족할 만한 정도는 아니지만 합당한 대우를 해야죠. 그러면 극단 입장에서는 빚을 지고 갈 수밖에 없어요.

채: 결과적으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경우군요.

송: 현재 제작 시스템에서는요.

김: 현실적으로 지난번에 차세대연출가 인큐베이팅하는데, 자라나는 후배들이 아요. 의욕이 있으니까. 협회에서 천만 원씩 지원해줬는데 부족하니까 욕심을 부려서 일단 돈을 쓴거예요. 그만큼 빚을 지고 시작하는 연극인들이 생기는 거죠. 그게 이제 점점 쌓아져 갈 것 아니예요. 경험이 있으면 어떻게든 있는 돈 천만 원 안에서 해결 할 텐데 욕심이 생기니까 투자를 하다보면 출연료를 요구하는, 회식에, 무대에, 의상에, 배꼽이 점점 커가는 거죠. 이렇게 악순환의 고리가 시작부터 생길 수 있다는 거죠.

송: 저는 두 가지로 보는데, 일단 국고가 안 움직이거나 움직여도 특별히 도움이 안 되는 액수라면 다양한 정책적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봅니다. 어렵겠지만 안 된다고 손 놓고 있기보다는 유럽처럼 작은 규모로라도 민간 자본을 끌어 들일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내야죠. 일단 돈이 없는 게 문제잖아요? 앞으로 예술의 형태도 수요도 점점 다양화될 테고, 그러면 지원의 형태도 다양하게 변해야죠. 이건 이미 10년 전에 준비했어야 했던 겁니다. 돈이 모자라면 만들겠다는 의지가 곧 정책인 것이지 있는 걸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은 너무 소극적이죠. 두 번째는 상업화되는 겁니다. 이렇게 없는 와중에. 영리 단체를 지원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영세 극단들이 영리 구조를 따라가면서 과도하게 지출하는 홍보비를 줄일 수 있도록 정책적인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홍: 이건 좀 다른 얘기인데 예산 정책과 관련해서 담당자가 누군지 어차피 시의회를 거쳐서 나올 얘기지만 그 부분에 있어서 실책이 가장 크지 않나 싶습니다. 정책운영자의 생각이 어떠한지 그게 가장 관건인거 같거든요. 다른 식으로 얘기하자면 아까 60개 단체라고 했는데 만약에 10개 단체였으면 10개 단체에 10억을 줬으면 좋은 연극이 10개 만들어지고 뭐 빚을지는 사람은 없었을 테고 다른 사람은 다음 기회를 찾아보고 열심히 찾아보자 격려를 줄 수도 있었을 것 같거든요? 근데 60개 단체에 이런 돈을 주고 하라고 하니까. 하는 사람은 하는 사람대로 빚을 지고, 안하는 사람은 기분 나쁘고. ‘그거라도 받아야 하는데’ 하고 이런 묘한 감정들이 생기는 거거든요. 적정한 비유인지 모르겠는데 예전에 우루과이라운드 끝나고 나서 쌀 수입 개방문제 때문에 말이 많이 나왔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나서 정부가 딜레이 시키고 농부들 무마하는 차원에서 뭘 했냐면 농기계를 살 수 있게끔 대출을 하게하고 지원을 해줬거든요. 농기계를 사는 가정은 몇 천만 원씩 지원을 해준 거죠. 예산을 풀은 거죠. 그데 농부들이 그걸 받기위해서 다 농기계를 산거예요. 근데 그 농기계가격이 몇 천만 원이 아니라 더 주고 사야 하는 거죠. 사실은 그 기계가 모든 가정에 다 필요한 기계가 아니고 몇 농가가 같이 하나를 사서 돌려서 사용하고 손을 보고 하면 되는 건데 각각 하나 있어버리니까 지금은 아예 관리도 안 되고 혼자 쓰다 내버리고 하다 보니 지금은 아예 녹슨 기계로 망가져서 널브러져 있는 거죠. 결국엔 돈을 주고 제대로 사용을 안했다면 이런 식으로 헛돈이 되지 않고 좀 더 유용하게 쓰일 수 있었을 겁니다. 결국엔 단지 당장에 무마? 내가 일단 돈을 천만 원 주었으니 되지 않았냐? 줬으니까 당신 할 말 없을  고 여러 사람 조금조금 줬으니까 뭔가 받았다고 하기도 뭐하고 안 받으면 안 받은 대로 그렇고.. 이런 생각이 들게끔  는 정책운영자체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듭니다.

박: 만약 아까 예를 들어준 것처럼 10개 단체에 10억씩 줬다고 했을 때 어떤 배우가 지원받은 단체에서는 지원금도 1억씩 받았으니까 뭐 500만원 다오. 없는 단체 가서는 50만원 달라하고. 이것 또한 모순이거든요. 이 단체에서는 500원어치 대우를 받고..여기 가서는 50원어치, 대우 받는 게 아니라, 봉사를 하고.... 홍 선생님은 예를 드시다보니까 의도치 않게 이렇게 된 건데 .. 그게 바로 선택과 집중. 개념적으로 그렇게 돼야 되거든요. 만약 선택과 집중이라 했을 때 그것이 갈려지는 게 51:49는 좀 그렇고 55:45의 능력차로 갈라진다고 봐요. 일단, a라는 선택된 예술가가 1년에 다섯 차례 공연을 할 수 있는 지원을 받는데 선택 받지 못한 b라는 예술가는 1년에 0.5회 정도 밖에 공연을 할 수 밖에 없다고 하면은 55:45의 결과에 대한 편차는 너무 원심화 되는 것이죠. 이것은 형평성에 문제가 있죠. 선택과 집중의 의미를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그것이, 그 의미가 결과적으로 잘 살아나려면 선택과집중에 있어서 어떻게 공정성을 부여할 것이냐와 어떻게 시각을 교차하고 변화시켜서 여러 가지 시각에서 그것을 선택하는 시스템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겁니다. 당연히 선택하는 사람들은 어떤 관주도적인 시각에서 보거나 자본주도적인 시각에서 보기 때문에 상업적인 것, 보수적인 것, 웰메이드 같은 작품을 선택하게 돼있고 그렇다보면 이미 옛날 얘기지만 기국서의 “유쾌한 공격성”같은 것이 선택받을 일이 전혀 없거든요.

홍: 말씀하신대로 55:45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평가자라면 그게 보여야 하는데 문제는 55:45조차도 보기가 어렵다는 거죠

박: 못 보기 때문에 시각을 교차해야 한다는 거죠. 이 시각에서는 이 예술가가 선택 될 수 있고 각도를 틀어보니까 저 예술가의 가치가 눈에 보일수도 있는 거고.. 그러면 공정성이라든가 다변성에 대해서 우리가 보다 더 인정 할 수 있는 제도로, 결과를 다르게 인정하지 않을까?

홍: 10개 단체에 10억 원? 말씀하신 것처럼 제 얘기는 그만큼 액수가 적다는 거였거든요. 60개 정도면  한팩이 50억을 받든 100억을 받든 간에, 60개 단체라면 적어도 60억 정도의 액수는 배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채:  예산이 한정되다 보니까.... 서울문화재단이라고 하면 돈을 받아서 운영하니까 고민을 많이 할거예요. 그게 소액다건이냐 다액소건이냐의 문제거든요. 1억씩 10팀을 주느냐 1,500만 원씩 60~70팀을 주느냐의 차이입니다. 다액소건의 경우엔 못 받은 단체들이 많아지니까 거기에 따른 항의나 불만이 많이 생기는 것이고 반대로 소액다건의 경우엔 극단에 실질적인 지원이 안 된다는 얘기가 있는 것이죠. 소액다건과 다액소건의 장단점에 대해서는 누누이 얘기가 되어왔었는데요. 하여튼 어느 쪽 제도이든 간에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일단 지원 총액이 더욱 늘어나야한다는 것만은 사실 인 것 같습니다.

전: 지원총액도 늘어야 하고 지원받는 공연의 숫자도 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다양한 작품들 속에서 예술적으로든 상업적으로든 뛰어난 작품이 나오는 법이지요.

김: 공간성 문제를 들면 이게 시장식의 통계식이 아니라 공간에 대해서는 사회주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우리한텐 옳다고 봐요. 그런 개념으로 분명한 방향이 있어야 하는데..

박: 어차피 지원이라는 단어는 좌파적 용어예요.

김: 근데도 우리는 그렇지 않잖아요? 자본에 너무 억눌려있고 그 안에 해매고 있는거 아니예요?

송: 우파 역시 지원하죠. 박정희 정권 때도 돈 많이 썼잖아요.

박: 현장 예술가들이 모르는 애매한 돈들이 어떠어떠한 예술 권력가들에게 많이 갔죠.

홍: 제가 아까 얘기했던 1억 정도의 돈을 받게 되는 단체는 일주일 정도 공연하고 마는 이런 공연이 아닌 거죠. 한번 제작하는데 돈이 들지 흘러가는데 있어서는 기본적인 비용만 들어가잖습니까? 우리는 매번 그걸 뜯고, 사람들이 보려고 할 때 이미 끝난 공연이라면 결국에는 보고자하는 사람도 못 보는 그런 연극이 된다는 거죠. 외국의 사례로 볼 때, 만약 제작비를 지원받게 되면 2년, 3년이 쉬지 않고 공연되는 것이 보통이거든요. 예를 들어 시립극장의 경우도 한 공연을, 물론 매일은 아니라고 해도, 2~3년 공연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 공연을 볼 수 있게끔 해준다는 것이죠. 원하는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시간적인 여유도 있고, 그러한 시스템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배우들도 안배가 되는 거죠. 거기서 하는 사람들은 거기 묶여 있는 거니까, 다른 곳에 가서 공연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없는 것이죠. 물론 인건비의 지급이 전제조건이겠지요.

채: 여러분들의 말씀을 묶어본다면, 전 선생님 말씀은 좀 더 광범위한 촘촘한 그물망 같은 그런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 어쩔 수 없이 선택과 집중이라고 한다면 좀 더 지원을 많이 줘야한다는 것, 선택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을 진 모르지만 집중이라는 말에는 못 미치는 것 아니냐는 것이구요. 다음은 전 선생님처럼 전혀 지원을 받지 못한 팀이 최소화 될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물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현금지원이 아니더라도 공연을 원하는 단체들이 되도록 쉽게 공연 할 수 있는 지원 형태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것이죠. 그것이 간접지원이라면 선택받지 못한 단체들을 위한 촘촘한 그물망 같은 지원의 형태가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박: 가장 래디컬한 방법은 아주 저렴한 극장들이 여러 개 있어서 적은 부담으로 자유롭게 경쟁해서 거기서 좋은 작품들이 튀어나오게 하는 거죠.

김: 지원센터가 있으면 좋겠죠. 무대 의상 소품을 디자이너가 해주면 그 디자이너에 지원금주고 그걸 만들어주는 기술가도 주고. 일종의 공방의 성격도 좋고.

박: 소극장 무대에서 그런 것들이 큰 부담이 되나요?

송: 독창성이 문제가 되겠죠.

박: 대관료랑 출연료, 기획홍보비가 필요이상으로 우리한테 부담을 주는 거거든요. 출연료 같은 경우 물론 필요 이상이라고 생각하긴 그런데, 그분들의 능력과 노고가 있기 때문에.. 실제로 간접지원이 직접지원의 효과를 내지 못한다면 간접지원의 의미는 없거든요? 예를 들어 아까 말한 3가지. 공공기관의 경우와 사설기관과 전문연, 이런 단체들, 공공기관에서는 사실은 실제로 창작자들을 픽업을 하죠. 픽업하는 시각이 좁혀져 있다는 것이 문제고. 사설기관 같은 경우는 지원을 하면은 그 결과가 창작자한테 어떻게 혜택이 돌아가는지를 사후검증 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아까 얘기하셨듯이 이렇게 지원을 했으니까 대관료를 내려라 그래서 대관료를 내려서 임대를 해줬다는 서류를 내거나 이런 식으로.. 전문연같은 경우도 공공기관하고 비슷하죠? 이분들 같은 경우 지방에서 관객을 모으려 하다보니까 서울에서도 잘 뜬 작품과 상업적으로만 가져가게 되는데 상업적으로 가져가서 상업 좀 하면 되지, 뭐, 굳이....

채: 어쨌든 간에 열려진 공연 공간 같은 것이 제일인 것 같고 그것을 포함해서 홍보라든가 출연료 같은 것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중견배우들한테 같이 고생을 하자는 것도 한계가 있고.... 나아가 이런 것들도 필요한 것 같아요. 연극인복지문제 말입니다. 아까 박상현 선생님 말씀대로 극단 제작비를 정서적으로 다운시키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거죠. 예술인복지문제에 신경을 쓰는 것, 한국연극인 복지재단에 기금을 지원하는 것, 이런 것도 우회적인 지원의 일종이라고 생각하구요. 이런 간접지원책들이 다양하게 전개가 되어서 선택받지 못한 단체들이 촘촘한 안전 그물망에서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실효성 있는 지원책이 되어야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박: 제작비하고는 시각이 다르지만 복지문제는 여배우들한테 특히 중요한 것 같아요. 좋은 여배우들이 스멀스멀 사라지거든요. 출산육아문제가 해결이 안 되니까 지금 40~50대 여배우들이 없습니다. 그런 문제가 있고 작가들 연출가들 반성해야 하는 데요. 여자가 주인공인 작품, 여자가 다수로 나오는 작품들을 안 써요. 앞으로는 젊은 여성작가들이 많으니까 달라지겠지만. 그래서 여배우들이 일단 같이하면 프로덕션에 대한 참여도가 굉장히 높습니다. 다. 연출자들이시니까 잘 아시잖아요?

채: 예, 인적인 교류..... 즉 젊은 연출가들이나 제작자들은 활동을 많이 하고 있는데 나이를 많이 먹은 중견배우들과의 괴리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인적 교류 시스템을 조성하는 것도 하나의 과제이지요.

전: 또 다른 것은, 개런티 문제죠. 저희 극단 같은 경우도 외부 연기자 출연을 결정 하였을 때 우리가 최대한으로 줄 수 있는 액수와 그들이 원하는 최소한의 액수의 차이가 커서 처음부터 말을 걸 엄두도 안 나는 거죠.

채: 그런 측면도 있지만 중년 여배우 중에서는 가정적, 경제적으로 특별히 문제가 없고, 노는 배우들도 많이 있어요.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개런티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지만 작업의 고충을 이야기 하면 충분히 열린 마음으로 접할 수 있는 중견 배우들이 많거든요.

홍: 지금 말씀과는 방향이 다르지만, 지원에 관한 문제에서 가장 처음 얘기가 되었어야 할 문제인거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지원을 하는 가장 큰 목적과 목표가 무엇이냐는 것이죠. 분명 지원하는 데는 극단이나 예술인들에게 예술을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여건들을 편안하게 마련해주기 위함이 있을 거구요. 또 하나는 그런 것을 통하여 서울시와 우리나라의 문화예술을 발전시키려는 것이 지원의 목표나 목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러한 목적이나 목표가 어떻게 설정이 되어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해진 장르와 틀을 요구한다거나, 심사위원의 취향대로 바뀐다거나 하는 것은 지원의 목적이나 목표에 너무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단기적인 목표나 목적도 있겠지만 실질적인 문화의 발전을 위해서는 중장기적인 목표나 목적도 분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매년 해왔던 것처럼 반복되다 보니까, 심사 대상이 되어 받는 사람들조차도 항상 찜찜한 것이죠. 다시 한 번 지원의 목적이나 목표가 예술인들에게 정확히 공지되어야 하고, 그러한 목표가 흔들리지 않고 잘 성취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송: 채 선생님 말씀대로 한쪽으로 몰아간다든지 또는 연극인들 스스로 알아서 몰려간다든지 하는 것이 가장 무서운 적이 될 텐데요. 우선 지원 제도의 다양성 확보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중견배우 10명에 600석 극장이 필요한 작품과 젊은 배우 서너 명 나오는 작품을 소액다건으로 동일한 조건에서 심사를 합니다. 조금만 운영의 묘를 발휘해서 구분을 하면 된다고 봐요. 획일화는 운영자 입장에서는 편리하겠지만 그 때문에 젊은 극단들의 작품이 빠져버릴 수 있는 거니까 결국 건강하지 못한 것이죠.  

채: 고위 관료가, 지원이 없으면 작품을 만들 자신이 없느냐 식의 말을 했다는데, 바로 그러한 시각과 정책이 엊그제 사망한 최고은 양과 같은 상황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함정을 만들어 놓고 살아 올라오는 전사나 사자만 키웠다고 하는 스파르타의 전설을 연상시킵니다. 젊은 계층일수록 지원의 그물망에서 누락되기 쉽겠지요. 그들에게 자기가 좋아서 하는 예술이니까 자기가 알아서 살아 올라와야지 하는 것은 진정한 문화정책이 아닌 것 같아요. 그들이 허심탄회하게 해 볼 수 있게 하는 공간을 많이 마련해 주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그런 쪽의 배려있는 정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구요. 대관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면 또 대관이야기 한다며 고깝게 생각하는 시선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것이 얼마나 절박한 요구상황인지 지원주체들은 진지하게 생각해 주기를 바랍니다. 일본의 가나자와처럼 공장이라도 개조해서 주든지, 교회당이라도 열어서 해보라고 하든지 등의 배려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박: 일단 지원금을 지원금으로 쓸 수가 없고, 일단 지원금이 들어오면 극장으로 다 들어가니까요.

채: 현재 직접지원은 20억에 못 미치는 상황이고, 지원의 불균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 정부의 입장에서는 투자하는 돈은 많다고 생각하지 결코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다고 한다는 것이죠.

박: 그것은 우리같이 누추한 수준에서는 적다고 보지 않아요. 그것이 왜 불균형하다고 느껴지냐면 그쪽이 얼마나 공정성을 갖고 있으며, 공공성을 발휘하고 있느냐는 것이죠. 공공성과 공정성이 발휘된다면 그거 불균형하지 않아요. 우리가 다 혜택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채: 이게 공공극장이나 공공예술단체들의 인건비, 경상비보다도 훨씬 적은데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전: 따지고 보면 그렇죠. 예를 들면 몇몇 공연처럼 정부에서 주는 간접지원도 굉장히 크다고 알고 있어요. 일본관광객을 유치하기위한 홍보와 관광에 관한 지원 등. 창작자에 대한 직접지원은 전체 예술정책 중 새발에 피죠.

채: 한팩, 명동예술극장 같은 경우, 홍 선생님이 말씀하셨다시피 시간이 흐르면서 다분히 공공성, 예술성 지켜나가기가 쉽지 않고, 대중화되어질 수밖에 없고, 전문연 같은 경우는 더 심할 것이구요. 그에 반해 그래도 이번에 서울문화재단에서 뽑은 작품들을 보니까 공공성, 예술성을 우선하는 작품들을 나름대로 선택한 것입니다. 또 예술위의 사후지원 작품 선택의 경우도 그런 측면을 살려 나가는 것 같구요. 바로 직접지원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직접지원금을 확충해서 간접지원과 균형을 맞추는 것이 무척 중요한 사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 그럼 우리 안에서도 지금 두 갈래의 주장들이 나오는데요. 공공에 관한 지원, 일종의 간접이죠. 방금 말씀하신대로 직접적인 지원은 제로섬게임 같은데요....

채: 그것은, 말을 끊어서 죄송한데요, 바로 그런 문제는 이미 현정부의 출범 때에 발생했어요. 거의 모든 직접지원금을 간접지원으로 전환시키고자 했었지요. 그리고 많은 부분 그렇게 했지요. 제가 당시에 그에 대한 비판글을 썼는데요. ‘간접지원도 좋다. 그런데 직접지원금을 가져가서 충당하는 방식은 안된다. 외부에서 기금을 새로 마련해서 간접지원을 해야지 직접지원금 전환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직접지원금 증액시켜야 합니다. 서울문화단체 측의 글을 보니까 되도록 많은 단체들에게 주기위해서 고심을 했다고 썼습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가 안타깝게 받아들이면서 액수 상으로 직접지원 4, 간접지원 6 정도의 비율로 책정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기초예술도 풍성하게 생산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봅니다. 밭이나 논을 고갈시켜 놓고 결과물만 뽑으려고 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송: 공연예술의 인프라라는 큰 틀에서 봤을 때 대중성을 가미한 공공극장도 안될 것은 없다고 봅니다. 그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예술성을 갖춘 극장이라는 얘기일 뿐이고, 거기에는 백프로 지원을 해줘야 한다는 거죠. 하지만 공공극장과 대중성을 대하는 기본적인 생각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그것이 대세” 이니 쫓아가야 한다는 발상은 상당히 위험하죠. 영국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예를 드는데, 영국하고는 모든 면에서 비교가 안되죠. 그리고 영국은 어떻게 보면 유럽 내에서도 문화적으로 특수한 상황에 있는 나라예요, 미국에서 유럽으로 들어오는 대중적인 것들에 대해 방어막도 쳐야하고, 자체 생산되는 것도 유지해야 하는, 예술과 대중성 사이를 정말 간당간당하게 곡예를 하는 나라잖아요. 그걸 예로 들 수는 없죠. 즉, 모든 나라에서 재단화, 대중화가 다 대세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발상이 아니더라도 홍 선생님 말씀처럼 큰 그림을 그려놓지 않는다면 처음엔 약간 대중적인 것, 다음은 쎄미한 상업극, 다음은 뮤지컬 그렇게 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뮤지컬이 다 나쁘다는 건 아니예요. 우리 이야기를 노래하고 춤추면서 한다는데 뭐가 나쁩니까. 미국식 이데올로기가 무비판적으로 들어가 있는 오락물을 상업적 목적으로 비싼 값에 들여와 공공극장에서 한다면 문제가 된다는 거죠. 한번 대중성으로 가게 되면 그때는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현실적인 운영 문제는 지금이라도 국고를 채울 수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국고만으로는 해결이 안될 테니 민간 자본을 끌어들여야 하고, 어떻게든 설득하고 유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김: 거기에 대해 이야기 한다면 지원금 거부에 대한 생각도 젊은 세대도 있었으면 하는데..그런 진보적인 개혁, 자신들한테 맞는 새로운 생각들은 거의 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박: 요즘 젊은 친구들이 더 심하죠. 지원 없으면 안 움직이죠.

김: 이게 더 위험한 것이 아닌가....

홍: 체제 속에서 길들여지는 거죠.

송: 덧붙여서 장기적인 목표를 두고 실행하는 사업이라면 몰라도 그게 아닌 상태에서, 예를 들면 서울문화재단 소액다건 같은 지원심사를 계속 같은 사람이 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결국 지원단체가 심사위원에 신경을 쓰게 되고, 그게 곧 길들여지는 거죠.

전: 상시 지원제도 같은 경우도 어느 정도 일정 기간 안에서 연출가와 작가와 배우들에게 인터뷰도 좀하고 연습하는 과정들도 심사위원이 보고 ‘이러이러한 부분에서 지원해줄만하다,  완성도에 측면에서, 또는 과감한 시도더라!’ 등등 하여 지원 작을 선정하는 제도도 있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 페이퍼 형식으로만 결정되니 안타까운 부분도 있어요. 그런 부분이 추가된다면 창작욕을 더 고취시키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제도라면 지원을 못 받더라도 어떤 부분에선 전문가적 입장에서 도움을 주는 거니까 나름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부족한 면을 보완할 수 있는 점도 되고요.

김: 이번 지원된 60개 작품 중에 보면 참 씁쓸하고 슬퍼해야할지.... 지원단체대상에 원로선생님도 그 명단에 있고 잘 모르는 새로운 이름들이 있는데 과연 어떤 기준으로, “선생님 내지 마십시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선생님을 누가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이며, 새로운 시작하는 단체나 창작자들을 어떻게 해서 공공성을 함께 담보 할 수 있다고 감히 말을 할 수 있는 것인지 그렇게 하는 것이 동등하고 차별화인 것인지 무한 경쟁을 시키는 것인지 많은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려든다 이말 입니다. 그걸 보고 있으면 참 이게 뭐야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든다 이거죠.

홍: 방법상의 문제인데. 연구재단의 경우, 신청자가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는 거죠. 지원자가 누군지 모르고. 그 작품만을 보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성과며 올렸던 작품이며 모든 게 다 같이 올라가니까..

김: 그래서 원로선생님보고 작업 하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과 세월에 맞는 다른 대책은 없는지... 오히려 60~70세 윗세대 연출가들이 소외감을 많이 느끼고 있어요. 서류와 방법과 모든 새로운 매체에서 거의 다 소외된다 이거죠 해보려 해도 익숙치 않고 쑥스럽기도 하고 그러실 거 아닌가하는 생각과 ‘당신은 능력 없어서 안 되는거야’ 라는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최고은’식의 불상사가.... 아니 어쩜 살아있으니까 더 힘들 수 도 있지요.

채: 소위 말하면 확실하고도 명백하게 검증되지 않은 성과들을 축적시켜서 반복해서 부익부빈익빈을 생산해내는 악순환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걸 아까 그물망이라는 말로 사용을 했는데, 노, 장 층 연극인들도 균등하게 함께 할 수 있는 정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 오늘은 말입니다. 간접지원, 직접지원, 사후지원, 선택과 집중 이라고 하는 현 정부의 지원정책에 관하여 이야기 나눠 보았는데요. 거기서 나타난 문제점이나 보충점을 간단히 요약해보자면,
첫째는, 간접지원과 직접지원의 비율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죠. 현재는 간접지원 쪽에 치우쳐있다는 것. 간접지원의 치중이 대학로의 황폐화 못지않게 연극의, 나쁜 의미로의, 대중화 상업화를 가속화 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 창작들에게 직접지원 해주는 액수가 늘어야한다는 의견이 나왔구요. 선택과 집중에서 선택받지 못한 단체들이 많은데, 젊은 연극인들 쪽이 상대적으로 많고, 또 때에 따라서는 중견이상 노년연극인들도 많을 수 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소외의식을 가져서 연극계의 생산능력을 떨어뜨릴 수 있으니까 그런 분들을 위한 그물망 같은 지원보완책이 생겨서, 간접지원을 다양화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대관료가 없는 극장 나아가 열린 공연 공간 같은 것을 만들어주는 것부터 복지문제까지 신경을 써주는 다양한 간접지원책이 연구되어져야 한다. 현재는 재단화된 극장을 통한 간접지원으로만 치중되어 있는데 그것은 굉장히 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폭넓게 수용하는 정신을 가지고 준비가 덜 된 예술인, 소외된 예술인들도 포용하는 간접지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말씀하셨습니다. 문화예술지원 총액이 대폭적으로 늘어나야한다는 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다음 달엔 급격하게 현안으로 대두된 예술인 복지문제에 관한 토론을 이어나가보기로 하겠습니다.

편집 후기

이정현기자 jh4017@hanmail.net

6호가 나왔습니다.
많은 선생님들과 필자님들께 감사 드립니다.
많은분들의 수고로 이번 6호도 무사히 나올수 있었습니다.
욕심내지 않고 조금씩.. 꾸준히 발전하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심희령기자 sim8416@hanmail.net 

 

짧은 기간이었지만 훌륭한 많은 분들을 알게되었고, 하나하나가 제겐 모두 큰 가르침이었습니다.

많이 배웠고, 많이 감사합니다.




심희령 기자는 장기 해외 체류 관계로 휴직하고, 장시내 기자는 출산 관계로 잠시 쉽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1-139 한양빌딩 4층 서울연극협회
E-mail : jh401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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